반환의 前後 아편전쟁의 결과로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 체결과 함께 홍콩섬과 그 주변 섬들을, 1860년 베이징조약(北京條約)으로 구룡반도(九龍半島)를, 1898년 신계지역과 235개의 외곽섬을 차지한 영국은 정치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당시 7,000여 명 규모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한 지역을 중국인들이 오고 싶어 하는 동경의 대상지로 발전시켰다. 1980년대에 이미 인구는 540만이 넘었고, 1997년 반환 당시 인구는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700만을 넘었다.
중국은 이미 국권 이양 7년 전에 홍콩인수위원회를 결성하고 1990년 4월 4일 제7기 전국인민대표회 제3차 회의에서 7년 후 귀속 될 홍콩관리를 위한 기본방침인 기본법을 확정했다.
9년 前 주권 반환 이양식 지금으로부터 9년 전, 1997년 홍콩 반환(주권 이양식)은 홍콩 역사의 마감이 될까 도약의 전환점이 될까에 대하여 각계마다 의견과 예측이 분분했었다.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반환 시일을 알리는 대형 전광판시계가 설치되고 전 중국인민들 역시 흥분되어 있었다. 드디어 7월 1일 0시 필자 역시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방영되는 주권반환식 행사장에 마음이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환식을 목적으로 지어진 컨벤션센터 그랜드 홀에서 영국 찰스 왕세자의 고별사와 중국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경축사로 행사를 마무리한 뒤 오성홍기(五星紅旗)가 게양되자 장 주석과 찰스 왕세자 등 참석자들은 기립자세를 취했다. 살아생전 중국의 장래는 개방개혁에 있음을 예견하고 경제특구 전략을 실시하여 중국발전에 절대 공헌을 한 덩샤오핑(鄧小平) 전 최고 지도자는 1984년 영중재협정(英中再協定)에서 단판승리를 이끌어 낸 작은 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에게 이 기쁨과 감격에 순간을 허락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휠체어에 앉아 이양식에 참석하고 있는 그의 큰 아들 장애우 덩푸팡(鄧璞方)을 보면서 다른 세상에서 웃고 있을 아버지 덩샤오핑을 생각하고 있었다.
개명 홍콩은 1997년 6월 30일 자정(子正)을 기하여 아래와 같이 지역명(名)은 변하게 되었다. 영문: S.A.R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중문: 중화인민공화국홍콩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香港特別行政區)
기본 방침 1. 일국양제(一國兩制) - 하나의 국가에서 사회주위와 자본주의 즉, 두 개의 제도를 공존시킨다는 정치적 병행 구조. 2. 주권회복(主權回復) - 주권은 중국에 반환되지만 홍콩은 홍콩인에 의하여 다스리는 체제. 3. 50년 불변(保持繁榮穩定) - 97년 이후 50년 간(2047년 6월 30일)은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홍콩 제도와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는 약속. 국권 이양에 있어서 국방권, 외교권을 제외한 경제권에 대하여는 제한적인 이양으로 인해 사회주의 체제 속의 경제 방식으로 홍콩을 관리하지 않는다는 의미.
변화된 상황과 역사하심 선교적 측면에서 볼 때 홍콩이 중국 영토가 되는 시점을 뱀에게 먹히는 두꺼비 이야기와 견주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 영토가 된 홍콩은 잠정적으로 거대한 공산 세력이 지배하는 중국에 흡수되어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선교 전략적 측면에서 홍콩 반환은 바로 뱀을 죽이고 몸속에서 번식하는 두꺼비와 같이 중국선교의 극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 귀속되는 주권이양은 중국 대륙선교를 비전으로 품고 있고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경이로운 진일보적 기회가 된 것이다.
1. 사역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홍콩은 중국 디아스포라와 본토에 대한 복음전도, 제자훈련, 매체, 문서사역 등에 있어서 활동의 중심이자 재정의 원천이었다. 기독교 인구는 10%에 불과하지만 505개의 학교, 사회단체의 60%, 병원의 25%를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끼쳐왔다. 이 노하우는 홍콩에서 광둥성(廣東省)으로, 광둥성에서 화난(華南)지역으로, 화난지역에서 전 중국 대륙 안으로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홍콩만큼이나 중국사역을 안전하게 준비하고 민첩하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효과적인 지역은 없다. 전에는 밖에서 가능하던 일들이 이제는 안에서 가능해졌다고 보면 된다. 교육사역, 의료사역, 구제사역으로 중국은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축복 받는 국가로 부상 되고 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반환 전에는 홍콩인들 역시도 중국을 왕래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통행증을 발급 받으면 여권 없이도 왕래가 가능하다. 외국인의 경우에도 여행사를 통하여서 비자(1년; 미화120$, 영주권자는 3년이 가능; 미화 130$정도)를 받으면 수시로 왕래가 가능하다. 반환 전에는 중국은 비수교국으로 영사관에 신고 절차가 번거로웠다. 하나님이 남겨 두셨던 안개도 사라지고 장마도 끝났다. 이제는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모든 것이 더 수월해졌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인가!
2. 사회주의 국가에서 유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반환 이후에 중국, 베트남, 네팔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이곳으로 유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 신학교에는 15개국 이상의 국적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도 있다. 해외에 있는 차이나타운(唐人街)에는 80%이상이 광둥성과 푸젠성(福建省)에서 이주한 중국인들이다. 이들 가운데 중국선교의 비전을 품고 있었던 자들에게는 홍콩 신학교의 유학의 길은 희보가 아닐 수 없었다. 현재에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오는 유학생들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사실 사회주의 국가 대상으로 사역을 안전하게 진행시키기는 많은 제한이 따른다. 그런데 이제는 이들을 홍콩에서 마음 껏 교육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훌륭한 인적 자원을 훈련하여 보낼 수 있는 기회가 확장된 셈이다. 위험 부담이 있는 내지에서의 사역을 이제는 홍콩에서 불러내어 특수훈련을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놀라운 섭리인가!
3. 가정교회를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반환되기 전 홍콩교회는 치밀하게 중국 속에 홍콩교회가 존속하는 길에 대하여 방법을 모색했다. 그 대안이 셀(cell) 목회였다. 셀 구조로 택한 교회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중국 속에서 유지되고 있는 중국 가정교회를 결국은 핍박 속에서도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환 3-4년 전부터 셀 목회에 대한 세미나들이 이곳에서 열렸다. 홍콩교회는 1970년대에 700개, 1994-99년 사이에 900개, 2000년 이후에 1,2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침례교 계열은 답보상태, 오순절 계열은 성장일로에 있다. 그 외에 교단들은 감소 상태에 있다. 반환 사건은 홍콩교회가 스스로 자신을 재정비해 보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홍콩교회는 핍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철저하게 합리주의적으로 교회를 운영해왔다. 그런데 반환을 놓고 불안해진 마음은 기도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 기도운동은 교회를 성경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역할에 일조를 했고 결국 중국교회 즉, 고난 속에 견디어 온 가정교회와 성도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4. 중국선교를 지향하고 있던 신학교들은 더욱 체계적인 사역을 하게 되었다. 학교명을 밝히지 않더라도 2-3개의 대표적인 신학교가 있다. 이 신학교의 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구체적인 실습을 하기 위하여 중국 대륙 또는 대만, 싱가포르 아니면 해외 차이나타운으로 떠난다. 그러므로 이 신학교 출신들은 표준어인 푸통화(普通話)에 능숙하다. 중국을 위해서 설립 또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던 신학교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반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당시로는 당황하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주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반환의 단맛을 그리워하도록 이미 감각을 조절시켜 놓으셨던 것이다.
반환 전에는 대륙으로 선교실습을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변 국가로 가야 했기에 적지 않은 경비가 요구됐다. 그러나 이제는 대륙만큼 적절한 곳이 없다. 학생시절에 이미 실습을 갔던 지역에 졸업 후 장기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갈 수 있게 되므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5. 현지인들의 통행증제도는 중국왕래를 원활하게 했다. 현지인들의 왕래를 돕기 위하여 실시한 통행증 발급제도는 여권심사의 번거로움을 제거했다. 매일 기차로 왕래하는 수만 명의 승객들 중에 사명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수많은 기독교 책자들이 대륙으로 운반 되고 있다. 세관에서는 모든 짐들을 철저하게 검사하려고 하지만 통행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에 열린 구멍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하여 기독교자료들은 계속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열린 문을 통해서 말이다. 외국인의 경우에도 통행증은 조건에 따라서 신청할 수 있다.
6. 출판사역을 통하여 중국선교는 활성화되고 있다. 중국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홍콩을 150년 동안 철저하게 준비시켰다고 생각한다. 50여 개가 넘는 출판사들이 중국을 위해서 지금까지 사역해 오고 있다. 60여 개가 넘는 기독서점에는 중국내지 사역을 위한 간자체 서적이 늘어날 뿐 아니라 간자체 코너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또한 적지 않은 전문 사역 단체들이 이미 알려져 있는데 특별히 저술, 인쇄, 출판, 배포를 대규모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전문 사역 단체(CCL, EHC, CMA)들이 있다.
7. 선교기관의 이동으로 중국선교는 광범위해졌다. 90년대에 들면서 외국 선교단체들은 반환을 놓고 여러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 그 중에 큰 변화는 대만, 태국, 한국, 싱가포르 등지로 본부를 이동한 것이다. 그 이유는 정보를 관리하는 면에 있어서 안전성과 미디어 사역을 위한 자료 개발에 안전을 위함이었다. 사실 중국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자료들의 절반 이상은 홍콩이 아닌 제3국에서 연구 제작되어 유입되고 있다. 본부의 이동은 이보(二步) 전진을 위한 일보(一步) 후퇴였을 뿐이었다. 제3국에서 해야 할 일들을 중국 내에서 하다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역이 조직화되고 업무가 분담이 되면 선교는 훨씬 더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진행 될 수 있다.
8. 대륙에서 중국인들이 오기가 수월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인이 대륙에서 홍콩에 오려면 여행사에 보증금을 임시 위탁하므로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출국에 법적인 결격사유가 없는 자라면 자신의 호적이 있는 곳의 파출소에 신고만 하면 단기간 홍콩 여행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중국인들도 많다. 반환되기 전에 단순 노동자들 중에는 필리핀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태국, 네팔사람을 포함하면 30만이 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을 중국인으로 대치시킨다는 것이 중국의 방침으로 인해 외국근로자들의 비자 연장은 어려워지고 있고 중국인들에게는 수월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중국사역의 기회는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이미 어떤 선교단체들은 내지 사역자들을 불러내어 훈련을 시키고 있다. 정책회의 등도 홍콩에서 모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중국인을 위한 훈련센터를 홍콩에서 준비할 때인지도 모른다. 성경공부뿐만 아니라 기도와 찬양을 소리 내어 가르쳐 보고 싶은 마음이 어느 선교사에게 없으랴! 지금이 가능하다. 앞으로 이 가능성은 더 열려질 것으로 본다.
9. 중국사역이 더욱 양성화 되어가면서 더 많은 교회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중국선교는 홍콩인들이 가장 두려워한다. 반환 전에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교회가 적었다. 1976년에 50개 교회, 96년까지도 300개 교회 전후였다. 그러나 친척방문이 늘어나면서 중국교회에 대하여 바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고난 속에서 견디어 온 그들의 신앙간증에 은혜를 받기 시작했다. 대륙성도들의 간증서적이 큰 공헌을 했다고 본다. 이제는 57% 즉, 600개 이상의 교회가 중국선교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다. 교회학교에서도 초·중·고생들의 여름활동을 중국으로 가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반환 이후에 교육계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표준어 교육을 최소한 한 주간에 1회 이상을 실시하도록 제도화시켰다.
10. 션쩐(深玔)으로 이주, 홍콩으로 출퇴근자들이 늘고 있다. 홍콩에서 국경을 넘으면 션쩐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차이는 있지만 1시간만 전철을 타면 국경을 넘는다. 국경만 넘으면 주택임대료는 3-5배 저렴하다. 생활비 역시 그렇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업이 중국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다. 이유로 션쩐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사무실 역시도 홍콩섬 쪽에서 국경 부근으로 옮겨오는 경우가 늘고 있다. 외국인들도 그러하다. 한국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최소한 일주일에 3번 이상은 홍콩을 왕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서 일명 당나귀사역이라 불리는 운반사역은 계속 진행되고 있음이 감사한 일이다.
11. 생산 공장들이 대거 중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 변화로 인하여 홍콩에는 실업률이 높아지게 되었다. 많은 공장들이 이주하면서 직원들에게 중국으로 함께 가면 관리직으로 고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권했다. 이로 인해 수 많은 주말 부부들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따른 외도, 이중생활, 이혼율이 높아지게 되었다. 홍콩에 공장을 두고 홍콩인 1명을 고용할 임금으로 중국에서는 10명 이상이 가능하다. 단순노동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업주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당하는 홍콩인들의 입장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중국으로 이주된 공장 안에서는 그리스도인 기업주들을 통하여서 특별 절기를 활용하여 선교적 차원에서 일 년에 몇 차례 공단선교가 진행되고 있다. 미용, 의료, 문화공연, 복음전파 사역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누가 이런 일들을 예측이나 했겠는가!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요, 그 분의 작품이다.
당신을 위한 부르심 세계인구의 61%, 41억이 아시아에 살고 있다. 그 중에 13억이 중국에 살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의 기독교 비율은 8.58%다. 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그리스도를 믿느냐에 따라서 세계 선교의 지름길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필자 역시 아시안으로서 지역 복음화에 대하여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독자 여러분과 제가 아시아 복음화를 간절히 사모하고 이에 대한 책임의식을 더 강하고 바르게 갖자는 마음에서 700년 전에 있었던 실화 하나를 나누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주후 13세기경에 아시아 전 대륙이 기독교화 될 뻔했던 역사적 상황이 있었다. 그때는 징기즈칸이 몽고 제국을 건설하고, 아시아와 유럽대륙까지 세력을 뻗치던 시대였다. 징기즈칸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를 이어서 징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세계 대제국을 건설했다. 동쪽으로는 중국과 한국까지 점령하였고, 남쪽으로는 인도까지 점령했다.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중동과 유럽까지 점령하였고 폴란드와 헝가리, 독일까지 원정해 갔던 것이다.
쿠빌라이 칸은 독일에 가서 기독교 문화와 접촉을 가지면서 기독교 문화에 매력을 느꼈다. ‘기독교 문화가 이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운가?’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래서 자신도 기독교 문화와 개인적 접촉을 가지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당시 로마 교황이였던 그레고리 10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전달한 사람이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인 마페 폴로였다. 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우리를 위해 당신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사람 백 명을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나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 쪽에 있는 사람들 못지않게 우리 쪽에 있는 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로마교황 그레고리 10세가 이 편지를 받고 교황청에 각료들과 “야만족인 몽고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저들을 세례 받게 하는 것이 타당한가?”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회답을 하지 못했다. 독일에 있던 쿠빌라이 칸은 교황청으로부터 아무런 회신이 오지 않자 교황과 기독교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다시 시베리아를 건너 중국에 와서 중국의 명왕조를 무너뜨리고 거기에 원나라를 세웠다. 그럼으로써 그는 유명한 원나라의 태조가 되었다.
그로부터 18년이 흘렀다. 늦게 깨달은 교황은 선교사를 몽고에 파송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쿠빌라이 칸은 세상을 떠났고, 상황은 180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 후에 교황청은 두고두고 이 일에 대하여 후회를 했다고 한다. “만약 그때 쿠빌라이 칸이 선교사 백 명을 보내 주면 자기도 세례를 받고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그 편지대로 선교사 백 명을 보냈더라면 아시아 전 대륙이 기독교화가 되었을텐데.”하고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다.
기회는 언제든지 항상 오는 것이 아니다. 기회가 왔을 때에 그 기회를 잘 붙들고 선택을 잘 해야만 한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중국복음화를 위해서 함께 마음을 모아야 할 때라고 본다. 기회를 잘못 붙들면 결국 후회하고 만다. 경제적으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고 불려졌던 홍콩을 이제는 선교적으로 단비를 내려주기 위해 떠 있는 희망의 구름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글을 대하는 여러분의 기도와 사역을 통하여서 중국으로 인하여 주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일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전진휘 | 모리슨선교회, CSF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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