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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타종교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
(이슬람권 복음화를 위한 깊이 있는 성경적 연구와 성찰이 필요하다.)
한국선교사들은 그들의 보수주의적 신학 성향 때문에 타종교권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우선해서 취할 때가 많다. 모든 타종교는 사단의 영향 아래 있다고 여기는 그들의 보수주의적 태도로 인해 타종교 안에서 발견되는 자생적 복음전파와 교회개척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을 놓칠 때가 더러 있다. 이에 대해 성경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바울의 타종교권에 대한 자세 고찰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그들의 종교성을 살펴보았다. 바울은 처음으로 이방인(그 이전에는 주로 유대인들이나 유대인으로 개종한 이방 유대인들을 상대)을 대상으로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에서)”라고 전했고, 또 그는 사도행전 17:28에 “(…)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라고 전파하였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선(先)지식을 이용해서 그들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전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2의 이 말씀을, 바울이 아덴에서 세상의 지혜로 복음을 전한 것을 후회해서 앞으로는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울이 그런 어조로 말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문맥을 통해서 바로 알 수 있다. 먼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복음은 세상의 지혜로 전달할 수 없음을 밝혔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절) 바울이 말하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지혜란 세상적인 철학이나 이론을 말하는 것이지,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한 방식이 세상적이었다고 의미하는 언급은 없다.
오히려 바울은 동일 서신서 9장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절),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0절),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21절),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22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23절)”라고 천명함으로써 자신이 자유함을 얻은 존재이지만 복음전파 대상자들을 더 얻기 위해서 그들처럼 되어 그들에게 접근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복음에 참예’하는 길이라고 선언하였다. 첫 선교사기도 했던 바울처럼 이방 종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한번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는 일일 것이다. 그와 더불어 함께 선교지의 선교대상그룹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그들이 믿는 경전, 공동체, 종교역사 등)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선교사들은 객관적인 자료와 역사, 문화 등에 근거해서 선교전략을 내놓기보다는 그냥 자신이 알고 있는 선교전략으로 이들을 쉽게 전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거나, 아예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포기해버리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 B국 이슬람의 구원론과 공동체, 역사에 대한 고찰
B국의 무슬림은 대부분 태생적인 무슬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려서부터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세계에서 학자나 지도자를 양성하는 고등교육 시설_편집자 주)나 기존 일반 학교와 가정에서 철저히 이슬람식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으며, 삶의 방식 또한 어려서부터 이슬람의 전통을 경험하며 자란 이들이다. 비록 그들의 대부분은 경전인 꾸란을 제대로 이해하고 읽거나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라마단 금식이나 마스지드(masjid)에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공통적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끼며 성장해왔다. 게다가 이슬람 지도자들은 알라(하나님의 호칭)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도 계시를 주었지만, 그들이 알라의 구원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최종적으로 꾸란을 무함마드(Muhammad)에게 계시해서 완성된 이슬람교가 형성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 무슬림의 다른 종교로의 개종은 이슬람가족과 공동체에 엄청난 모욕을 가져다주는 배교행위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개종은 어려서부터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이슬람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며 많은 이들이 이슬람에 대해서 자부심이 강하다. 심지어 그다지 신앙적이지 않은 세속주의 무슬림들도 마음으로는 이슬람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회적‧문화적 압박감으로 인해 그냥 이슬람을 수용하는 실정이다. 이슬람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구원방식과 알라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아서 모순과 갈등이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마스지드에서의 나마즈1)는 천국에 가는 열쇠라며 이슬람식의 기도인 나마즈를 한 번 하면 수많은 죄가 용서를 받는다고 하디스를 통해서 가르치며 실행하고 있으나, 여성들이 마스지드에 오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등 자체 모순을 여러 군데에서 보여주고 있다. 성지순례인 하지(Haj)나 금식월인 라마단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살랏 등을 통해서 죄가 사해진다고 가르치고 있어서 무슬림 사회에 드러난 죄악은 개인적인 것이나 집단적인 것이나 기존의 타국가보다 타락을 더 조장하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처럼 무슬림들은 죄 사함에 대한 근거를 자신들의 어떤 종교적인 참여에 있어서 자신이 지은 죄의 정도와 계산을 해야 하는 복잡한 영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조차 없이 태생적으로 받은 종교를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 한다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이다.
왜 B국 민족은 이슬람을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였는가? 역사적인 관점으로 한번 살펴보자. B국은 힌두교와 불교가 왕성히 발전했던 지역이다. 그러나 B종족은 힌두교와 불교의 갈등 속에서 지쳐 있었고, 힌두교와 불교가 만들어낸 신분의 차이에 대해서도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슬람은 처음에는(1204년경) 무력을 동원했지만 후에는 무력보다는 오히려 낮은 자리에서 B국 민족들과 함께하는 자세를 취하며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바로 B국 민족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만인은 알라 앞에 평등하다.”라는 인류평등사상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토속적인 신앙을 대거 흡수하고 이슬람을 통한 일차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수피운동2)을 통해서 B국 민족은 자기의 종교로 이슬람을 대거 받아들이게 되었다. 심지어 영국식민지 시대(1757∼1947년)에도 이슬람교가 끊임없이 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상당한 기여를 하면서 B종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이슬람은 B종족의 민족 종교로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


(3) 이슬람의 장점과 단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슬람교의 장점은 성경적으로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회심자들이 사용하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많은 이슬람의 배경은 사실 성경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성경으로 재교육하면 바로 그들의 장점이 더욱 성경적으로 강화되게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단점을 지나치게 부각하여 부정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면 강한 반발을 일으킬 수 있고 결국은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닫게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많은 집단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집단적으로 종속될 수 있음을 우리도 인식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를 알 때까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단점은 인내로 보류하는 것도 지혜로울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장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알라 즉 최고의 신에 대한 경외심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일하신 알라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강한 경외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삶과 문화에 깊이 결부된 일원론적 모습을 띄고 있다. 이들의 이런 단일신론 사상은 성경의 유일신론과 유사한 내용이 많다. 물론 이슬람의 알라가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한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은 많으나 이미 구약의 창조 기사를 시작으로 하고 있는 꾸란에 나타난 알라의 모든 내용을 모으면 거의 90% 성경과 동일한 하나님의 개념을 담고 있다. 이런 단일신론 개념이 성경의 유일신론 신앙으로 잘 인도하면 오히려 다신교적 종교관을 가진 사람들보다 성경의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영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둘째로, 꾸란은 성경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들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동일한 사전적 지식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기가 유익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꾸르바니 이드3)인데 이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알라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에 아브라함의 순종을 알게 된 하나님은 아들 대신 동물을 제물로 바치게 한 사건을 기념하는 이슬람 축제이다. 지금도 모든 무슬림들이 이날을 중요한 이슬람 축제일로 여기고 지키고 있는 데 이 역시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4)
셋째로, 그들의 지도자인 이맘5)의 생활을 잘 살펴보면 오로지 종교적인 일에만 집중하고 검소하게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마스지드사원도 그들 스스로 모금해서 짓고자 하며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종교권에서 돌보려고 애를 쓴다. 특별히 무슬림들의 손님을 접대하는 자세는 기독교인을 부끄럽게 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있다. 특별히 술과 매춘을 종교적으로 엄하게 다루고 있어서 이 분야에서도 높은 도덕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슬람 공동체(움마)6)를 통해서 이슬람교는 강력한 일치를 유지한다. 이슬람 내부에도 수니파와 시아파 등 분파가 있지만 그들이 가장 이슬람의 장점으로 내세우는 것은 전 세계 이슬람의 공동체 사상인 움마이다. 전 세계 무슬림들이 라마단 기간 중에 다 금식하고, 꾸르바니 이드 중에는 소와 염소를 잡고, 성지순례에는 다 같은 복장으로 참여하는 것은 종교적 일체감을 형성한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자기 가족의 한 사람이 죽으면 전 지역사회가 참여하여 장례를 치르고 동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친척들이 돌본다. 만일 친척도 이들을 챙길 수 없을 경우에는 그들이 세워서 운영하는 고아원이나 마드라사에서 공부하게 하고 돌본다. 즉 이슬람교 자체가 사회적 안정망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경제활동에서도 그들은 서로 도와가면서 사업을 확장시켜 준다. 그리고 이슬람의 지도자인 이맘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고 종교적인 지도자로만 남아 있는다. 지역 마스지드의 건립과 운영은 지역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도하고 이맘은 그들이 선택하고 급여를 줄 뿐이다. 지역의 마스지드는 단순한 예배장소일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날 기독교의 공동체보다 더 강하고 일체감이 있다. 무슬림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상대적으로 약한 회심자의 공동체 모습을 보고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속해 있었던 이전의 이슬람 공동체를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강력한 이슬람 공동체는 속해 있는 무슬림들이 다른 종교로 이동하지 못하게 막는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슬람의 공동체를 참고해서 회심자들을 통해서 더 강력한 성경적인 공동체(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같은)를 형성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무슬림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공동체를 만들어내야 그 땅에서의 복음화를 완성할 수 있다. 한 회심자 지도자가 며칠 전 회심자를 위한 자생적 셀리더 모임에서 “우리는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만들지 않고 자꾸 전도만 하려고 한다.”라고 언급한 평가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슬람의 단점은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지켜야 할 5개의 종교적 기둥은 그것을 전부 다 지키려는 신실한 무슬림에게 영적인 분주함과 피곤함을 쉽게 유발한다. 게다가 이 지구상에 성지를 만들어 놓고 순례를 요청하고 있어서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한꺼번에 메카에 다 모여서 순례 행사에 참여할 때 인파에 밀려 압사당하는 수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이 땅에 존재하는 메카성지가 파괴된다면 심각한 영적인 혼돈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꾸란은 무함마드(살앗)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메디나와 메카에서 두 번 계시를 받은 것의 내용을 길이대로 뒤섞어서 기록한 경전이다. 그래서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서로 충돌되는 계시 내용을 담고 있다. 특별히 이전 경전을 읽고 따르는 기독교인에 대해서 의심이 있는 무슬림들에게는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요청하고 있고(수라 10:94), 동시에 그들이 경전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감동적으로 기록하면서도, 꾸란의 다른 곳에서는 경전과 알라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는 자들로 묘사하는 이율배반적인 기록이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꾸란을 연구하는 이유는 무슬림들을 더 많이 복음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지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계시인 메디나 계시 구절들을 잘 연구하여 하디스와 함께 그들에게 더 접근하기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단점은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이다.

먼저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결국 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지켜야 할 율법은 정말로 지키기 쉽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선행과 그렇지 못한 죄악들의 경중을 따져야 하는 상황이기에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기 힘들다. 경건하지 못한 무슬림들이라도 죽은 이후 일단 지옥에 가서 정결 과정을 거친 이후 다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꾸란은 한 번 지옥에 가면 영원히 거기서 나올 수 없음을 알리는 구절(수라 2:81)도 있다. 이슬람 지도자들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입장에서 태어나며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다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꾸란에는 인간의 죄성을 지적하는 수많은 구절들이 나온다(수라 14:34, 22:16, 12:53, 15:68 등). 게다가 꾸란은 모든 선지자들의 죄를 인정하고 있고 최후의 선지자인 무함마드(살앗)조차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구절들이(수라 40:56)이 있다. 심지어 하디스 부카라 8권 257에 “오 알라시여 눈과 우박의 물로 나의 죄를 씻기시옵시고 깨끗하게 빨래한 흰옷처럼 내 죄로부터 내 마음을 정결케 하옵소서”라는 구절은 그가 죄인임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그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꾸란은 그렇지 않다는 수많은 구절을(수라 46:9, 2:48, 9:80) 제시한다.
둘째, 이전의 경전(토라, 자불, 인질)7)은 변질되었다고 가르치지만 꾸란은 오히려 이전 경전의 변질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신앙이 약한 자들은 이전의 경전을 읽는 자들에게 가서 물어봐야 하며(수라 10:94), 이전의 경전이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지침이라 주장하기도 한다(수라 3:3∼4). 게다가 수라 5:68에는 이전의 경전을 다 읽고 지킬 때까지는 어떤 인도함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셋째,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슬람 지도자들은 예수님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만을 위한 선지자일 뿐이며 예수님의 죽음을 부인하고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가르치지만 꾸란은 예수님을 모든 인류를 위해서 오신 분이며(수라 21:91), 하나님의 영(수라 4:171)과 말씀(3:45, 417)으로 소개하면서 그분이 죽어서 부활했고(수라 19:31, 33) 다시 재림하실 분(수라 2:210)이라 알리고 있다. 게다가 그분은 천국으로 인간을 안내하실 분으로까지 소개한다(수라 3:45, 43:63∼64). 이런 수많은 꾸란의 구절들은 오늘날 무슬림들이 성경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에 첫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넷째, 여성인권의 취약성이다. 여성은 꾸란과 하디스에서 남자의 50%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한다. 또 여성은 마스지드에 갈수 없게 되어 있어서 천국에 가는 길인 나마즈를 할 수 없게 하며(일부 이슬람 국가는 여성은 마스지드 뒷부분에서 나마즈를 하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천국에 여성은 별로 없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무슬림 여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분노하게 만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슬람의 단점은 오늘날 지구촌을 전쟁과 갈등으로 몰아넣게 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지하드(성전)운동이다. 지금도 시리아와 이라크에 근본주의자들이 자기들만의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고자 ISIS8)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을 살해하자 결국 서방국가와 일부 중동 국가들이 연합하여 그들을 제거하려는 강력한 저항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강력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지하드에 대해서 일반 무슬림들조차도 그들은 진정한 무슬림이 아니라며 근본주의 운동에 반대하는 실정이다.
(4) 이슬람권에서 복음전파 대상자 파악하기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전도하기 위해서 왜 우물가에 나온 여인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그가 왜 제자들을 삼기 위해서 갈릴리지역을 선택했을까를 깊이 생각해본다. 예수님은 분명히 먼저 복음에 대해서 열려 있는 대상에 대한 사전지식을 갖고 있으셨다고 봐야 한다. 이 여인은 남편을 여럿 둔 행실이 바르지 못한 데다가,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땅에서조차도 죄인으로 여겨지는 존재이기에 예수님이 미리 정해놓고 접근하셨음이 분명하다. 갈릴리지역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갈릴리 땅에 큰 빛이 임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이 있었지만(마 4:15∼16), 당시 갈릴리지역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미리 갖추고 있었다. 이슬람권에서 복음에 대해서 아무리 강한 저항을 집단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슬람에 대한 불만세력이 존재한다. 이미 내부에서 이슬람으로서는 자기와 자기 가족, 사회, 민족을 구원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개인과 그룹과 지역이 존재한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성령님의 인도로 그러한 대상자들을 먼저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4:36).
이슬람권사역에서 모두 다 열매를 거두는 일을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거두는 자의 역할이 아니라 뿌리는 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슬람권에 어떻게 씨를 뿌려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적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세례 요한이 그런 씨를 뿌리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세례 요한의 역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규정한다.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마 3:3).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의 회개(세례)운동을 통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의 마음밭이 그의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메시지에 반응하도록 미리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이슬람권 내에서 누군가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가 필요하다. B국에서도 복음을 믿는 다수의 무슬림들이 어느 특정지역 출신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지역에 누가 어떤 식으로 씨를 뿌리고 거두었는지를 파악해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 지역에 오래전부터 어느 선교사 개인이나 전도 단체들이 눈물로 씨를 뿌렸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5)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선교방식의 필요
오늘날 선교는 하나님 나라 중심이라기보다는 자기가 파송한 교회와 교단, 단체 중심적인 사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선교가 이슬람권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런 고민을 하려면 먼저, 그동안 우리의 선교사역이 하나님의 나라 중심적이 아닌 교단 중심적이고, 교회 중심적인 선교를 택했고 그로 인해 부작용이 생기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선교사가 전하는 교단과 교회는 성경적인 모습이 아닌 부분, 즉 자국 문화가 많이 포함된 모습이라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파송된 교단과 교회의 모습을 띄고 무슬림들에게 접근하는 한 이슬람 민족의 마음속에서 복음의 메시지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려는 진정한 동기를 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세례 요한, 예수님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회개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이다(마 3:2, 4:17). 즉 죄에 빠진 자신을 인정하고 돌이키라는 요청이고, 이를 이루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선교를 하기 위해서 먼저 무장해야 할 일은, 기존의 한국교회나 서양식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는 방식의 우리의 영성 관리를 바꿔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관계를 말씀과 기도로 유지하면서 항상 말씀대로 자신을 변혁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원형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내가 이미 적응된 한국교회의 제도화가 된 교회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로 항상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주님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약속하셨다. 즉 나 자신부터 사단과 세상과 죄의 유혹에서 주님이 주신 이 약속을 붙잡고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죄와 싸워서 이기는 나의 모습을 보고 현지 성도들도 동일한 싸움을 하게 된다. 동시에 주변의 무슬림들에게도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들을 따르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날 것이다.
셋째로 선교사부터 핍박을 경험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지를 알려주고 보여주었고, 디모데와 교회들에게 동일한 핍박을 받아도 견뎌나갈 것을 요청하였다(딤후 3:11∼12). 사실 한국은 기독교인이 핍박이나 푸대접을 받으면 데모하고 언론 플레이 등의 집단행동을 한다. 한국은 성경적으로 핍박을 처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정치적인 이익집단이 되어서 한국 사회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라 이런 집단행동을 할 수 있지만 성경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이슬람권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바로 추방당하거나 발본색원(拔本塞源) 당할 것이다. 핍박을 당해도 참으면서 오히려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하는 자세가 성경적이다.
넷째로 주님은 나에게 주님이 이슬람 땅에 세우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다. 특별히 핍박이 심한 지역에서 어떤 형태의 교회를 세워야 사라지지 않는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특별히 일거수일투족(一擧手 一投足)이 다 읽히는 이슬람 시골 사회에서 현지 성도들로 하여금 어떤 교회를 시작하도록 인도할 것인가? 일단 눈에 쉽게 보이는 교회건물과 조직을 세울 수는 없다. 핍박이 강할수록 비밀리에 모일 수밖에 없다. B국 지방에서 회심자들끼리 비밀리에 모이다가 수가 많아지면 계 조직이나 협동조합 같은 모임을 만들어서 모인다. 그리고 수가 많아지면 다시 나누어야 한다. 물론 지도자들은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원형적인 성도들의 모임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런 지도자들을 세우는 훈련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6) 토착화(상황화)의 필요성
자기 신학화를 찾으려는 한 선교사가 “한국선교사들은 교회개척의 정신이 강하다.”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한국선교사들이 어떤 형태의 교회를 세우고 있는지에 대해 점검한다면 교회개척을 한국선교사의 장점으로 내세우기는 어렵다. 이미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와 국가에 어떤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줄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어 있는데도 동일한 한국교회식의 교회개척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사전 검증 없이 한국식 교회개척을 많이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지에 어떤 형태의 교회를 세워야 하는지에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또한 질문 이후에나 성경적인 교회론을 어떻게 그 상황에 맞게 세워야 할지 방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점검해야 할 점은 바로 토착화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성경적인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성육신사역(요 1:14, 빌 2:6∼9)과 바울의 토착화 선교전략(고전 9:20) 그리고 계시록의 족속에 대한 언급(계 7:9)들이 토착화 사역의 성경적 근거이다. 예수님 자신부터가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태도로 이 땅에 임하셨고 오늘날 선교사들에게도 그런 자세를 요구하신다. 특별히 예수님이 유대 사회를 몸소 이해하시는 데에 3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바울은 복음전파 대상자들처럼 되어서 나아가야 함을 가르쳤다. 반대로 선교사가 자기처럼 될 것을 현지인에게 요청해서는 진정한 복음전파가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요한이 예수님을 ‘로고스’라는 단어로 설명했듯이 현지어와 문화로 진정한 예수님과 복음을 설명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로 재표현하는 토착화 작업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현지 성도들이 중심이 되는 그들만의 문화와 양식을 갖춘 공동체가 탄생하게도록도와야 한다. 예수님 재림 이후에 민족과 언어와 종족들이 함께 나아오듯이 그렇게 말이다. 예수님 재림 시에 교단별로 대표들이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이슬람사역에 토착화 작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먼저 선교사 자신부터 변화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1) 복음전파의 걸림돌 제거,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선교사와 개척된 교회의 관계 형성(빌 1:7∼8)은 한국에서의 교회개척, 목회와는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목회자가 전도해서 교회개척하고 은퇴할 때까지 목회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선교지에서는 선교사가 전도해서 셀교회를 개척했다고 은퇴할 때까지 거기서 목회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경우 현지인 리더십이 쉽게 들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본질적 영적인 문제는 죄인 된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줄 순수 복음이 제대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받아들인 복음 주변에 쌓여 있는 걸림돌, 즉 우리 문화가 무엇인지를 구별해낼 줄 알아야 한다. 해외 선교지에서는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선교사의 사소한 문화나 행동이 현지에서는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배운 복음전도 방식이나 개척한 교회와 예배방식 등이 선교 현지에 맞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이슬람권에서 적합하지 않은 걸림돌은 전부 포기해야 하는 작업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이슬람권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려는 일부 개종자들(무슬림에서 기독교로 공식적으로 개종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을 기독교로 표현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무슬림에서 개종하여 어렵게 자신의 가정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한 가정을 알고 있다. 그 가정의 막내가 우리 학교에 교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가 자신이 기독교인이며 그래서 성탄절이나 부활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100% 무슬림 학생들을 상대로 기존 교과목과 종교를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선생님의 종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쉽게 답변하지 못했다. 만일 그가 기독교인이라고 답변했다면 그의 가르침은 이제부터 학생들이 무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 답변을 얼버무렸다. 일부 개종자 지도자들 중에 기독교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사역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도 외국의 후원에 의존하여 사역하고 있다. 그래서 무슬림으로부터 후원을 받기 위한 배교적인 종교 형태로 치부되고 있기에 자생적인 성도들의 집단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을 통해서 복음을 믿는 소수 무슬림들이 존재하나 이들조차도 자기의 지도자들을 본받아서 외국의 후원을 받고자 하는 성향이 많고 후원이 중단될 경우 지속적으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2)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동시에 그들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메시지를 담은 복음을 전달할 필요성이 있다. 내가 복음을 받아야 했던 이유와 이슬람권의 영혼들이 복음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같을 수 없다. 그들이 목말라 하는 영역과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목마름을 채워 줄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이해하기 쉽게 그들의 용어로 전달할 때 그들 개인과 가족, 민족에게 필요한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할 수 있다.
3) 복음을 수용한 이들이 자기 출신 지역에서 자생적(자체 리더십/ 자체 재정 충당/ 자체 전도와 개척/ 자체 고난 극복 등)으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지도자훈련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한국식, 서양식의 신학교가 이슬람권에서 필요한 지도자들을 양성해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TEE(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9)같이 선교현장에서 이미 지도자로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영적인 무장을 하게 해주는 찾아가는 리더십 훈련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최근에 이곳에 한 이맘이 복음을 받아들여 비밀리에 믿다가 발각되어서 결국 자기가 사역했던 이슬람사원에서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그를 받아들인 한 서양선교단체는 그를 제대로 도울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시 혼자서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직업을 얻기 위해서 일반 대학에 입학했다. 이 사례는 이슬람 지도자가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토착화 작업을 미리 해 놓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준비가 없어서 결국 그런 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안타까운 경우이다. 반면 상황화사역을 하는 한 지방의 현지지도자의 친구 중에 이맘이 있었는데 대화를 통해서 그도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이 이미 이슬람 사회에 높은 지위라 복음 신앙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할 경우 생명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비밀 성도로 남아서 꾸란을 통해서 복음을 간접적으로 전한 이후 반응이 좋은 제자들을 그의 친구에게 보내면 그가 복음을 제대로 전해서 세례를 주는 형태로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4) 회심자들과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 파트너십 만들기이다. 회심자들이 복음을 믿은 이후 그들은 기존의 정통교회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속한 이슬람 사회로부터 동시에 핍박과 냉대를 당한다는 고백을 그들 스스로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먼저 B국의 다른 회심자들과의 파트너십을 구성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누가 리더십을 쥐었느냐의 이슈와 상황화의 차이로 인해서 그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분리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외국인선교사들도 자기 소속의 회심자에만 관심을 두었지 다른 소속 회심자들과의 연대에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방해를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회심자 현지지도자들도 자기가 재정적‧정신적‧신학적 도움을 받은 외국의 교단이나 기관과 단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회심자들이 이런 파트너십을 만들지 못하면 그들은 여러 가지 공격과 유혹에 대해서 매우 취약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또한 파트너십을 만들게 되면 수많은 문제(장례, 훈련, 법적 근거와 대책, 정체성 등)를 미해결된 상태로 어려움을 품고 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사역을 하는 외국선교사나 외국 교단과 단체들은 현지회심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파트너십을 하나님 나라 중심적으로 구성해나갈 수 있도록 내외적인 장애물을 제거해주고 그들 스스로 성경에 기반을 둔 건전한 자기 신학을 만들어나갈 수 있게 아래와 같은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 출신들에게 더욱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① 기존의 선교파송교단이나 단체들은 선교사로 하여금 선교지에서 토착할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의 그룹을 형성하도록 격려해야지 한국식의 교회나 교단을 세우도록 요청해서는 안 된다.
② 선교사의 역할에 대한 성경적인 규명이 필요하다. 한국은 빨리빨리 사역을 하지만 그들 내부에 있는 세계관과 신학과 철학은 아주 느리게 변화한다. 이런 한국선교사의 보수적인 자세는 회심자들의 파트너십을 구성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를 비우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③ 가능성 있는 현지인들을 훈련해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리더십을 넘겨주어 자생적으로 자신들의 그리스도의 몸을 유지, 양육, 발전, 배가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들게 해야 한다.
④ 처음부터 외부의 후원에 의존하기보다는(심지어 점차적인 자립조차도 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비즈니스와 자체의 십일조에 의지에서 그들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도록 인도해야 한다.
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현지회심자들이 자국 내와 해외의 동일한 상황에 처해있는 회심자 성도들과 긴밀한 교제를 갖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파트너십이 형성되면 갈등 없이 그들만의 성경적인 자기 신학화 작업을 통해서 그들에게 직면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풀어나가게 도와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 이 글은 디지털 저널 〈CAS〉(2020년 25호)에 실린 내용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수정, 보완하여 게재하였습니다.
미주
1) 나마즈(Namaz): 무슬림들이 하루에 다섯 번 의무적으로 이슬람사원에서 드려야 하는 기도로, 먼저 몸을 씻고나서 메카를 향해서 기도의 방식대로 알라에게 처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2) Sufism: 이슬람의 신비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운동으로 이런 지도자들을 수피라고 하는데 이들의 가르침과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서 별도로 모임을 구성한다. 이들은 무함마드가 가브리엘 천사와 만나서 계시 받은 상태를 재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신적인 체험을 강조한다. 이슬람이 인도권에 들어와서 이는 기존 힌두교의 토속신앙을 대거 흡수해서 더 발전했다. 정통 이슬람 그룹에 의해서 인정받지 못하지만 수많은 무슬림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이런 수피들에 의해서 수많은 비무슬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다.
3) 꾸르바니는 희생제라는 의미인데 아랍어로 이드 울 아다라고 하며 아브라함이 알라의 명령으로 자기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각 가족별로 소나 염소 양들을 구입해서 집 앞에서 예식을 치룬 뒤 제물로 바치면 알라를 기쁘게 한다고 무슬림들은 믿고 있다.
4) 그들은 이 아들이 이스마엘이라 주장하나 꾸란은 오히려 이삭일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니 이런 이슈로 토론을 하지 않는 것이 좋고 그냥 아들이라고 함이 전도 시에 효율적이다(수라 37:100∼113).
5) 이맘(Imam): 이슬람사원인 마스지드에서 예배와 공동체를 인도하는 이슬람 지도자를 칭한다.
6) 움마(Unmah): 아랍어로 백성(People)을 의미하는 데 동일한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소유한 무슬림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7) Torat, Jabul, Injheel은 모세오경, 시가서, 복음서를 칭하는 아랍어 호칭이다.
8) ISIS(Islamic State): 최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시리아 내전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워서 시리아와 이라크에 이은 방대한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를 세웠는데 이를 ISIS라 부른다.
9) TEE: a highly mobile and effective system of training within the local context, based on Home and Group Study led by trained tutors. 이미 형성된 가정교회와 셀그룹에 근거해서 그들의 지역 상황 내에 훈련된 튜터(tutor)들에 의해서 신학적 훈련을 시키는 효율적이고 유동적인 지도자훈련 시스템이다.
사진 | ISLAM MISSION→기독일보→ISLAM MISSION (위에서부터)
무사리 | M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