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 선교사 데이비드 아빌 데이비드 아빌(David Abeel, 雅裨理, 1804-1846)은 미국인 선원들에 대한 구제와 전도를 위해 설립된 미국선원우교회(美國船員友敎會, The American Seaman’s Friend Society)의 파송을 받아 1830년 2월 19일 중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미국공리회의 파송을 받아 함께 중국에 도착한 엘리야 브릿지만(Elijah C. Bridgeman, 裨治文, 1801-1861)과 함께 활동하면서 중국에서는 공리회에 소속되어 중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빌은 광주에 머무는 동안 미국인 선원들을 위해 봉사하는 한편, 로버트 모리슨의 도움을 받아 중국어를 익혔다. 그러나 아쉽게도 건강이 좋지 못하여 그해 12월 28일 자바로 이동하여 런던선교회 파송 선교사 월터 메드허스트로부터 윌리엄 영(William Young) 등과 함께 중국어를 익혔다.
1831년 6월 4일 자바를 떠나 6월 14일 싱가포르로 사역지를 옮긴 그는 제이콥 톰린(Jacob Tomlin)과 함께 7월 2일 태국으로 이동하여 사역을 전개하였다. 현지에서 병을 얻게 된 그는 1932년 1월 13일 싱가포르로 복귀하였다가 4월 28일 이후 톰슨(M. Thomson) 함께 리오(Rhio)섬 등지에서 선교 사역을 이어 나갔다. 1833년 10월 21일 영국 런던을 방문한 그는 이후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동양 선교에 대한 유대를 강화하였다. 1834년 9월 6일 뉴욕에 도착한 이후 그는 크게 환영받으면서 잇달아 초청 강연을 통해 동양 선교에 대한 관심을 크게 진작하였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irch)의 파송을 받아 1839년 2월 20일 마카오로 복귀하여 브릿지만, 파커, 윌리엄스 등 선교사들의 사역을 도왔다. 아편전쟁의 여파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피해 1841년 4월부터 약 9개월 동안 그는 싱가포르와 보르네오 선교 사역지에 머물다가 마카오로 돌아왔다.
아빌은 1842년 2월 2일 윌리엄 분 목사와 함께 마카오를 떠나 홍콩을 경유하여 복건성 하문(厦門) 일대로 진입하여 선교 사역을 전개하고 9월경 마카오로 돌아왔다. 그가 사역을 전개한 복건 하문의 현지인 교회는 복건 남부 지역의 선교 거점이 되었다.
병으로 다시 고생하게 된 그는 1845년 4월 3일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투병하였으나 1846년 9월 세상을 떠났다. 공리회의 복건 사역은 스티븐 존슨(Stephen Johnson, 約翰生), 제임스 헵번(James C. Hepburn, 1815-1911) 등이 잇달아 후임자로 파송되어 복건 선교를 이어 나갔다. 생전에 그는 미국 뉴저지에 있는 러트거스대학(Rutger’s College)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선원우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로는 에드윈 스티븐스(Edwin Stevense, 施迪芬)도 있는데, 1832년 10월 26일 광주에 와서 공리회 소속으로 1837년 1월 5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국과 동남아 연안을 순회하며 사역하였다.
출판 선교사 사무엘 윌리엄스 사무엘 윌리엄스(Samuel W. Williams, 衛三畏, 1812-1884)는 브릿지만 등 미리 중국에 온 미국공리회 선교사들의 요청에 따라 인쇄사역자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그는 2년여 인쇄 실무를 익힌 다음 1833년 6월 이라 트레이시(Ira Tracy, 崔理時)와 함께 모리슨호를 타고 중국으로 출발하여 10월 26일 중국 광주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를 근거지로 하여 출판 사역에 돌입한 그는 《Canton Press(廣州期刊)》의 편집 간행을 담당하였고, 브릿지만이 간행한 《Chinese Repository(中國叢報)》에 80여 편의 글을 기고하면서 도왔으며, 브릿지만의 《A Chinese Chrestomathy in the Canton Dialect(中文廣東方言撮要)》의 출간도 도왔다.
그는 스스로 1842년에 중국어 입문서 《Easy Lessons in Chinese(拾級大成)》, 1844년에 중국어사전 《An English and Chinese Vocabulary, in the Court Dialect(英華韻府歷階)》, 중국 지리지 《Chinese Topography(中國地志)》을 간행하였다.
그는 1842년부터 모리슨교육회의 총무를 맡아 헌신하였고, 1844년 미국으로 돌아와 유니온대학(Union College)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목사안수 권유는 끝내 사양하였다. 1848년에 뉴욕에서 간행한 《The Middle Kingdom(中國總論)》은 지리, 풍속, 정치, 교육, 종교, 예술 등 중국에 관한 백과사전적 저술로서 서방 학계에 중국입문서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The Middle Kingdom(中國總論)》 [사진출처] 孔夫子舊書網 캡처 1848년 6월 1일 미국을 떠나 9월에 다시 광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출판 사역에 전념하였는데, 1874년에 출간한 중국어 사전 《Syllabic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華文註音字典)》도 그의 대표적 저술로 꼽힌다.
그는 1853년 미국 페리(Perry) 제독이 일본으로 파견될 때 통역원으로 동행하였고, 1858년 미국이 중국과 천진조약을 체결할 때는 미국 대표 리드(W. Reed)의 통역관을 맡았으며, 1863년 이후 대리공사로서 본격적인 외교관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876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예일(Yale)대학에서 교수직을 지내며 미국성서공회(The American Bible Society)의 대표, 미국동방학회(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1884년 2월 16일 미국 뉴헤이븐(New Haven)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광주로 왔던 이라 트레이시는 공리회의 싱가포르 출판 사역지로 옮겨 건강 악화로 사임하기까지 6년간 사역하였다.
의료 선교사 피터 파커 피터 파커(Dr. Peter Parker, 伯駕, 1804-1888)는 예일대학 재학 중 중국 선교에의 헌신을 결심하였고, 신학과 의학을 전공하여 졸업한 뒤 1834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 제일장로교회(The First Presbyterian Church)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6월 4일 모리슨호에 올라 10월 26일 중국 광주에 도착하였다. 12월 14일 그는 트레이시와 함께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진료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이듬해인 1835년 광주로 복귀한 그는 11월에 광주의 양행 13행(行) 중 하나인 신두란가(新豆欄街)의 풍태행(豊泰行) 건물 3층에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박제의원(博濟醫院, Opthalmic Hospital)을 개설하였다. 그는 또 1837년에는 3명의 중국인 학생을 가르치면서 중국 의학 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1838년 7월 5일에는 마카오에서 중국의약전교회(中華醫藥傳敎會)가 운영하는 병원을 개설하였다.
아편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복귀한 뒤에는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미국 주요 도시와 런던, 에든버러 등 영국 주요 도시를 방문하여 중국 의료 선교 지원을 역설하였다.
1842년 부인과 함께 중국으로 향한 그는 10월 4일 광주에 도착하여 11월 21일부터 박제의원을 다시 열고 1855년까지 진료를 하며 선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1842년 중국과 교섭을 위해 마카오로 온 미국 공사 쿠싱(Caleb Cushing)이 그를 비서로 위촉하면서 외교 부문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1844년 망하조약(望厦條約) 체결 과정에도 참여하였으며, 1855년부터 1857년까지 미국대리공사를 지낸 후 귀국하였다. 이후 워싱턴에 거주하면서 미국복음주의협회(American Evangelical Alliance) 등에서 일을 돕다가 1888년 1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공리회 선교사로서 의료 사역에 참여한 인물로 다이어 볼(Dyer Ball)도 있는데, 1838년 싱가포르에서 사역을 시작했다가 1841년 마카오, 1843년 홍콩, 1857년 광주로 사역지를 옮겨 가면서 진료소와 학교를 세우며 사역하였다.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박제의원/중국망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