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대사명(Great Commission)’으로 불리는 이 본문은 목회자나 전도자나 선교사들 모두가 즐겨 인용하여 설교하는 본문이기도 하다. 또 어떤 이들은 ‘전도명령’, ‘선교명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본문을 전도명령도, 선교명령도 아닌 ‘양육명령’이라고 줄곧 말해 왔다.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 문제가 이 본문에 대한 오해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전도하는 내용의 핵심은 ‘예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세요.’라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이 내용을 같은 언어 문화권에 사용하면 전도라고 말하고, 타문화권에서 사용하면 선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모든 민족’ ‘제자’ ‘세례’라는 전반부의 단어와 ‘분부한 것’ ‘가르치다’ ‘지키게 하다’라는 후반부 단어로 나눌 수 있다. 이 단어들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민족’은 대상이다. 이 대상은 같은 문화권 사람도 타문화권 사람도 다 포함된다는 것에는 아마 모든 분들이 동의할 것이다.
2. ‘제자를 삼다’는 과정일 것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특정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제자로 삼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또 상대방이 나에게 배우기 위해 마음을 여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3. ‘세례를 준다’는 것은 방법일 것이다. 제자가 되어 나의 신앙고백을 배우기 시작하면 그는 제자의 자리에 이르렀는데 그에게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그가 배움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리에 도달했다는 것을 확인한 후의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과거의 삶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게 됨을 말한다.
4. ‘분부한 것’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던 일반적인 천국 복음을 넘어 제자들에게 별도로 가르치고 명령하였던 좀 더 깊은 것을 말한다.
5. ‘가르치다’는 것은 앞에서 제자를 삶기 위해 이루어졌던 가르침을 일차적 가르침이라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르침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트레이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훈련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6. ‘지키게 하라’는 것은 지금까지 가르쳤던 것들을 그의 삶 속에서 실천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가르쳤던 그가 나와 동일한 삶을 살게 하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나는 이 본문을 양육명령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비거주 순회선교사로 선교현장을 다니면서 여러 사역을 하거나 협력 사역을 하면서 이런저런 모습을 보았다. 선교지에서 지속적으로 거주하지 않았으니 한 단면을 보고 어떤 평가를 하려거나 비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느낀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한국선교사들이 개척한 교회를 방문해보면, 물론 많은 나라를 가 본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나라에 있는 교회이든 한국교회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작은 예이지만 예배를 시작하기 전, 화려한 찬양팀의 빠른 비트의 음향과 드럼과 신디에서 흘러나오는 자극적인 리듬과 멜로디로 혼을 빼놓는다. 찬양이 끝나고 막상 본 예배로 들어가는데 찬양팀들이 슬그머니 어디로 사라지더니 교회 뒤편에 자리를 잡는다. 잠시 방문한 내 눈에는 그들이 예배 구경꾼인지 예배자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반면 교회 건물을 짓지 않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몇 시간 빌린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선교사들은 조용한 찬양과 잔잔한 메시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느냐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든 하나님과 온전한 만남과 교제가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저렇게 예배를 인도하거나 세미나를 인도하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집회를 하고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바로 그 문제 때문에 목회자인지, 아니면 선교사인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목회자와 선교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게 정의를 내릴 수 있고, 또 교재마다 정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싶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두 나라의 선교 역사를 비교하면 이 문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 두 나라의 모든 사역이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일부분에서 일어난 현상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A국은 박해가 심하여 한국선교사가 설교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현지 통역자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0여 년이 지나자 그들은 좋은 목회자들로 (지도력을 갖고) 사역을 하게 되었다. B국은 한국선교사가 편안하게 설교하고 목회를 할 수 있어서 통역자들이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니며 몸값을 불렸다.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자 한국선교사들이 개척한 교회가 많이 늘어났고 통역자들도 많이 늘어났고 몸값도 늘어났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통역자나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A국 선교사들은 추방되기 시작하였고 10여 년이 지나자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비자발적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지교회 목회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물론 교회 재정은 독립하지 못하여 선교사들이 추방 이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교회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렇지만 현지 목회자들은 재정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교회를 잘 이끌어가고 있고 독립된 노회를 통해 노회 차원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하였다. B국은 지금도 한국선교사들이 모든 집회의 중심에 서서 이끌어가고 있고 현지인들은 스태프로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하고 있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한국사역자들이 자신의 선교사역을 보고하고 후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충분한 능력이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한국인사역자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현지인들에게 사역을 양보도 하지 않고 독립해서 일할 수 있도록 놓아주지도 않고 돈으로 그들을 붙들고 있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른 한 나라에서 어느 해 한 시골교회에서 집회 요청이 와서 간 적이 있다. 첫날 저녁집회를 마치고 나왔는데 집사 중 한 분이 “목사님, 선물은요?”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선물이요?” 하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원래 목사님들은 오실 때 선물과 차비를 가지고 와서 우리한테 나누어 주는데요.”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군요. 그러면 사람을 잘못 불렀네요. 예수가 필요하면 저를 부르시고 선물이 필요하면 다른 목사를 부르세요.”라고 말하고 교회를 떠났다.
일 년이 조금 더 지나서 그 교회에서 다시 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는 교회 책임 집사님에게 조건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무슨 조건이냐고 묻길래 “내가 가면 다음 교회 가는 차비도 그 교회에서 부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교회에서 그건 감당할 수 있다고 해서 다시 가게 되었고, 몇 년 후 그 교회 성도들과 전도여행을 정기적으로 하고 그 이웃에 있는 또 다른 교회에서 선교비를 감당해 주면서 사역을 확대해 나가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성도들이 십 분의 일 이하로 줄어들고 젊은이들이 다 떠나서 어르신들만 남은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떤 나라에서는 한 나라 안에서 지역에 따라 나누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한 지역 안에서 선교사의 성향에 따라 나누어지기도 할 것이다. 비자발적 철수를 하였던 선교사들 중 어떤 분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새롭게 사역을 시작하였는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다시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아직도 이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다. 공산권 선교 30년이 지나 40년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나가야 할 앞으로의 30년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30년의 사역을 냉혹하게 평가하고 비교를 한다면 앞으로 30년의 사역 계획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충분히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을 생각하지 않고 사역 그 자체만 바라보면 좀 더 빨리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사역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바로 그때가 우리 사역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사라지고 없어졌을 때 우리의 사역과 우리의 사역에서 파생된 사역들이 내가 사역하였던 곳에서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선교지에서 우리의 제자들을 통하여 또 그 제자의 제자들을 통해 진행된다면 우리는 선교사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멈추거나 나와 관계없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면 나는 비즈니스맨으로 사역을 감당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남은 사역은 비즈니스맨이 아닌 선교사의 사역이 되길 소망한다.
시과 | 순회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