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작년 1월 5일부터 18일까지 필자가 중국 ‘궈바오(国保)’ 요원에 의하여 체포되어 추방된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불청객 2018년 1월 5일 오후 3시경 우리 집에서는 마침내 18년 동안 늘 생각해오던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건마는 중국 본토에서 선교사로서 활동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일이 마침내 일어난 것이다. 중국안전국국가보위(中国安全局国家保卫, 이하 궈바오) 소속의 요원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50대로 보이는 한 사람과 두 명의 젊은 요원들이 우리 집에 온 것이다. 이들은 집에 오기 전 먼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조 선생이시지요? 우리가 곧 조 선생 집을 방문할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쿵’하고 시간이 정지되는 느낌을 받았다. 18년 동안 정말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그렇게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은 오고야 말았다. 나는 얼떨결에 성경과 찬송가책을 부랴부랴 감추었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십자가와 강대상에 붙어 있던 교회 이름도 떼어 냈다. 나는 이것들을 떼다가 손가락을 베어 피가 흘렀지만 치료고 뭐고 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 집을 가정교회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궈바오 요원들은 내가 물품들을 다 치우기도 전에 문 앞에 와 있었다. 처음에 그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일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나는 그들이 세 번째 문을 열라고 했을 때에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애쓰며 그들에게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그들은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왔다.
그중에 나이가 좀 많아 보이는 요원이 나에게 물었다. “중국은 왜 왔는가? 직업은 무엇인가? 회사를 다녔다면 명함을 보여 달라! 집안에 왜 이렇게 책이 많은가?” 등 많은 질문을 쏟아 냈다. 처음에 나는 이렇게 저렇게 둘러댔지만 더 이상 둘러댈 수 없었다. 내가 망연자실(茫然自失)한 모습으로 있자 그는 나에게 “조 선생님, 목사지요? 우리가 다 알고 왔습니다. 우리가 보통 경찰로 보입니까? 조 선생이 만일 목사인 것을 시인하면 그냥 조사만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집안을 다 뒤질 것입니다. 그리고 조 선생 문건이 이만큼 쌓여 있는데 그것을 다 대조하여 조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더 발뺌을 할 수가 없었다. 집안만 수색해도 내가 목사이며 선교사인 증거들이 나올 테니까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낙담한 표정으로 내가 목사인 것을 시인했다. 나이가 든 요원은 내 아내도 나오라고 했지만 심한 감기로 기침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또 추위 때문에 방안에 텐트가 쳐져 있는 것을 보고는 아내에게 무슨 병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내가 갑상선암과 유방암에 걸려서 수술을 했고 지금은 심한 감기에 걸려 누워있다고 했다. 그 요원은 아내를 조사대상에서 빼주었다. 그래서 나만 조사를 받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언제 중국에 왔는지, 한국의 어떤 교회가 후원하는지, 어떤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그런데 그 요원의 묻는 방법이 매우 교묘했고, 그의 그런 질문들이 두 가지 양상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나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듯 아주 우연히 나를 잡게 된 것처럼 물었다. 또 다른 하나는 나에 대해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조금도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이는 곧 나에 대한 일종의 시험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가 사실을 말하는지 아니면 거짓을 말하는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몇 가지의 질문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말했다. 이것은 포로로 잡힌 군인이 이름과 군번(军番)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의 머릿속에서는 중국 교인들을 어떻게 하면 보호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를 않았다. 교인들 가운데는 이름이 궈바오 요원에게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조사를 받으면서도 이것만은 가장 염두에 두었다.
궈바오 요원은 나의 사역이 대학생 사역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저 중국인교인 몇 명과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서류에 ‘중국인들에게 설교’라고 썼다. 그 당시에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가 질문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중에 정신이 좀 들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질문은 정확했다. 중국선교 초기에 나는 많은 대학생들과 접촉하고 그들을 가르쳤었다. 의과대학 학생들, 약학대학 학생들, 동베이(东北)대학교 학생들, 랴오닝(辽宁)대학교 학생들, 선양(沈阳)사범대학교 학생들 등등. 하지만 이것은 중국 사역 초기에 시작하여 약 10년 정도 계속된 일이었다. 궈바오 요원은 나를 보자 “우리가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지요?” 하는 것이었다. 이 말도 그 당시에는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 요원은 이미 나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나를 알고 있었지만 나를 추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궈바오 요원은 나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말했다. 아마도 나의 얼굴이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그는 나에게 커피를 한 잔 달라고 했다. 나는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면서 그에게 커피를 진하게 마실 것인지 아니면 연하게 마실 것인지를 물었다. 그는 진하게 마시겠다고 했다. 나는 두 젊은 요원들에게도 무엇을 마실 것인지 물었다. 그들은 ‘카이수이(开水)’라고 해서 그냥 끓인 물을 주었다. 나도 내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셨다. 커피를 마시면서 말을 하니까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조사받는 취조실 같던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라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담소(谈笑)를 나누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궈바오 요원은 내가 하던 일들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하면서 단동(丹東)지역을 말했다. 나는 단동의 일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다. 중국에 머물기 위한 비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통해 서류상의 회사(paper company)에 이름이 들어가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 회사의 한 사람이 선교사로서 북한에 들어간 것이지 나와 연계된 일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요원은 “조 선생이 조사를 받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설교를 한 것 때문이니 그 외에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순간 ’이건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를 하러 온 사람이 나에 대해서 조사를 다 하지 않고 단지 한국인목사인 내가 중국인들에게 설교한 것만 문제삼겠다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왜 그러는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에 대한 문제를 최소화해 주고 있었다. 그는 조사를 마치고 떠나면서 다시 나에게 “조 선생님, 다음에 다시 ‘공안팅(公安厅: 경찰청)’에서 올 텐데 내가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시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마시오. 내 말 알아 들었지요?”라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한 마디를 더 했다. 그는 나에게 도망쳐도 된다고 했다. 그 대신 살아생전에 중국에는 영원히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들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중국은 엘리베이터에 카드를 갖다대야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다. 나는 카드를 갖고 나가서 엘리베이터 신호기에 카드를 갖다대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우리 집까지 들어올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짜이지엔(再见)’ 헤어지는 인사를 했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는 약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딘지 머쓱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의 인사말을 건네는 것은 그 짧지만 무지하게 길게 느껴지는 적막함을 견뎌 내기 위해 무엇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이 돌아간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뒤에 궈바오 요원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월요일 아침 9시에 ‘반스다팅(办事大厅)’이라고 불리는 경찰청 문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불면(不眠) 나는 소파에 앉아서 지난 일을 회상(回想)했다. 아니 그보다도 새벽에 꾼 꿈을 생각했다. 오늘 새벽에 참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나를 선교사로 보내고 후원했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여장(女裝)을 하고 등장했다. 그 모습은 보기에도 정말로 이상했다. 왜냐하면 그 노년의 목사는 작은 키에 배가 나오고 얼굴의 선은 굵고 눈, 코, 입, 손 등의 모든 것이 크고 두꺼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여장을 한 모습이니 보기에 기괴(奇怪)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 담임목사는 나에게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 나는 그 분을 모시고 그의 집으로 향했는데 꿈속에서 그의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헤어지려고 하는데 그 담임목사는 철로 된 파란 문을 손으로 잡고 나를 쳐다보면서 “너를 두고 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꿈에서 깼다.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꿈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오후 3시에 궈바오 요원들이 나에게 왔던 것이다. 나는 나의 영적 감각이 매우 흐려졌음을 느꼈다. 2000년 중국선교사로 입국할 때는 이 중국땅에서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적 통찰이라고 생각했다. 2003년에 선배 선교사들이 추방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3년에 한 번씩 위기가 오는 것을 보고 9년이 지날 즈음에는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추정했다. 2009년에 안식년을 보낼 때에도 나는 후배 선교사의 소개로 북한 주민 한 가정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다른 이유 때문이기는 했지만 북한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아내는 그때 내가 안식년을 가지지 않았으면 무엇인가 큰 위기가 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내 아내의 추정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다. 여하튼 무엇인지 모를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그러한 영적 시간의 흐름이 나에게 적용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쨌거나 십구 년째가 되는 2018년은 안식년을 했어야 하는 것이 옳았다.
이전에 한 번의 안식년을 보낸 것도 북한선교의 가능성에 대해 미국을 통해 뭔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아내의 권고가 있었을 뿐 아니라 주어진 상황들로 인하여 안식년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안식년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2017년에는 어떤 의미에서든 1년 동안은 중국을 떠나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2009년 당시 1년간 중국을 떠나 있었을 때 교인들은 여러 면에서 힘들어 했었다. 그런데 내가 또 1년을 떠나게 된다면 ‘목자 없이 지내는 양들’에 대한 측은함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중국을 떠날 수 없었다. 게다가 가정교회를 1년 동안이나 떠나 지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이전에는 후배 선교사가 있어서 그 일이 가능하기도 했지만 지금 이 지역에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튼 머물러 있었던 그 시간으로 말미암아 나는 궈바오 요원들에 의하여 결국 추방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꿈으로 나에게 징조를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피신하지 않은 나의 태도를 반성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나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최근에 한국교회 성도들한테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또 한국교회 성도들이 선교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등 한국을 중심으로 해야 할 일들을 보게 되었다. 나는 저녁에 Z집사를 불렀다. 그는 긴급히 부르는 나의 전화를 받고는 불안감을 안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나는 궈바오 요원들이 다녀간 것을 말해 주고 추방당하게 된 상황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잠을 설쳤다. 한밤중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정말 중국을 떠나야 하는 것인가!’ 정말 꿈꾸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이제 정말 중국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느껴졌을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하나님 앞에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든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정말 떠나야만 하는 시간이 왔을 때 선교사로서 행한 일들이 주님 앞에서 한없이 부족하고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음성가 중에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 (……)’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종종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이 다음에 정말 주님을 뵈올 때 선교사로서 무슨 열매를 드릴까를 생각하니 그저 죄송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운다. 왜냐하면 그때의 상황을 생각만 해도 너무나 부족한 열매를 주님께 드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1월 6일 새벽에도 주님 앞에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주님께서 나를 선교사로서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겨 이제 추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를 위로했다. 비록 내가 부족한 선교사이기는 하지만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을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18년간 중국 선양에 선교사로 있게 하신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럼에도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밤이 지나고 새벽의 빛이 창가로 스며들었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섰다. 마음속으로 주님께 왜 이런 일어났는지를 다시 한 번 여쭈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다른 일이 있기에 이제 중국을 떠날 때가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주님과 20여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기도는 일방적으로 주님께 아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명하게 주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흰 눈의 골고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새벽에 나는 주님께 기도를 한 뒤 밖을 내다보았다. 다시 울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온 세상에 계속해서 내리는 눈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중국에서 보낸 나의 삶을 정리하게 하시며 “잘했다! 수고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간단히 아침 식사를 끝내고 지하철을 탔다. 경찰청은 청(请)나라 초대 황제인 누르하치의 황릉(皇陵) 부근에 있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갔다. 지하철 역에서 목적지까지는 황릉의 성벽을 타고 약 200미터를 걸어야 했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며 또다시 울었다. 흰 눈이 수북하게 쌓인 길 위를 걷는 것은 마치 한 움큼의 피가 걸을 때마다 내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피가 내가 걷는 발자국마다 하얀 눈 위에 빛을 받아 붉게 피어나는 장미가 되는 것 같은 환상을 느꼈다. 그때 나는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시는 나의 주 예수님을 묵상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 스스로 작정하고 올라가시는 그 길의 발걸음은 어떠셨을까? 나는 아주 조금 주님의 골고다 길을 공감(共感)할 수 있었다.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사진 | gp.godpeople.com 조용선 |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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