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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2  통권 229호  필자 : 김영산  |  조회 : 3527   프린트   이메일 
[기획]
선교적 관점에서 공공신학(Public theology) 생각하기


20세기 말 이후 세계교회와 최근 한국교회의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현상은, 교회와 복음이 공적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사적인 영역으로 숨는 듯한 양상에 대해 반응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마치 중세에도 역시 성경을 보고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올바른 복음을 보여 주지 못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응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즉 공공신학의 목적은 이미 전통적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공공성’을 더욱 강조하여 교회가 공적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개혁주의 전통이 사적 신학을 해왔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공공성을 재발견하자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1) 그리고 코로나19 전후의 지탄받는 작금의 한국 사회 속 한국교회의 이러한 역할을 기대하는 최적의 상황이 된 것이다. 

“공공신학이 아니면 사적 신학이라는 말이냐?”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피하고, 공공신학은 복음이 지닌 공적 진리, 공공성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2) ‘공공신학’의 영어 명칭은 ‘public theology’이다. ‘공공(公共)’은 ‘public’이고, ‘공화(共和)’는 ‘republic’이다. 공공신학은 교회가 세상을 향한 바른 위치를 위한 일환으로 생각한다. “공공신학이란 공적인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사회적 형식,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다루는 것이다.3) 어떤 사람들은 신학이 공공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으며 모든 신학은 개인적이며 특정 신앙공동체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신학이 종교, 철학, 윤리학, 사회적 이슈 등에 의존하거나 관계하는 것이 계시와 규범을 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공공신학자들은 실존적, 고백적, 교리적, 실천적 신학도 필요하지만 변증적 신학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벧전 3:15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말을 준비하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는 공공신학에 관한 일반적인 특성이 있다. 케이티 데이와 세바스찬 킴은 공공신학의 여섯 가지 일반적인 ‘표지(mark)’를 소개했다.4) 첫째, 공공신학은 성육신적이다. 그것은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그 밖의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사실적이고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둘째, 어떤 공공의 참여와 공공 영역의 본질에 대한 토론이 종종 있다. 셋째, 사회와 더 관련성이 있기 위해 다른 연구 분야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학제 간이다. 넷째, 공공신학은 항상 교회 자체와 사회 모두에서 대화와 비판을 포함한다. 다섯째, 많은 이슈가 이민, 기후 변화, 난민 등과 같은 국경을 넘어 국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세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공공신학은 책에 인쇄된 것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이 신학 분야는 단지 어떤 이론이 아니라 사회에서 표현되는 동안 발전해 가는 신학이다.


1970년대 한국교회의 주류는 복음주의 진영의 교회였다. 이 당시 한국교회는 여의도 광장의 ‘맘모스 집회’로 상징되는 ‘대규모 구령집회’에 몰두해 있었다. 신자 개인의 의식은 영혼 구원의 중요성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탈사회적 의식에 포섭되어 있었다. 이른바 한국교회의 개인주의적 퇴행이 대중적으로 내면화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클리브 피어슨(Clive Pearson)의 공공신학 정의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공공신학의 특징을 설명하고자 한다. 공공신학은 교회만을 위한 신학이 아니며,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하고 사회적 변혁을 위해 영향력을 갖는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공신학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실천적, 도덕적 사유(universal practical moral reasoning)와 자연법(natural law) 및 공유된 도덕법(moral law)에 호소하려 한다. 이런 각도에서 공공신학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공유하는 바의 공동 도덕(common morality)을 강조한다. 공공신학은 단지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 신학을 선포하는 데에 그치지 않으며, 그를 위한 이론적이며 지적인 논구를 하려 한다. 이에 공공신학은 다른 신앙이나 전통을 갖거나 다른 학문 분야의 사람들을 대화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으며,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한마디로 공공신학은 하나님을 회중들과 신자의 마음만을 다스리시는 분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삶을 주관하는 천지의 대주재로 부각시킨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한 거대 담론을 하며 그것을 넘어 종교적인 가치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일상생활을 다룬다. 이 세상에 대한 기독인의 참여를 강조한다. 

공공신학 연구의 역사
공공신학은 1967년 로버트 벨라(Robert Bella)에 의해 미국에서의 시민종교(CIVIL RELIGION)의 역할에 관한 논의에서 파생되었다. 대표적인 공공신학자 맥스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는 교회사학자 마틴 마티(Martin Marty)가 1974년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분석하면서 ‘공공신학’을 처음 사용했다고 말한다. 마티는 미국 정신인 “종교의 자유, 입헌 민주주의, 인권, 열린 경제적 기회”를 뒷받침하는 종교적 기초를 가리켜 ‘공공 종교’, ‘공화국 종교’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리고 같은 해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THEOLOGY AS PUBLIC DISCOURSE’라는 에세이에서 최소 세 개의 공적 영역이 있는데 교회와 학교 그리고 사회라고 언급하였다.5) 일반적으로 공공신학자로 분류되는 신학자들은 맥스 스택하우스,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존 웨슬리(John Wesley),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라인홀드 니버,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등이다.6) 유대교 학자 윌 허버그(Will Herberg)는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등 미국 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미국정신(Americanism)’의 종교적 측면을 가리켜 ‘시민종교’라고 말했다. 이후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도 시민종교에 대해 분석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국교가 사라지면서 기독교 신앙은 사적인 것이 되었다.7) 

로잔 언약
1974년 7월에 세계 150여 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참석한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에서는 로잔 언약을 승인하였는데, 그 언약의 제5장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책임 모두를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8) 한국교회에서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 주최로 2007년 7월 장신대학교 세계교회협력센터에서 노영상(장신대 기독교윤리학), 임성빈(장신대 기독교 윤리학), 송태현(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와 양세진 기윤실 사무총장 등이 모인 가운데, ‘Public Theology’를 ‘공공신학’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2008년 11월까지 총 5회에 걸쳐 진행된 이 모임은 《공공신학》(임성빈 외 13인 지음, 예영커뮤니케이션 펴냄)을 출판하는 것으로 열매 맺었다.9) 

공공신학은 무엇이 다른가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의 다른 점을 아래와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이미 알려진 정치신학이나 상황신학과 공공신학이 애매모호하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① 공공신학이 일차적으로 정치신학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한다. 공공신학은 국가나 정치보다 일반 대중과 시민사회가 더 우선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신학은 정치질서가 사회 통합을 위한 최상위 제도라고 생각함으로 출발하지만 공공신학은 정치적 영역에서 복음의 증거가 특정 정치 프로그램으로 전환된다고 여기지 않는다. ② 공공신학은 고백신학과도 다르다. 고백신학이 특정 공동체에 의해 형성되는 특수 신학이며, 동방정교회,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감리교, 메노나이트 등 사이에서 달라진다.10) ③ 공공신학은 상황신학과도 구별된다. 상황신학은 특정 하위 커뮤니티의 종교적 정서에 기초를 두며 그들의 공동체적 기억과 희망, 정서를 표현한다. 여기에는 흑인신학, 여성신학, 우머니즘(Womanism)신학, 달릿(Dalits)신학, 민중신학, 코코넛신학 등이 있다.11) 이런 신학은 시민종교의 전통을 반복하고 있다. 

스택하우스는 공공신학이 이와 같은 신학들과 다르며 사회 윤리적이고 변증적이라고 말한다. 공공신학은 세속적이고 철학적이며 비기독교적인 종교적 태도에 대항하면서도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와 긍휼이 시민사회에 인식되고 작동되게 하기 위해 이들과 대화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공신학은 대립하는 집단 간의 중재를 위해 시스템이 점진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므로 혁명적인 방법이 아닌 개혁적인 방법을 따른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의 결여와 사회와 소통에 대한 철저한 무능이라는 자신의 처참한 민낯을 만천하에 드러낸 한국교회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더 선명한 복음이나 더 정통적인 신학이나 더 열정적인 제자도나 더 순수한 공동체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신자들만의 게토에서 과감히 뛰쳐나와 교회의 존재와 생각을 세상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삶의 방식으로 번역해 겸손하게 세상과의 대화와 소통에 참여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키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공공신학과 크리스천의 삼중직
예수의 삼중직 즉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은 그를 믿는 자에게도 주어진 삼중직이다. 신자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두 왕국 사이의 존재로 늘 긴장 가운데서 살아가야 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삼중직 중에서 제사장적 기능에 쏠림 현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선지자적 선포와 왕적 권위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이 아픈 현실이다. 기독교를 종교 광신자로 보는 불신자들이 많아지고 심지어 1세대 부모의 신앙을 꼰대의 신앙으로 보고 자녀들이 가나안 교인으로, 문화적 교인으로 급속도로 전환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늘나라에서 이 땅으로 오신 예수를 배우라
선지자는 선견(先見)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그 사회를 향하여 담대히 선포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대상자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세상 속 가시적 교회는 5만여 개 교회당의 숫자를 넘어 자신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개방해야 하며,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환대의 공동체, 경계선에 선 공동체로 다시 등장해야 한다.12) 그리고 그들과 소통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는 ‘이중언어’훈련을 생활 속에서 해가야 할 것이다. 그 이중언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배우듯 ‘습득’되는 것으로 성육신하신 예수에 대한 인간 이해의 모델을 배워야 할 것이다. 예수의 성육신의 삶은 go-underside, go-inside, go-alongside의 삶이다. 천국의 언어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알아듣도록 보여 주시고 삶으로 나타내신 나사렛 예수를 닮은 예수쟁이들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예수 전문가인 예수쟁이는 드물고 예수꾼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예수꾼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쟁이를 보고 싶어 하고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을 것이다.

문화적 사명과 공공신학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은 완전했지만 개발돼야 하고 더욱 풍성해져야 하는 곳이었다. 아담은 ‘밭을 갊(colere)’으로써 에덴동산에 잠재된 것들을 ‘문화(culture)’로 일구어야 했다. 이것이 아담의 직무였으며, 곧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공통 사명’이다. 그러나 타락 이후로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자원을 일구는 것이 아니라 착취하면서, 하나님이 세상에 담아 두신 자원들을 헛되게 사용한다. 곧 적그리스도의 문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에 클라스 스킬더(Klass Schilder)는 ‘기독교와 문화’도, ‘예수와 문화’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관계를 통해서만 문화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13) 

화란의 칼뱅주의 신학자 스킬더14)는 더 넓은 인류공동체의 재난으로 닥친 문제들을 단순히 무시하려고 하는 크리스천들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크리스천의 문화적 절제’에 대해서는 “증오심, 게으름, 수줍음, 느슨함, 혹은 협소한 마음에서 기원하는” 것이라고 아주 매서운 말들로 비판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한다. 그러면서 또한 ‘영웅적인’ 절제가 있는데, 이것이 그가 추천하고 있는 전략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올바른 종류의 문화적 절제는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동료들을 돌보고, 선교사들을 후원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남겨두신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등, 아브람 카이퍼와 다른 이들이 문화적 변혁이라고 불러왔던 저 매우 가시적인 일들을 그들이 수행하기에 어렵게 만드는 “(…) 신적인 의무감으로 수천의 다른 일들을 행하는 중”에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 문화관 이란 책에서 ‘교회는 가장 간접적인 문화 세력이다’라고 말한다. 

칼뱅주의와 공공신학
프랑스 혁명 이후 서구 세계는 두 삶의 체계가 서로 강력하게 투쟁하고 있는데, 인간의 이성과 자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계를 건설하려는 현대주의와 온 세상 왕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경외심으로 ‘기독교 유산’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세계관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현장은 세계관 간 투쟁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세계는 제임스 데이비드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말처럼 ‘문화전쟁(culture war)’으로 인해 분열과 대립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화전쟁은 사회 전체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가 주도권 쟁탈을 하는 전면적 충돌을 말한다. 이는 ‘가정, 예술, 교육, 법률, 정치’ 등 모두를 포함한 사회 전 영역에서 한 사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씨름이다. 하지만 헌터가 말하는 진보와 보수만으로 오늘의 다원화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여전히 근대적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이며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실제 사회와 문화 속에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중도적 입장들이 존재한다. 칼뱅주의 전통 역시 대립하는 사회와 문화의 현실 속에서 제3의 대안적 관점으로 기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칼뱅주의는 성경에 기초한 삶의 체계(life-system), 즉 포괄적인 세계관(Weltanschauung, wereldbeschouwing)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 카이퍼15)에 의하면 칼뱅주의는 개인적인 경건의 삶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의 모든 분야에 통일성을 세우는 위의 세 가지 관계성을 세우는 신학이다. 이 세 가지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깊은 확신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출발이 되며 사회, 정치적 지혜의 촛불이 된다. 칼뱅주의 신학자 아브람 카이퍼의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세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정치적 삶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한다.16) 첫째, 권력이나 힘은 절대적일 수 없으며 더 큰 상위의 정의로움에 영향을 받게 된다. 
둘째, 인간은 사회에서 서로 상호 간에 섬기기 위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셋째,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안에서의 책임성을 요구하며 서로 다른 도덕적 행동들은 거대한 책임성이 수반되어 하나의 공동화한 연결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17) 

카이퍼가 주장하는 가시적 유기체로서 교회가 추구하는 기독교 문화의 형성은 일반은총의 영역인 창조세계에 상관없이 특별은총의 임무를 맡은 제도적 교회가 만든 독특한 방식의 삶의 유형이나 형태를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문화의 발전은 중생한 유기적 교회가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창조의 풍부함을 개발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선 사회의 구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은총의 영역인 창조세계에 내포된 잠재성을 높은 차원으로 고양해 가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그는 기독교 문화를 주도하는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한다. 이런 기독교 국가와 문화를 형성하는 일은 유기적 교회인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연합체로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정치 영역에서는 온전히 거듭난 기독교인 정치인으로서 함께 유기적 연합을 이루어 그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육계든, 예술계든, 종교계든, 정치계든 주님의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창조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하인리히 베드포드-슈트롬(Heinrich Bedford-Strohm)
그는 독일 복음주의 교회협회와 루터교 수장으로서 공공신학 발전을 위해 예닐곱 가지를 제시한다.18) ① 성경적 신학적 측면을 계속 고려해야 한다. 교회는 근본적인 윤리 판단이 필요한 곳에서 대단한 기여를 직간접으로 해왔음을 부인하지 못한다(칼뱅의 제네바시의 결혼 조례입법화 기여). ② 이중언어 능력을 길러야 한다. 기독교의 신조가 세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전달되어야 한다. 장 칼뱅은 법학을 전공한 자로서 신학적 개념을 법학적인 용어를 빈번히 사용하였다. ③ 이중언어에 익숙하려면 간학문적(間-學問的, INTER-DISCIPLINARY) 특징을 배우고 활용해야 한다. 장 칼뱅은 인문학의 대가인 세네카에 대한 주석을 1532년에 출판하였다. ④ 교회가 윤리적 전문성에 기여함으로 정치의 방향성을 제공하기 위해 공공신학이 필요하다. 장 칼뱅은 제네바 종교회의(CONSISTORY)에 참여하여 토론하고 결론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⑤ 교회와 신자는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속성과 사명을 재인식해야 한다. 비록 비관적일지라도. 칼뱅은 스위스가 정의와 공동선(COMMON GOOD)을 추구하는 ‘이자법’을 제안한 사람이다. ⑥ 21세기의 세계화 가운데서 상호 맥락적(INTER-CONTEXTUAL) 특성을 인정하고 서로 배워야 할 것이다. ⑦ 필자는 선교적 삶을 사는 크리스천이 ‘청지기’의식을 가지고, 21세의 선교는 전인적이고 총체적으로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KINGSHIP)을 존재적으로(BEING) 영향을 끼치는 ‘에토스’뿐 아니라19) 실제적인 행동으로(DOING) 섬기면서 살아갈 것을 제안한다.

제안과 과제
그동안 보수 신학에서 신학의 공공성에 대한 담론이 비교적 약했던 것은 ‘세상론’의 부재에서 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세상(cosmos)에 대한 광의적 의미보다는 협의적 의미에 관심을 더 많이 두었기 때문이다. 한국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의 틀 가운데 신론-인간론-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을 가르치는데 세상론을 다루지는 않는다. 필자는 인간론에 대한 학문을 확장해서 ‘세상론과 인세론’에 대하여 가르치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 주도록 신학의 공공성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개인화와 개인화로 이기적인 기독교인을 양산하게 되고, 이원론적 사고와 음성적 도피주의 형태의 신앙으로 기울 위험이 많다고 본다. 그런 신자들이 양성되면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고 복음송만 부르며, 세상을 방관할 크리스천이 아님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일본 기업의 장점 중의 하나는 R/D(연구 개발)의 활성화이다. 우리의 선교도 계속해서 연구하는 선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프린스턴대학교의 ‘Abraham Kuyper Center for Public Theology’20)와 같은 -공공신학센터를 세워서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와 개혁주의적 공공신학의 이슈들을 고민하고 연구하고 담론을 일상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공공신학은 정치보다 삶의 더 근본적인 영역을 다룬다. 정치질서나 정권, 정책은 생겨나서 다시 사라진다. 그러나 종교, 문화, 가족, 경제, 지적 전통들은 더 근본적이며 계속되기 때문이다. 또 공공신학은 문화, 가족, 경제, 지적 전통들이 종교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모든 국가의 정권은 종교적 호소력을 통해 합법성을 획득하게 된다. 

예컨대 중국이라는 제국의 기저에는 유교가 있고, 인도의 카스트제도 아래에는 브라만 전통이 있다.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많은 나라에는 불교가, 북아프리카와 아랍 세계 등에는 이슬람교가 있다. 그러면 한국 사회의 20%를 차지한다는 기독교가 지탄과 불신의 대상이 된 지금, 침묵하고 고개 숙인 신자로 성경책을 숨기고 다닐 것이 아니라, 다시 어떻게 회복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공적으로 개방적으로 다 함께 생각해 야 한다. 그야말로 바울이 말한 대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이 세대를 분변하고 해석하는 능력과 안목과 종합적인 이해가 선결되어야 헌다. 공공신학은 민주화, 근대화, 세계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담론들과 대결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신실하게 증언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교회는 민주주의가 중요하게 여기는 공공성과 시민성을 제대로 학습하거나 체화하지 못한 나머지, 타자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감수성과 사회적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공감 능력, 공론장의 비판을 견디면서 합리적 절차와 과정을 거쳐 세상과 소통하며 사회적 연대를 이끌 수 있는 ‘마음의 습관’이 결핍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시민’으로 공론장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최선의 가치도 부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겸손하게 주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21) 

시민사회 속에서 공공신학은 낯선 이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함께 공적 의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포용의 공간이 되어야 하며, 비통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공론장에 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 공간을 창조하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22) 


미주   
1) kim minseok. John Calvin as Public Theologian? Reading Calvin's Theology in the Light of Contemporary Discourses in Public Theology with Reference to the Korean Context (Stellenbosch university. 2019) 학위논문을 참조하라.
2) 출처: 코람데오 닷컴(http://www.kscoramdeo.com).
3) 사회학자인 Peter Berger는 사회생활의 규범적 이슈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정치질서에 대해서보다 개인들의 관계에 너무 많이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고 불평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그가 ‘중재적 구조물들(mediating structures)’이라고 불렀던 것의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한편으로는 개인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주의라는 쌍둥이 죄악을 피하려면 우리는 국가와 개인 사이에 하나의 완충지대를 제공하면서 그럼으로써 성품 형성에 결정적인 자원들을 제공해 주는, 다양한 연합적인 패턴들 이웃과 관계를 가능케 하는 조직들, 청소년 단체, 봉사집단들, 교회들, 가정 그 자체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방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4)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https://www.translatetheweb.com 참조.
Katie Day and Sebastian Kim note six common “marks” of public theology. Firstly, public theology is often incarnational. It is not confined to the church but meant to be relevant to people outside of it as well. It is meant to be realistic and concerned with all aspects of societal life. Secondly, there is often discussion over which public(s) to engage and the nature of the public sphere. Thirdly, it is interdisciplinary because it draws on other fields of study in order to be more relevant to society. Fourthly, public theology always involves dialogue and critique from both the church itself and society as well. Fifthly, it has a global perspective because many issues affect countries across borders, such as immigration, climate change, refugees, etc. Lastly, public theology is performed, not just printed in books. This field of theology is not theorized first then applied, but it is a theology that develops and evolves while being expressed in society.
5) 김민석, 공공신학자로서 칼뱅, (부산:향기커뮤니티, 2020), 논문 발표회 자료 참고.
6) 스택하우스는 다음과 같은 신학자들을 자신의 공공신학 계보에 속하는 인물로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 폴 틸리히(Paul Tillich),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이다. 그리고 그는 독일의 공공신학자로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 칼 쉬미트(Carl Schmidt),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요하네스 메츠(Johannes Metz),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등을 주목한다.
7) 출처: https://sinhak.tistory.com/72 [晟佑, 밝은 도움].
8) 로잔 언약의 발기인인 존 스토트는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란 책에서 현대 사회의 주요 이슈들을 다룬다. 전쟁의 문제, 생태계 위기의 문제, 국제 무역 관계의 문제, 인권 문제, 노동과 실업 문제, 비즈니스 문제, 인종 문제, 생명공학 문제 등을 다루면서, 필요할 경우 비기독교 전통에 속하는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하면서 자신의 기독교적 주장을 펼친다.
9) 공공신학 관련 출판물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공공신학이란 무엇인가?》/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 《공공신학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맥스 스택하우스, 《세계화와 은총》, 이상훈 역, 북코리아/ 채수일, 《신학의 공공성》, 한신대학교 출판부/ 이형기 외, 《공적신학과 공적교회》, 킹덤북스/ 이형기, 《하나님 나라와 공적신학》, 한국학술정보/ 장신근, 《공적실천신학과 세계화시대의 기독교교육》,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이나가키 히사가즈, 《공공복지》, 성현창 역, 예영커뮤니케이션/ 미로슬라브 볼프, 《광장에 선 신앙》, 김명윤 역, IVP/ 엘렌 오트 마샬, 《광장에 선 그리스도인》, 대장간/ 이승구, 《광장의 신학》, 합신대학원출판부/ 짐 월리스, 《하나님 편에 서라: 공동선은 어떻게 형성되며, 우리 사회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IVP/ 정종훈,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공공신학》, 한국장로교출판사/ 임성빈 외, 《공공신학》, 예영커뮤니케이션/ 리처드 아스머, 《공적신앙과 실천신학》, 대한기독교서회/ 위르겐 몰트만, 《세계를 위한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적인 신앙의 정립을 지향하며》, 동연/ 레슬리 뉴비긴,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 김기현 역, SFC/ 류태선, 《공적 진리로서의 복음》, 한들출판사/ 손규태, 《하나님 나라와 공공성》, 대한기독교서회/ 손규태 교수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 《공공성의 윤리와 평화》, 한국신학연구소.
10) 기독교세계관, 칼뱅주의 문화관, 칼뱅주의적 세계관,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해방신학 등의 이름으로 논의되어 오던 것들을 묶어 공공신학이라고 한다.
11) 공공신학은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주변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엿보인다. 부차적인 것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반면 복음과 영혼구원과 교회 설립에는 소홀하게 될 경향이 있다.
12) 제임스 거스탑슨(James Moody Gustafson)은 기독교 사회윤리의 기본적인 유형을 예언적 담론 -서사 담론- 윤리적 기술적 담론- 정책 담론의 네 가지로 분류하면서 기독교 담론의 특수성이 보편성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제시했다. 나이젤 비거(Nigel Biggar)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도 자연법이나 자연은총을 강조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을 사용해 공공신학을 전개한다. 그는 기독교 신학이 가지고 있는 전체 이야기 혹은 거대 서사만으로도 충분히 윤리학에서 요구하는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이 공통의 윤리적 기초와 선에 대한 공통의 개념을 공유하기 때문에 공통 감각이나 비신학적 통찰을 충분히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3) 클라스 스킬더, 《그리스도와 문화》, 손성은 옮김, (서울:지평서원, 2017). 참조하라. 스킬더의 대표작으로는 3부작으로 된 《Christus in Zijn Lijden》(고난받는 그리스도, 1930), 《Wat is de Hel?》(지옥은 무엇인가, 1919), 《Licht in den rook》(흑암 중의 빛, 1923), 《Tusschen ja en neen》(예와 아니오 사이, 1924), 《Wat is de Hemel?》(천국은 무엇인가, 1935) 등이 있다.
14) 클라스 스킬더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칼뱅주의 문화관을 계승한 자이며, 예장 고신과 자매 관계인 네덜란드 개혁교회(31조파)의 신학자이다. 스킬더는 경건과 분리된 문화는 저주일 뿐 결코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킬더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이 오직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라 말하며, 그것을 일반소명이라고 표현한다”라고 언급한다. 이렇듯 그는 카이퍼 식의 일반적 문화활동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활동을 강조했다. 세상 가운데 사는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문화를 드러내는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클라스 스킬더가 7가지로 정리한 성경적 문화관을 요약했다.
① 유일한(the) 문화는 없다. ‘유일한 문화’라는 개념은 양적인 것에 대한 상상에서 나온다. 곧 문화적 노력에 일치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 ‘선험적으로’ 보더라도 그런 일치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문화의 온도계가 너무 일찍 가열되어 부서져 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② 문화는 구체적인 섬김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섬긴다는 것은 각자를 향한 부르심에 따라 섬긴다는 의미다. ③ 문화는 때때로 자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것이며, 문화 양식과 훈련, 활동 그리고 자기 절제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문화’, 곧 ‘은혜’의 모든 보화를 감추어 두셨다. 문화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 디모데전서 4장 4, 5절 말씀은 모든 것이 선하다고 선포한다. ④ 문화사명은 태초부터 주어졌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사명을 무엇보다도 공통의 명령, 부르심, 사명에 관한 문제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균형 있게, 그들의 목적들에 일치하는 규범에 따라 세워진 관계 속에서 협력하면서 온전하고 완성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⑤ 교회는 가장 간접적인 문화 세력이다. 교회(협력 공동체들)가 가진 의사 결정의 규범들은 성도의 교제를 위해 맡겨진 율법과 설교, 말씀의 집행에서 도출된 고유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결정을 깊이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민족들의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로, 자신의 하나님에게로 불러 모으고 가장 완벽하게 균형 잡힌 도시를 세우시는 분을 신랑으로 삼은 신부다. ⑥ 그리스도 없이는 참된 문화도 없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를 때만 문화적 삶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문화는 언제나 공동의 행위다. 산상수훈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사들이요, 새로운 세상의 건축자로 살아가야 할 기독교인들에게 선포된 말씀이다. ⑦ 문화는 끝이 없는 과제다.
15) 아브라함 카이퍼(네덜란드어: Abraham Kuyper, 1837∼1920년)는 네덜란드의 수상이자 신학자이다. 신칼뱅주의가 그에 의해 시작된 운동이다. 에른스트 트뢸치는 그의 저서 《기독인 교회의 사회적 고찰》에서 현대 칼뱅주의 사상에 주요 인물이라고 평가. 네덜란드의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미국의 벤저민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와 더불어 세계 3대 칼뱅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주장한 일반은총과 하나님의 영역 주권사상은 개혁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에 카이퍼 연구소가 있는데, 그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의 전환을 강조하였다. 기독교가 개인 신앙의 차원에서 삶 전체, 우주 전체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돼야 함을 주장하였다.
16)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하면 네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종교의 본질과 의의를 설명한다. ① 종교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② 종교는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매개적으로 작용해야 하는가? ③ 종교는 개인적 존재와 실존의 일부분에서만 작용하는가? 아니면 삶의 전체에서 작용할 수 있는가? ④ 종교는 정상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는가 아니면 비정상적인 즉 구원론적 특성을 가져야 하는가?
17) 출처: https://www.theosnlogos.com/378 [theos & logos].
18) 김민석 앞의 강의안 자료 인용.
19) 에토스(고대 그리스어: ἦθος, ἔθος, ēthos)는 ‘성격’, ‘관습’ 등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에토스라는 단어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에토스는 화자(話者) 고유 성품을 뜻한다. 체형, 자세, 옷차림, 목소리, 단어 선택, 시선, 성실, 신뢰, 카리스마 등이 에토스에 속한다. 오늘날 이 단어는 민족 혹은 사회별로 특징지어지는 관습 혹은 특징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20) 2007년에 ‘공공신학을 위한 국제네트워크(Global Network for Public Theology)’가 프린스턴신학교에 설립되고 <공공신학 국제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Public Theology)>이 동시에 발간되었다. 또 매년 국제콘퍼런스가 열리면서 《공적 영역에서의 신학(Theology in the Public Square)》이 단행본으로 계속 출간되고 있다.
21) 1984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신학과 공적 이슈들을 위한 센터(The Center for Theology and Public Issue)’가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스코틀랜드의 공공신학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했고 그 중심에 던컨 포레스터(Duncan Forrester)가 있다. 
22) 출처: https://wjdwkqtk.tistory.com/1132 [書淫人의 집].








김영산 선교사(kpm) | 1996년 베이징 선교사역 후 2008년부터 2021년 현재 고신대 선교목회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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