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굴지의 명군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당(唐, 618-907) 왕조의 태종(太宗, 626-649)이 명군으로서 유명하다. 그는 당 왕조를 창업한 고조(高祖) 이연(李淵, 566-635))의 둘째 아들로, 수(隋:581∼618)나라 말의 혼란기에 아버지 이연을 도와 왕조 창업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아들 이세민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일으켜 관중(關中)을 장악한 이연은 수 양제(煬帝)가 우문화급(于文化及, 수의 고구려 원정 때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우문술의 장남)에 의해 시해되자 그 해(618) 5월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당(唐:618∼907) 나라를 '창업'했다. 그는 나라 이름을 '당'이라 하고, 연호를 무덕(武德)이라 칭하였으며, 큰 아들 건성(建成)을 태자로 세우고, 차남인 세민(世民)을 진왕(秦王), 삼남인 원길(元吉)을 제왕(齊王)으로 삼았다.
그러나 왕조 창업의 축배를 들기도 전에 황실 내부는 후계자 싸움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어느 왕조나 창업 초기에는 창업 군주 다음에 누가 그 뒤를 이을 것인가 하는 후계자 문제로 흔히 왕자의 싸움이 일어나는 일이 많은 데, 당 왕조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조 이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건성, 차남인 세민, 삼남인 원길이다. 이 중 장남 건성과 차남 세민 두 아들은 부왕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조를 창업한 뒤의 활동이다. 장남인 건성은 황태자의 신분으로 주로 동궁에서 지내었고, 여러 군웅을 평정하는 일은 주로 차남인 세민의 몫이었다. 국초에 세민은 동서남북으로 중국 대륙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세민은 용맹성 뿐 아니라 전략에도 뛰어난 보기 드문 장수로, 그의 명성과 품성이 함께 알려지면서 많은 인물이 세민에게 몰려들었다. 세민은 황태자에게 위험한 존재로 부각되었으며, 자연 둘 사이에 은연중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제위 계승자로서 동궁에 살고 있는 황태자 건성은 지모가 뛰어난 책사와 용감한 군인들을 그의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힘에 있어서 결코 진왕 세민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진왕 세민의 존재가 자신의 제위계승에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되었다. 건성의 책사 위징(魏徵)은 이와 같은 재앙의 뿌리를 없애버리기 위하여 하루라도 빨리 세민을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들 제왕 원길을 보면, 그는 세력이 태자 건성이나 세민에게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그 역시 용맹이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았다. 원길도 그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었으니, 우선 먼저 세민을 제거한 후, 그 여세를 몰아 태자와 싸우면 승산이 있고, 그렇게 되면 제위는 자신의 것이라고 계산하였다. 이렇게 생각한 원길은 태자 건성에게 하루 빨리 이세민을 없애야 한다고 권하고 자신도 그 일을 위해 힘이 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왕 세민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턱이 없었다. 세민은 많은 사람을 시켜 태자와 원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탐지하고 있었다.
드디어 626년 6월, 수도 장안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에서 정권 탈취를 위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세민은 부하인 장손무기(長孫無忌), 위지경덕(尉遲敬德), 두여회(杜如晦), 방현령(房玄齡) 등과 함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궁궐을 들어오는 건성과 원길을 현무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화살을 쏘아 그들을 살해했다. 태자가 원길과 손을 잡고 세민을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세민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현무문의 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형제 뿐 아니라 그에 딸린 아들 곧 조카들까지도 모두 희생시켰으니 국초 형제의 싸움은 참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정관의 치(貞觀之治, 627~649) 고조는 이 사건을 추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무문의 변' 3일 후, 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후 마침내 그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이 탄생한 것이다. 이 때 고조의 나이 62세, 태종의 나이 28세였다. 태종은 다음 해(626)에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바꾸고 본격적인 치세 단계에 들어갔다.
제2대 황제로 즉위한 태종 이세민은 우선 사치를 경계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였다.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민생 안정을 꾀하고, 외정(外征)을 통해 국토를 넓혔으며 학문 문화 창달에 힘을 썼다. 그는 피의 숙청으로 권력을 장악하기는 하였으나 탁월한 정치를 펴 후세 군왕이 치세(治世)의 본보기로 삼는 성세(盛世)를 이룩했다. 이 성세를 일컬어 '정관의 치'라고 한다.
내적으로 오랜 전란 끝이라 민심은 안정을 바라고 있었고, 대외적으로 북방의 강성한 돌궐 세력도 약화되어 있어 국내외 상황이 태종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긴 하였지만, 그는 정치적 수완을 잘 발휘하여 왕조지배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3성(中書省, 門下省, 尙書省), 6부(吏,戶,禮,兵,刑,工)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관제를 완성하고 전국을 10도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수대에 개시한 과거제를 정비하여 가문에 구애받지 않고 국가 관료를 채용하는 길을 열었다. 정관율령격식(貞觀律令格式)을 제정 공포하여 율령격식을 완성하고, 토지제도로 균전제, 세제로 조용조, 군사제도로 부병제 등을 실시함으로써 제도의 안정을 꾀하였다. 문란하였던 도덕과 풍기도 안정을 되찾음으로써 성세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정관의 치는 충성된 간언을 잘 들음에서부터 '정관의 치'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고, 충성된 간언을 잘 들은 데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명족과 서민 출신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조화 속에서 군주의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훌륭한 인재라면 자신의 반대 세력이라도 과감히 등용하였으며, 자신을 억제하고 널리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충성된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일인 통치의 한계를 최소화하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곁에는 재상으로 결단력이 뛰어난 두여회(杜如晦), 기획력이 빼어난 방현령(房玄齡) 등과 같은 여러 현명한 신하들이 태종의 선정을 보필했다. 사가들은 태종을 잘 보필한 두여회의 강한 결단력과 방현령의 지모를 '두단방모(杜斷房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강직한 간관(諫官)으로 유명한 인물은 위징(魏徵)이다. 간관으로 솔직한 의견을 태종에게 상주하던 위징은 원래 황태자의 심복이었다. 위징은 태자에게 한시라도 빨리 동생 세민을 죽여 없애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여러 차례 권한 인물이었다. 이세민이 황실 내 쿠테타를 성공한 후, 위징을 불러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를 이간질 하였는가?"하고 노발대발하며 크게 질책하였다. “황태자는 나의 의견, 곧 당신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이와 같은 화를 입은 것이오. 나에게는 추호의 잘 못이 없소이다.” 하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대답하였다. 이것은 죽음 이상의 것을 각오한 말로, 태종은 위징의 대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아무리 천하를 평정한 이세민이라 하더라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대로 자신의 뜻을 밝힐 수 있는 위징의 용기와 태도, 그것은 태종을 사로잡았다. 태종은 그런 비범한 인물, 위징을 발견한 것이다. 태종은 위징을 유용한 인물로 보고 지난 과거를 용서하고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천자의 과실을 간하는 관)로 임명하였고, 위징도 이에 감복하여 큰 은혜를 느끼고 태종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임금에게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충성된 말을 하는 것을 간언이라 하고, 임금이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납간이라 하는데, 태종 이세민은 정치를 하는데 이 납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징을 비롯한 신하들은 실패한 군주였던 진 시황이나 수 양제를 교훈 삼아 요, 순 임금 같은 성군이 되어야 한다며 황제의 말과 행동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목숨을 내놓고 황제에게 서슴치 않고 날카로운 직언을 하였다. 태종 역시 자신을 억제하며 그 직언에 귀를 기울였다.
간관으로서 이름이 높은 위징은 태종이 아무리 화를 내어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솔직하게 간언하였다고 한다. '군신 마음을 합하여 행복을 누렸던 고요(皐陶. 순임금 때의 현신)와 같은 양신(良臣)보다도 오히려 주군 앞에서 잘못을 지적하다가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폭군 주왕의 실정과 무도함을 간하다가 죽임을 당한 충신)과 같은 충신이 되고 싶습니다.'고 하여 태종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그렇기에 위징이 죽자, 당 태종은 "짐은 거울 하나를 잃었다. 나는 세 개의 거울, 곧 의관을 바로 정제하는 구리거울, 천하의 흥망을 비치는 거울로서의 과거의 역사, 짐의 행동의 시비를 알 수 있는 거울이 되어 준 거울(위징)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었다"고 개탄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창업과 수성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어느 날, 태종은 여러 현신들이 모인 자리에 이런 질문을 했다. "창업과 수성은 어느 쪽이 어렵소(創業守成孰難)?" 방현령이 대답했다. "나라의 창업은 여러 군웅들이 여기저기서 봉기하고, 그 봉기한 군웅 가운데 최후의 승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니, 창업이 어려운 줄로 압니다." 그러나 위징의 대답은 이와 달랐다. "예로부터 제왕의 자리는 간난(艱難) 속에서 어렵게 얻었다가, 안일(安逸)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이옵니다.
그런 만큼 수성이 어려운 줄로 압니다." 방현령은 창업이라 하였고, 위징은 수성이라 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말했다. "방공(房公)은 짐과 함께 천하를 차지하면서 여러 차례 어려운 고비를 거치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소. 그래서 창업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리고 위공(魏公)은 짐과 함께 나라를 안정시키고 있는데, 항상 교만과 사치가 부귀에서 싹트고, 여러 재난이 소홀과 방심에서 나오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오.
그래서 수성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라고 하면서 두 사람의 대답에 수긍하면서 "그러나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끝났소. 그래서 짐은 앞으로 귀공들과 함께 수성의 어려움을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되오." 라고 하면서 수성에 힘을 썼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비롯하여 〈당서(唐書)〉,〈자치통람(資治通鑑)〉, 〈십팔사략(十八史略)〉 등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정관정요〉는 주로 당 태종 이세민과 그의 충신, 곧 위징, 두여회, 방현령 등이 나누던 대화를 중심으로 엮어 놓은 것인데, 현명한 군주와 신하들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할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들의 대화와 토론은 개인의 몸가짐은 물론, 법제, 제정, 관리 선발, 교육, 외교, 조세, 전쟁론까지 매우 다양하며 깊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천하를 좌지우지하던 군주 이세민이 얼마나 신하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며 선정을 베풀려고 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까지 대표적인 '제왕학'의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는 이 〈정관정요〉는 사관 오긍(吳兢)이 측천무후의 전횡으로 인해 어지러워진 나라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중종이 태종의 치적을 본받아 태평성대를 이룰 것을 바라는 충심으로 이 책을 엮은 것으로 국가의 통치에 기본이 되는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다.
무모한 고구려 원정은 그의 죽음을 자초하고 국내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민생을 안정시키어 정관의 치로 성세를 이룩한 태종도 유명한 대왕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대외 원정으로 자기 과시를 단행하며 대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는 돌궐 위구르를 복속하고 다시 비단길을 장악했으며 그 여세를 몰아 동으로는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초강대국인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확립하고자 함이었다. 과거 수 양제가 세 차례에 걸쳐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끝내 나라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고구려 원정을 자신의 손에서 완성하려 한 것이다.
태종은 처음(645)에 1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몇 년 후에는 30만 군대를 내어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였다. 고구려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반기를 들며 대항하였다. 성주 양만춘이 이끈 유명한 안시성 싸움에서 고구려 군사들은 당 군사를 맞아 잘 막아 싸웠다. 이로써 태종의 고구려 원정은 실패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당나라는 다시 피폐해지고 물가가 계속 앙등하여 사회 환란이 일어났는데, 태종은 다시 원정을 준비하던 중, 649년에 그의 나이 51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스스로 쌓아 올린 대당제국을 그리면서 장안에서 죽었다. 무모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한 심신 양면의 피로가 죽음의 기약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태종은 당 왕조의 기초를 굳히고 정관의 치로서 선정을 베풀었기에 명군으로 후세 정치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현무문의 변도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당왕 지배체제 집단 내부의 분열의 위기를 일단 회피 하여 상대적인 통일과 안정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사가들은 평가한다. 그렇지만 이세민은 쿠테타를 결심한 뒤 형제들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찬탈자이다. 그가 아무리 명군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씻을 수 없는 과오이고, 더불어 이른바 ‘알렉산더 콤플렉스’에 의한 대외 원정은 끝내 자기 몰락을 자초함을 교훈해 주기도 한다.
전순동/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