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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방지일 목사님] 1937년 산동선교사로 부임하다  
차하경  Email [2014-10-11 11:23:03]   HIT : 1703   

산동선교는 1910년대에 시작되어, 1920년대에 무르익었고, 1930년대에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 둔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산동선교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1937년에 발생한 중일전쟁은 큰 타격이 되었다. 이때는 비기운동(非基運動)이 교회를 괴롭히는 때이기도 했다. 1940년대에 중국은 공산화되어 교회들은 심한 제약 가운데 갇히게 되었고, 산동선교 역시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937년에 산동선교사로 부임한 방지일(方之日) 목사는 그런 여건들과 싸우면서 최선을 다했다. 어려운 가운데서 목숨을 걸고 걸은 사명의 길이었기에 그가 보여준 모습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방지일 목사는 1937년 중국에 부임, ① 국민당 ② 일본통치 ③ 미군정 ④ 국민당 ⑤ 공산당, 5개 정권의 통치 속에서 선교를 하였다. 산동선교는 방지일 목사가 1957년에 강제추방 당함으로써 일단 그 막을 내렸다. 
 

  

 
① 방지일 목사를 중화민국 산동성선교사로 파송한다는 증빙서

장로교 총회 전도부장 이자익(李自益) 목사 명의로 1937년 4월 14일에 발급되었다. 중국교회를 대상으로 하였기에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②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은 국부군과 팔로군(공산당)의 내전에 휩싸였다. 공산당이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사람들은 도시로 피난을 오기 시작했다. UN 국제구제회는 죽을 배급하는 죽창(竹廠)을 설치하고 그 관리를 방지일 목사에게 의뢰했다. 죽창에서는 매일 2,000명에게 죽을 배식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했다. 방지일 목사는 죽창 사역에 대해“쉽지는 않았으나 그때 복음 역사는 크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사진은 1947년 4월 8일 죽창의 모습이다. 이 죽창은 1년 넘게 운영되었다.
 

 

 ③ 소촌장(小村庄) 교회
이 교회는 중국이 1949년 10월 1일에 공산화된 이후에 건립된 교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공산당은 초기에 거주· 언론·종교의 자유를 강조했다.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책을 확립하지 못했기에 먼저‘자유’를 강조하여 인심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소촌장교회를 건축하려고 하자 교인들은 두려워하며 하기 어렵다고 했다. 방지일 목사는‘공산당이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는데 왜 두려워하는가?’하면서 공사를 강행하여 몇 달 만에 완공하였다. 공산정권은 외국인 관련 교회는 다 등록하라고 하였는데, 방지일 목사는‘나는 중국적(中國籍) 목사이고 이 교회는 중국교회이다’하며 등록하지 않았다. 중국 목사들이 이 일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④ 방지일 목사 환송 기념예배
당시는 이와 같은 모임을 갖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중국 성도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였다. 중국 성도들은 배급 받은 옷감으로 방 목사 가족의 옷을 만들어 몰래 담 밖에서 던지고 가고, 음식도 그렇게 하였다. 환송예배에서 한 달 생활비를 방 목사의 성경책 사이에 몰래 넣어준 교인도 있었다. 방지일 목사는 “선교지에 가서 나는 그들로부터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받고 왔다”고 회고한다.
 

 

 편집자 주_ 2013년 5/6월호부터 9/10월호까지 3회에 걸쳐 특별기획으로 '사진으로 보는 산동선교 100년'을 다루었던 내용을 방지일 목사님을 그리며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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