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월 24일은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은 지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공식적인 선교를 허락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한중수교로 인하여 중국선교가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 간의 왕래가 자유스러워지고, 중국 내의 형제들과 접촉이 빈번해지고 많은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중국선교에 큰 도움이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이의를 제기할 분도 계시겠지만 한중수교는 중국선교를 지하선교에서 지상선교로, 특수선교에서 일반선교로 전환시켰고 채널의 다양화를 이룩했으며, 제한된 성격이지만 직접선교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1970년 대 후반 중국의 개방정책으로 중국선교가 재개되었으나, 우리에게 중국은 여전히 ‘죽의 장막’으로 가려진 나라였습니다. 한국 여권으로 중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해, 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재미동포 크리스천들을 통해 소식을 입수하고 전도 물품을 전달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필자는 현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홍콩을 자주 드나들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는 차이나타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실수도 많았습니다. 중국에서는 ‘만주(滿州)’라는 말을 가끔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도 모르고 방송 프로그램의 타이틀을 ‘만주동포에게’라고 해서 2년이나 방송했고, 「중공의 기독교정책」이라는 책을 번역할 때는 ‘신의종(信義宗: 루터교)’, ‘범제강(梵帝綱: 바티칸)’ 이런 단어의 뜻을 몰러서 하는 수 없이 한자 그대로 인쇄하다가 인쇄 도중에 뜻을 말해주는 분이 있어서 기계를 멈추고 활자를 바꿔 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중국에서 크리스천 동포 한 분이 한국을 방문하면 그야말로 생생한 ‘정보원(情報源)’으로 귀빈 대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선교를 하던 그 때의 일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1910년대 한국 교회가 중국(산동)선교를 시작했을 때의 선배들의 수고도 잊지 말아야합니다. 1937년에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은 방지일 목사님은 4월 28일에 평양을 떠나 임지인 산둥성 라이양(萊陽)에 가는데, 따리엔(大連)까지 가서 배로 칭다오(靑島)에 도착, 육로로 5월 7일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녀가 일곱 살, 다섯 살, 세 살이었는데, 다섯 살 난 아들이 말이 통하지 않아 중국 아이들이 노는 데 어울리지 못하고 처량하게 보기만 하다가, 유리창에 앉은 파리를 보고 “파리야, 너도 중국말만 하니?” 하는 것을 듣고서 가슴이 뭉클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32: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이' 편해진 중국선교의 환경 때문에 게을러지는 일이 없이 예전 일들을 생각하면서 더욱 분발해야 하겠습니다.
유관지 | 본지 발행인ㆍ목양교회 담임목사ㆍ전 극동방송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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