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윈(雲) 형제는 중국 허난성의 한 농촌에서 태어나 부친의 기적적인 암 치유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국정부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중국 곳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삼자애국운동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죄목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힘든 투옥의 시기를 겪었다. 2차로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1996년 ‘시님 연합’을 창립하였다가 다시 체포되었으나 기적적으로 탈출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독일로 탈출하였다. 그의 간증서인 ‘하늘에 속한 사람’을 통하여 그가 중국에서 겪었던 사건들과 중국 가정교회의 모습을 생생히 담고 있다. 모든 사건을 다루고 싶었지만 그의 행적을 간단히 요약했다.
고집불통의 허난 성 사람들 그는 1958년 중국 허난 성 남부의 한 농촌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허난 성은 중국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한 성으로 대략 1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중국의 다른 지역 사람들은 허난 성 사람들을 ‘나귀 같은 고집불통들’이라고 부른다. 1988년 개신교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주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고집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교사의 사역이 시작한지 40년이 지날 때까지 허난 성 전체 개신교 신자 수는 12,400명에 불과했다. 양놈의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사회에서 조롱을 받고 배척을 당했으며 심지어 구타와 살인까지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앞잡이이며 중국의 천연자원을 수탈하고 중국인의 마음과 정신을 묶어 놓기 위해 파견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900년대 외국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비밀결사 조직인 의화단이 외국인을 습격할 것을 전국적으로 부추겼다. 이때 많은 선교사들이 피살을 당했고 수천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몇 년 사이에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을 당하였고 교회는 폐쇄되었으며 수천 명의 목사들은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마오쩌둥이 도입한 대약진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이 힘겨워졌다. 허난 성에서는 8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내 고향의 햇병아리 같은 작은 교회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어머니도 교회를 떠났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성도들의 교제도 전혀 없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 배운 것들을 거의 다 잊어버렸다. 주님과의 관계도 식어버렸다.
하나님의 부르심 주님은 나를 16세 때에 부르셨다. 그때 아버지는 병을 앓고 계셨는데 의사 말에 의하면 이제 가망이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아버지의 존재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울타리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잠자리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다시 주님께 헌신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를 모두 불러 모아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의 유일한 소망이시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을 듣고 하나님께 삶을 바치기로 결단했다. 그리고 밤새도록 아버지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울부짖었다. 다음날 아버지는 몸이 한결 좋아지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완쾌되어 암의 흔적도 사라졌다.
부모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서 친척과 이웃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려 했지만 그 당시 대중 집회는 불법이라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우리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친척들과 이웃, 그리고 친구들에게 우리 집에 올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지만 아버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자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도착하자 문을 잠그고 창문을 가린 다음, 지금까지 되어진 일들을 모두 설명하였다. 그들은 모두 기쁨으로 무릎을 굻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다.
나는 성경을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성경을 구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성경을 달라고 주님께 간구했다. 어느 노목사님을 찾아갔을 때 그 분은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울부짖으면 더 빨리 받을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그렇게 몇 달째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을 보여주셨고 실제로 성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처음 읽는 성경은 쉽지 않았지만 사전을 구해 한자 한자 찾아가며 열심히 읽었다. 마침내 성경전체를 다 읽고 난후 한 장씩 외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사도행전 12장을 외우고 잠자리에 들 무렵 누군가 내 어개를 두드리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윈, 내가 너를 나의 증인으로 서쪽과 남쪽으로 보내겠다.’
다음날 나는 부모님께 꿈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복음을 전하러 가겠다고 이야기 했다. 어머니는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으셨다. ‘저는 서쪽과 남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 거예요.’라고 대답하고 꿈에서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은 나의 사역의 첫 걸음이었다. 나의 갈 길은 지난 밤 꿈에 보여 주신 그대로였다. 이미 복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셨고 또 역사해 주셨다. 나는 덜링과 결혼하기 전, 혼인신고를 하러 등록 관청에 들렀다가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덜링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약혼 후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많은 않았다.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생각하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고난의 시작 1980년대 정부는 삼자애국교회(중국정부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애국운동이라는 명분 하에 외국의 교회들과 단절하고 공산당의 지도를 받도록 만든 공식적인 교회)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삼자는 ‘스스로 전도하고(自傳), 스스로 다스리며(自治), 스스로 자라게 한다(自養).’라는 의미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더 이상의 간섭이나 핍박을 받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때 현지 종교사무국과 공안부에서 종교별 위원장과 위원들을 선출할 작정으로 모두 초청하였다. 그러나 그 회의석상은 서로를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리가 되었고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치게 되었고 결국 그 곳에서 나왔고 이 사건을 통해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아야하고 가정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이리 저리 쫓겨 다니며 집회를 계속 열었고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많은 자들이 회심하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이미 시내의 거리와 버스 정류소에는 나를 수배하는 전단지가 붙어있고 현상금까지 걸려있었다.
어느 겨울 한 지역에서 집회를 마치고 동역자들과 신도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서 자기로 한 후 집회장을 나선 직후 마을 변두리에서 손전등을 든 십여 명의 사람들과 맞닥뜨렸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동역자들은 몸을 돌려 달아났기 시작했다. 나도 돌아서서 뛰려고 했으나 이미 전기봉에 맞아 감전되어 있었다. 공안원들은 나를 끌고 집회장소를 찾으려고 했다. 나는 감옥으로 보내졌고 그 안에서 숱한 고문을 받았다. 나는 난양으로 보내졌고 그곳 감옥에서 금식에 들어갔다. 사탄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유혹하기도 했지만 나는 말씀으로 즉시 기도하고 선포했다.
1983년 하반기부터 1984년 6월까지 허난 성에 극심한 박해가 몰아치는 동안 우리 교회도 모진 어려움을 당하였다. 수백 명의 사역자들이 체포당했다. 어느덧 금식한지 70일이 지나갔다. 그 기간 물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고 가족이나 교회 소식에 대해 받지 못했다. 금식한지 75일째 되는 날 새벽 나는 환상을 통해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다. 공안국에서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나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가족들을 오게 했다. 가족과 만나 자리에서 성찬식을 한 후 나는 금식을 마쳤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의 생활은 예전과 낫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죄수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복음을 전했고 새신자 교육을 시작했다. 어느 날 감옥소장이 나를 불러 특별임무를 부여했다. 한명의 사형수가 있는데 자살하겠다고 하며 다른 죄수들을 물어뜯기도 하는 성질이 괴팍한 사람을 같은 방으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사형수가 들어온 후 그를 인격적으로 대했고 우리들의 먹을 것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주님께서 그의 마음을 만지시는 것을 깨달았고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행집행 전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다음 날 그 형제는 편안하게 하늘나라로 갔다. 그 시간 나는 재판소로 향하고 있다. 나는 중노동이 수반되는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허난 성 남단의 도시로 후베이 성과 경계지역에 있는 신양 강제노동수용소로 옮겨졌다. 그곳의 생활은 무장 간수들로부터 감시를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는 곳이었다.
1984년 말 각자 새해 계획서를 보고하라고 하였지만 나는 무엇을 할지 몰랐다. 고민 가운데 성경구절을 통해 그동안의 생활이 흐트러져 있었음을 깨닫고 회개하였다. 어느 날 수용소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조금 수월한 일을 하는 장소로 배치를 받았고 얼마 후에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도 나는 복음을 전하는데 힘을 썼다.
1988년 출감을 3개월 앞두고 또 한 사건이 일어났다. 빌리 그레이엄목사가 중국을 방문하는데 그를 만나 나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편지가 와서 회답을 썼는데 내 대답이 수형제에게 도착하기 전에 공안국에 발각되었다. 수형제는 자신의 편지가 발각되었지만 빌리 그레이엄목사를 만나려고 아는 친구의 주선으로 만나기도 했지만 어느 공원에서 공안원에게 체포되어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 수형제는 3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1991년 풀려났다. 그 일로 나는 또 한번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88년 1월 나는 엄중한 경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83년 내가 체포되던 날 밤 “나는 하늘의 사람입니다. 주소는 복음 마을입니다.”라고 외쳤던 말이 사실이 되었다. 우리 마을은 진정한 복음의 마을이 되었다.
성령의 주유소 1998년 1월부터 1991년 중반까지 나는 중국 곳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1991년 4월 중앙정부는 삼자애국운동에 가입하기를 거부하는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전원 체포하겠다고 발표했다 나는 덜링이 꿈을 꾼 지 나흘 후에 집 밖에서 잠복하고 있던 사복 공안원에 체포되었다. 나는 끌려가면서 불순종하고 무례를 범한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했다. 이것이 두 번째 감옥에 간 것이다. 3년의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품행이 좋다는 이유로 2년만 복역하고 조기 석방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와 함께 마을 근처의 산에 올라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위해 기도 하기 시작했다. 금식기도를 시작한지 일주일이 흘렀는데 성령께서 내 귀에 주유소라는 단어를 들려주셨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사역자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 일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장로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교회를 향한 사역의 방향을 인도해 주시는 것을 느꼈고 첫 주유소에서 훈련받게 될 서른 명의 젊은 신도들을 2개월간의 기도 끝에 선발하였다. 훈련은 산 속 동굴에서 이루어졌다. 새로운 사역자들을 추수 밭으로 보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훈련프로그램이었다.
이 주유소에는 사무엘 선지자 훈련센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새벽5시 새벽예배를 시작으로 오후 5시까지 수업이 계속되었고 저녁에는 과제물을 했다. 그리고 학기 중에는 매일 성경을 읽고 한 장씩 암기해야 했다. 1개월이 지나자 대부분 마태복음 전체를 외울 수 있었다. 동굴에서 같이 지내는 동안 시기와 다툼이 있었지만 함께 기도하고 지내면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동굴에서 훈련하던 도중 식량이 떨어졌지만 믿음으로 주님이 공급해 주시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학생들이 잠자리에 든 후 지도자 몇 명과 함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주님은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지역으로 사역자들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라고 일러주셨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이 학생들에게 하자 그들은 모두 산 재물로 드리기로 다짐하고 헌신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각처에서 일꾼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교회의 장로들은 이들에게 안수하고 사역의 현장으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사역자들을 후원할 후원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미국인의 후원으로 사역자들에게 공급할 수 있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즈음 허난 성 남부와 안후이 성에 있는 많은 가정교회들이 주님을 향해 일어서기 시작했고 가정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부족한 성경도 공급해 주시면서 스칸디나비아 형제와 긴밀하게 묶어 주셨다.
화합의 길 1992년부터 이듬해까지 중국 전역에 훈련의 바람이 일어났다. 이 시기는 특별한 기간이었고 주님과 더불어 풍성한 결실을 맺는 기쁨을 누렸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사탄도 바쁘게 움직이며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를 했다. 모진 박해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유혹하려고 애썼지만 그럴 때마다 더욱 큰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1994년이 시작되면서 중국 가정교회 분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1980년대 개방을 하면서 외국 교회에서 들어온 성경책 이외에도 다른 책들이 오는 바람에 가정교회를 읽은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서로 다른 교리를 따르는 무리로 나뉘기 시작했다. 지도자간의 대화가 끊어졌고 사랑도 없어져 버렸다. 주님은 내게 가정교회들의 연합을 추진하라는 짐을 맡기셨다. 나는 동일한 비전을 가진 도자를 찾아 나섰다.
중국 최대 분파들 중 하나를 이끌고 있는 장 형제를 만나 연합의 비전을 말하자 그는 웃으면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속이 상했지만 주님께서 위로해 주셨다. 장 형제는 수 형제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서로 연락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나는 수 형제를 만나 선교의 비전을 이야기한 후, 가정교회들이 분열을 하면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자 그는 마음을 열고 함께 하기로 했다. 수형제와 그의 분파는 연합 운동의 첫 열매가 되었다. 나는 다시 장 형제에게 연락하여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13년의 세월동안 서로 교류를 하지 않았기에 두 분파는 자신들의 의견이 옳고 상대방은 신앙에서 이탈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급기야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연합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함께 있던 판 형제가 수 형제로 하여금 대야에 물을 떠다 장 형제의 말을 씻기도록 했다. 중국 가정교회 최대 분파의 지도자가 자신의 발을 씻기자 장 형제는 울음을 터뜨리며 수 형제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그렇게 함으로 13년간의 시기와 그릇된 소문, 그리고 쓰라림이 씻겨 내려갔다. 수 형제는 다른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연합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했다. 우리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시님’이 곧 중국을 가리킨다고 믿고 이 연합운동 기구를 ‘시님 연합’이라고 명명하였다.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사49:12 ; 중국어 성경에는 시님이 泰國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연합의 비전을 나누었다.
1996년 10월 ‘시님 연합’의 창립 장로로 다섯 명이 선정되었다. 11월에 상하이에서 공식적인 최초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으로 서로에게 놓인 장벽을 허물도록 하셨다. 이 연합운동은 지금까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세번째 체포 1997년 3월 허난 성의 성도인 정저우 시에서 열한명의 가정 교회 지도자들이 모이기로 했다. 그 모임에 미국계 중국인 자매가 초청을 받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공안원의 미행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몰랐고 이미 수 형제와 여러 지도자들이 아파트에 도착하기 전에 체포되었다. 나는 아파트에 도착하여 수 형제가 도착했는지 전화를 했다. 낯선 목소리였지만 도착했다는 소식에 올라갔는데 그곳에 무장한 공안원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혁대를 풀어 한사람씩 손을 묶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달아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결박당하기 전에 우리창 쪽으로 뒷걸음을 쳤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도망쳐! 라고 외치며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창문 아래쪽에도 공안원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나는 두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공안원들은 달려와서 사정없이 군화발로 다리와 가슴을 짓밟고 권총으로 두들겨 팼다. 급기야 전기봉까지 꺼내 고문하였다. 계속되는 구타로 뼈가 우스러지고 부러져 나갔다. 걸을 수 없었다. 우리의 체포 명령은 베이징 중앙정부에서 직접 하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가정교회 연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공안당국은 나를 처벌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했다. 내가 체포된 지 사흘 만에 공안원들은 내 고향 난양으로 급파되었고 대형집회가 열리는 현장을 목격하여 아내 덜링을 비롯하여 신원이 밝혀진 주요 지도자들을 감옥으로 끌고 갔다.
간수들은 부러진 다리를 연거푸 가격하여 내 다리를 부수었다. 심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오직 예수님과 그 분의 십자가 수난에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리절차가 끝나고 나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정저우 최고 보안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당국에서는 나를 독방에 넣었다. 내 방 옆에 수형제가 갇혔다.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아침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계속 구타를 당하고 심문을 당했다. 그때마다 나는 ‘예수님 구해 주십시오.라고 똑같은 외침을 반복했다. 나는 성경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 속에 있는 성경을 외쳤다. 내 입에서는 밤낮 찬양이 흘러나왔고 그 때마다 간수들은 노발대발하며 윽박질렀다.
이제 걷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수 형제를 비롯한 세 명의 그리스도인 죄수들이 나를 업고 고문실과 감방, 그리고 화장실에 데려다 주도록 명령하였다. 잠깐이지만 그 시간에 교제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짜 죄수까지 넣어두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기력을 잃어갔다. 그 때 아내 덜링도 여자 감옥에 갇혀있었다.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기적적인 탈출 나는 극한 상황에 몰리자 주님께 불만을 쏟아 냈다.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이즈음에 수 형제는 나에게 탈출을 해야 한다고 권했다. 1997년 5월 그날도 망가진 두 다리를 붙잡아 벽에 기대는 동안 통증이 온몸을 휘젓고 지나갔다. 이 자세는 내가 고통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방법이었다. 낙담과 절망에 빠진 내게 주님은 히브리서 10장 35절의 약속으로 힘을 주셨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 확신에는 큰 상이 달려 있습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두었다. 나는 예레미야가 했던 탄식을 되풀이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이때 나는 성경말씀이 또다시 인쇄된 종이에서 튀어나와 가슴속으로 뛰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예레미야 15:16-18절 말씀을 가지고 기도했다. 그리고 15:19-21을 읽자마자 놀라운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 덜링이 내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 몸에 상처를 닦아주고 약을 바르고 있었다. 아내는 내게 철문을 열라고 말한 후에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감방을 걸어 나갔다. 즉시 환상도 끝났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구원을 받을 시간이 되었다.“라고 하셨다. 나는 즉시 주님이 탈출하라는 뜻으로 환상을 보여주셨음을 알아차리고 옆방에 있는 수 형제에게 벽을 두드렸다. 이 감옥은 각 층마다 철문으로 봉쇄되어 있었고 간수가 2인1조로 철문 양쪽에 배치되어 있어 탈출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수 형제는 나에게 오더니 ‘형제님 탈출해야 합니다.’라고 명령했다. 나는 최대한 빨리 바지를 끌어당겨 입고 요한복음과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적은 휴지조각을 허리에 묶고 기도를 했다. 1997년 5월 아침 8시면 하루 중 탈출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시간이었다. 나는 발을 질질 끌며 복도 끝에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호흡을 하면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에 정신을 집중했다. 내가 철문에 도착했을 때 무성 형제가 들어오고 있을 때 문을 닫지 못하도록 하고 나는 빨리 그 문을 나섰다. 계속 2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아무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마당에는 많은 간수들이 있었지만 나는 천천히 걸어서 정문을 통과하였다. 정저우의 최고보안감옥을 빠져 나와 도로에 서 있었다.
택시를 타고 신도의 집에 도착하였고 다시 은밀한 장소에 기거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감옥에서는 나를 찾기 위하여 모든 교차로를 차단하고 검문을 하였고 정저우시를 집집마다 다니면서 수색하였다. 나를 찾기 위해 탐지견까지 동원하였지만 주님은 폭우를 통하여 나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셨다. 어느 날 기도 가운데 주님은 중국을 떠날 것을 말씀하셨다.
1997년 9월, 나는 베이징발 프랑크푸르트행 에어 차이나 편으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주님은 공항에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검사대에서 관리는 내 여권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웃으면서 나의 여권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누구인지를 알아내려는 듯이 나를 쏘아보았다. 뒤에서 기다리던 승객들이 관리를 질책하자 나를 제쳐두고 다른 사람들의 절차부터 진행을 하였다. 그 관리는 내 여권이 아니기 때문에 독일에서 다시 쫓겨 올 것이라고 말하고 스탬프를 꺼내 찍어주었다. 하나님께서 관리의 마음을 통제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도록 만지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비행기에 탑승하고 이륙하자 큰 소리로 찬양을 하였다. 약 10시간 후 독일에 도착하여 입국 심사대로 갔다. 독일 관리는 내 여권을 보자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고 다른 심사대에 있던 관리들도 나와 여권을 번갈아보더니 확신한 듯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하나님의 뜨거운 불을 품고 담당관리를 심판의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며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독일 생활은 난민 수용소에서 시작하였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어 세계 곳곳에 집회를 통하여 중국 가정교회가 처한 상황을 알리고 함께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사역하고 있다.
백 투 예루살렘 1995년 중국 중부의 한 가정교회 집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이미 주님은 힌두교도, 불교도, 무슬림들의 땅에 중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선교사로 보내시려는 계획 속에 나를 부르셨다. 나는 그 집회에서 백 투 예루살렘에 기록된 찬송을 불렀다. 한창 노래를 부르는데 청중 속에서 한 노인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노인은 짜오 시몬이라는 사역자로 48년 전 백 투 예루살렘을 시작한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만난 후에 이 비전은 나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백 투 예루살렘은 단순히 예루살렘을 주된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은 2천년 전 복음이 출발한 곳이며 복음이 온 세계를 한 바퀴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갈 것으로 믿고 있다. 오로지 예루살렘 성을 복음화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수많은 미전도 종족 그룹, 도시 마을까지 복음으로 덮는데 있다.
몇 년 전에 시님 연합의 지도자들이 백 투 예루살렘 선교에 참여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한 적이 있다. 각 가정교회 분파별로 훈련을 거쳐 외국으로 파송할 수 있는 선교사의 수를 제시했다. 모두 합쳐보니 10만 명이었다. 앞으로 10만 명의 선교사를 중국 밖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시작되는 주요 실크 로드에는 시제로 세 갈래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하나는 시안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길로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두 번째는 티베트를 통과해 히말라야 산맥과 부탄, 네팔을 넘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으로 향하다가 예루살렘으로 이르는 대로와 연결된 길이다. 세 번째는 중국 남서부를 통과하는 길로 이 지역에는 오늘날 미전도 소수종족의 대다수가 살고 있다. 베트남을 향해 남으로 가다가 서진하여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인도로 뻗어 같이 길은 특히 불교와 힌두교가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곳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 가지 경로를 따라 복음을 들고 나가기를 원하신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미 성령께서는 몇몇 분파들을 부르셔서 특정 지역에 초점을 맞추어 사역하라고 이르셨다.
한편 우리는 과거 30년간 가정교회가 받은 고난과 박해와 고문이 하나님의 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주님은 우리가 선교사로서 무슬림, 불교도, 힌두교도의 세계로 가기에 적합하도록 철저히 다듬으셨던 것이다.
나는 1997년 중국을 탈출한 이후 백 투 예루살렘 선교사들을 훈련하고 이 운동을 추진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다. 2000년 3월 이 운동의 최초 선발대인 39명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출발했다가 36명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비전을 잃지 않고 집에 돌아와 기도하던 중 다른 경로로 국경을 넘는 방법을 찾기도 했다.
백 투 예루살렘 선교사들은 다양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주님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견디는 방법, 주님을 위해 증언하는 방법, 주님을 위해 탈출하는 방법 등이다. 여기에 수갑 풀기, 부상을 입지 않고 2층 참문에서 뛰어내리기 등을 가르친다.
시님 연합의 장로들은 하나님이 나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중국에서 탈출시키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를 연합의 공식 대표로 지명해 전 세계를 돌며 가정교회를 위해 증언하도록 했다. 나는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이 앞으로도 내 사역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 세계를 돌며 수많은 교회와 집회에서 강연을 계속하고 있다.
출처 | 하늘에 속한 사람 정리 |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