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2  통권 274호     필자 : 김종건
[중국기독교회사]
산동 교안과 의화단운동

청일전쟁과 열강 침략의 고조
청일전쟁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은 특히 산동 지역에서 반외세운동을 크게 자극하였고, 각 지역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은 청조가 그동안 조공국의 하나로 괄시하였던 일본과 전쟁이었고, 결과적으로 참패를 맞게 됨으로써 1860년대 이후 청조가 야심 차게 추진한 양무사업, 특히 군사력 근대화와 해군 육성의 성과가 없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또한 전선이 조선에서 시작되었으나 요동과 산동으로 일본군이 침략 압박함으로써 청조 당국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들이 일본의 실력을 직면하고 상대적으로 청조의 무기력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일본에 의한 요동 이권 강탈 시도, 이른바 삼국간섭, 즉 러·프·독 3개국에 의한 일본의 요동 이권 강탈 저지, 1897년 독일의 교주만(膠州灣) 조차 및 산동 이권 강탈, 영국의 위해위(威海衛) 조차, 러시아의 요동 여순(旅順)과 대련(大連)항 조차 등은 산동 지역에서 외세 침입에 대한 위기의식을 극단적으로 고조시켰고, 외세에 대한 저항력의 결집을 자극하였다.

조·단현 교안과 거야 교안
1896년 산동 서남부에 있는 조현(曹縣)과 단현(單縣)에서 교민과 일반인 간의 분쟁이 일어났고, 교회의 교민 비호에 맞선 주민들이 인근에서 활동하던 비밀결사 대도회(大刀會)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교회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이는 이후 인접한 각 지역에서 반외세 활동 및 반교회 활동을 자극하였고, 산동 지역에서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의 확산을 가져오는 선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897년 11월 1일 밤, 산동성 조주부(曹州府) 거야현(鉅野縣) 마반장장(磨盤張莊) 교회에서 독일 성언회(聖言會, Steyler Seminar, Society of the Divine Word) 소속 선교사 2명이 정체불명 괴한들의 침입을 받아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거야 교안(鉅野敎案), 장장 교안(張莊敎案), 조주 교안(曹州敎案)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독일은 자국의 극동함대를 산동반도 동남의 교주만에 진입시키고 자국군을 상륙시켜 부근 일대를 점령했다. 독일의 교주만 영유에 대해 이듬해 봄, 청 조정은 이를 공인하였다. 이후 러시아,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 잇달아 중국 내에서 자국의 세력 범위를 획정했다.

1897년 거야 교안과 이에 이은 독일의 교주만 조차는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산동 지역 반교회·반외세 역량의 적극적인 활동을 자극하였으며, 나아가 산동 의화단운동의 본격적인 전개를 가져오는 주요 계기를 만들었다. 

관현 교안과 의화권의 등장
산동 중서부 관현(冠縣)의 이원둔(梨園屯)에서 옥황묘(玉皇廟)에 교당을 건립하는 문제를 두고 1860년대 말부터 비롯된 교민과 주민 간 갈등이 거듭됐다. 처음에는 ‘6대원(大寃)’이라 불리는 현지 지도급 인물이 나서서 소송을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나, 이것이 실패한 뒤에는 하층민이 대부분인 ‘18괴(魁)’가 나서서 실력으로 옥황묘에 교당이 건립되는 것을 막는 투쟁으로 전환하였다. 교민과 일반 주민 간 의견 조정으로 사건 해결이 가능한 듯했으나 선교사의 개입으로 수시로 사건이 확대됨과 더불어 반교회 활동의 대오 규모와 강도도 높아져 갔다. 1897년 이후에는 외지에서 권법을 수련한 대규모 비밀결사 권민(拳民)들을 불러들여 강력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였으나, 청조는 회유를 위주로 한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해결책을 펴 나갔다.

관현 의화권이 전개한 반교회 활동은 교당 건축을 두고 벌인 30여 년에 걸친 교민과 비교민 간 분쟁의 과정에서 참가 구성원의 증대와 다양화, 활동 범위의 확장, 무장투쟁으로의 발전 등의 양상을 보임으로써, 이후 1899년 평원 일대의 반교회 활동을 비롯한 이후의 반외세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나아가 1900년 화북 전역에서 의화단운동이 전개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평원 교안과 의화단운동의 확산
1899년, 즉 광서(光緖) 25년에 산동성 서부 평원현(平原縣)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교회 활동이 전개되었다. 평원현 반교회 활동에서는 광범한 민중의 참여와 함께 주홍등(朱紅燈)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기 시작하고, 전투력을 강화하여 조직적인 전개를 보일 뿐만 아니라 사건 과정에서 지배층의 역량을 이용하는 등 특징적인 형태를 보인다. 규모에서도 2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중이 참여하고, 인근 지방의 세력도 합세하여 결국 산동 서부 지역 일대에 널리 확대됨으로써, 지현(知縣), 통령(統領), 순무(巡撫)가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산동 당국의 의화단에 대한 대응이 더 구체화하면서 의화단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었고, 마침내 그 주력은 직예 등 화북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후 의화단의 활동이 단순히 교회 공격을 넘어 철도 파괴 등을 포함하여 열강 세력에 대한 구체적이면서 포괄적인 반대를 하는 내용상의 변화를 보였다. 그러므로 평원현 반교회 활동은 산동 지역에서 시작된 의화단운동이 화북 전역을 무대로 하는 본격적인 반제국주의·반외세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의화단운동의 발생 관련 쟁점
첫째, 19세기 산동 지역에서 전개된 반교회 활동과 의화단운동의 발생 배경을 교회의 선교 활동 내지는 그와 관련된 문제점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반교회 활동들은 당시 자연재해, 실업 위기, 지방관·군의 부패 타락, 세금·소작료·고리대의 압박, 보수적인 유가 전통, 민간 무술수련의 전통, 백련교계 신앙의 유행 등의 독특한 요소와, 1890년대 중반 이후 산동에 진출하기 시작한 열강 세력에 대한 위기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였다. 

둘째, 의화단운동 발생 시기 문제이다. 의화단운동은 중국 역사상 다른 민중운동과 달리 통일된 조직 없이 국지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므로 운동의 개시 시기를 설정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의화단운동을 민간 무술수련 조직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민중이 중국을 수호하기 위해 외세와 서양교회를 몰아내려 한 운동이라고 전제한다면, 그 단서를 1896년 대도회의 조·단현 일대 반교회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 산동 의화단의 조직 기원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백련교계 비밀결사의 계보로, 구체적으로 관리된 것도 아니고, 단련으로 조직 운영된 것도 아니었다. 각 조직이 백련교 계보로 구체적인 통제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현실 부정이나 정권 교체의 지향 등도 구체화하지 않았다. 단련 지도자들이 반교회 활동 진압 과정에 빈번히 동원되고, 의화단이 정부 병력과 교전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의화단이 공인된 단련 조직으로 운영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단련 조직을 통한 향촌 자위의 전통과 백련교계 비밀결사의 신비적 요소와 민간의 무술수련 전통이 사안마다 독특하게 결합하여 반교회 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가운데 의화단운동이 구체화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19세기 후반에 교회의 산동선교가 활발해지면서 교회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과 저항이 반교회 활동으로 표출되었고, 거기에 민간 자위 수단으로서 단련의 전통과 민간의 무술수련이라는 요소와 민간 종교의 미신적 색채가 가미되어, 그 대오가 조직화하고 산동 의화단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 사진 출처 및 설명 | 주홍등(朱紅燈) | 朱红灯图片_百度百科>주홍등 사진 캡처 [2025.5.30. 접속함]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