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성심회
19세기 후반 중국에 새로 진출하여 선교에 동참하는 수도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 Congregation of the Immaculate Heart of Mary, CICM)는 벨기에 신부 데오빌 페르비스트(Theophile Verbiest, 1823-1868)가 1862년에 수도 브뤼셀 교외의 슈트벨드(Scheutveld)에서 창립하였고, 슈트벨드회(斯構德會)라고도 불리었다.
1865년 페르비스트는 세 명의 신부들과 함께 중국으로 출발하여, 이듬 해에 내몽고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여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고, 1868년 순회 선교 중에 노호구(老虎溝)에서 사망하였다.
성모성심회는 이후 견사회(Congregatiion of Mission)를 대신하여 내몽고 대목구에서 선교 활동을 분담하여 선교 활동 범위를 확대해 나갔으며, 네덜란드와 벨기에로부터 많은 선교사가 추가로 와서 성모성심회의 선교 사업에 참가하였다. 1878년에는 감숙성으로 들어가 선교하였고, 1884년에는 신강에 들어가 선교하였다.
선교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내몽고 대목구 역시 그해에 세 개의 대목구로 나뉘어졌고,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선교사가 112명으로 늘어나고 중국인 신부도 18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은 서만자에 중국인 신부 양성을 위한 수도원도 설립하였고, 각 교당에서 남녀학교를 운영하였는데 1888년에는 40여 개 학교를 운영하였다.
밀라노외방전교회와 어거스틴회 밀라노외방전교회(米蘭外方傳敎會, Pontificio Istituto Missioni Estere)는 185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주교 라마쪼티(拉马扫蒂, Ramazzotti, 1800-1861)와 마리노니(马里诺尼, Marinoni)의 주도로 설립되었고, 1865년부터 중국 선교를 시작하여 하남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어거스틴회(奧斯定會, Augustinian Order)는 명말 1575년부터 필리핀을 경유하여 중국 복건 지역 선교를 위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성과를 내지 못하다가 1860년 마침내 광주에 선교 거점을 확보하여 중국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후 호남성으로 진출하여 상덕(常德), 풍주(灃州), 악주(岳州) 등지에 교구를 설립하며 선교 활동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성언회 성언회(聖言會, (L) Societas Verbi Divini, SVD; (E) Divine Word Missionaries)는 1875년 독일인 신부 얀센(A.Jansen, 1837-1909)이 네덜란드 스타일르(Steyle)에서 창립하였고, 1879년 중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성언회는 산동 남부의 연주(兗州), 조주(曹州)와 기주(沂州) 지역으로 선교 영역을 확장해 나갔고, 1885년에는 노남대목구(魯南代牧區)의 분립을 성사시켰으며, 당시 교인 수는 3천여 명에 달했다.
초대 대목주교 안저(安若瑟, 또는 安治泰, Johann Baptist von Anzer, 1851-1903) 주교가 1886년 양곡현(陽谷縣) 파리장(坡里莊) 교당에서 취임한 뒤 성언회의 산동 선교는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후 제녕(濟寧)으로 진출하여 성언회의 선교 중심을 삼았고, 19세기 말에는 산동대목구였던 청도(靑島), 즉묵(卽墨), 교주(膠州), 고밀(高密), 제성(諸城) 등 지역도 노남대목구에 편입시켰으며, 교인 수도 2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수녀회들 19세기 후반 중국에 새로 진출하여 선교에 동참하는 수녀회들도 급격히 늘어났다. 1948년에 프랑스 인애회(仁愛會),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沙爾德堡聖保羅女修會, Soeurs de Saint Paul de Chartres) 등이 홍콩으로 진출하여 고아원, 학교, 병원을 세워 운영하고 빈민들을 구제하면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860년대에는 이탈리아 카놋사 수녀회(加諾撒仁愛女修會, Canossian Daughters of Charity), 프랑스 증망회(拯亡會, 拯望会, Society of Helpers of the Holy Souls, 약칭 Society of Helpers) 등 수녀회가 홍콩과 상해를 교두보로 중국으로 들어와 각지로 확산하면서 선교를 전개하였다.
중국 천주교회의 성장 19세기 후반 천주교 선교의 확산과 더불어 중국 천주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맞았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내지 선교의 자유가 확산된 지 10년 만인 1870년 전국 천주교 교인 수는 37만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1885년에는 교인 수가 558,980명으로 늘어나고, 35명의 주교, 453명의 외국 선교사와 273명의 중국인 신부들이 활동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1897년 로마전 신부의 통계에서는 중국 천주교 교인 수가 532,448명이고, 유럽 선교사가 759명, 중국인 신부는 409명이라고 했다.1)
로마 교황청은 중국 천주교의 성장에 따라 중국 교회 조직도 개편해 나갔다. 1846년 중국을 10개 교구로 구획하고, 마카오, 북경, 남경 등 3개의 주교구와 섬서, 산서, 산동, 호광, 강서, 운남, 홍콩 등 7개의 종좌대목구(宗座代牧區)를 설치하였다. 로마 전신부는 대목구 단위로 수도회별 선교 책임을 맡겼다.
1870년 로마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중국을 5대 선교구로 나누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1879년 마침내 다음과 같이 다섯 선교구가 정식 획정되었다. 제1선교구는 직예, 요동, 내몽고, 제2선교구는 산동, 섬서, 하남, 감숙, 제3선교구는 호남, 호북, 절강, 강서, 강남, 제4선교구는 사천, 운남, 귀주, 서장, 제5선교구는 광동, 광서, 홍콩, 복건 지역을 관할하는 것으로 구획되었다. 각 선교구는 5년마다 소속 선교회 대표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교무를 처리하였다.
중국 선교의 성장에 따라 로마 교황청이 중국 교회에 지원하는 선교 경비도 1867년 637,000프랑이던 것이 1882년에는 861,000프랑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각 수도회의 선교 경비 상당 부분은 중국 현지에서도 조달되었다. 많은 수도회가 확보한 부동산 임대 또는 경영 수익은 교회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미주 1) 이상 통계는 K.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p.329 참조.
사진 설명 | 안저(安若瑟 또는 安治泰) 초대 대목주교 주교 사진 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