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kaoTalk_20220303_202545364.jpg) 양광선의 선교사 공격 황실의 후원과 존중을 받던 아담 샬(Johann Adam Shall von Bell, 1591-1666)은 이른바 역법투옥(曆法投獄)사건으로 만년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양광선(楊光先)은 1660년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 아담 샬이 서양 역법을 빌미로 중국 13개 성(省)에 사교(邪敎)의 교당을 개설하는 등 정치적 음모가 있어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아담 샬 등 선교사들을 총애하던 순치제(順治帝)는 이 상소를 수용하지 않았지만, 양광선이 주도하는 서양 역법 관련 교회 공격은 1665년까지 이어지며 선교사와 교인들이 대거 투옥되는 사건으로 발전한다. 역사적으로 이를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이라고 한다. 1661년 순치제가 서거하고 6세에 불과한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뒤 조정 실권은 상대적으로 서양 문화에 덜 우호적인 오보이(鰲拜) 등 4명의 보정대신(輔政大臣)의 손에 넘어갔다. 1664년 9월 15일 양광선은 다시 선교사들의 죄상을 거론하며 사교를 폐하고 서양교회 관련자들에 대한 의법 처리를 요구하였다. 그는 흠천감 하관정(夏官正)이던 천주교도 이조백(李祖白)이 쓴 《천학전개(天學傳槪)》에서 예수 강생과 천주교의 중국 전파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저자 이조백과 서문을 쓴 어사 허지점(許之漸) 등의 죄를 논함과 동시에 아담 샬 등 서양선교사들의 반역 죄상을 다시 거론하는 〈청주사교장(請誅邪敎狀)〉을 예부(禮部)에 올렸다. 이 상소에서 그는 아담 샬 등 서양 사교 세력들이 역법 수정을 빌미로 성행하여 중국 정삭(正朔)의 권위를 침범하였고, 이조백이 쓴 요서(妖書) 《천학전개》에서는 동서양 모든 나라가 사교의 자손이며 사서육경(四書六經)도 사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하는 등 중국에 반역하는 죄상이 분명하므로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법 관련 투옥 오보이는 양광선의 상소에 근거하여 1664년 9월 24일 아담 샬과 루도비커스 부글리오(Ludovicus Buglio, 利類思 1606-1682),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1688), 가브리엘 마갈랜스(Gabriel Magallaens, 安文思, ?-1677) 등과 중국 관원 이조백, 허지점, 반진학(潘進學), 허겸(許謙) 등도 체포하였고, 다음 날부터 소관부서인 예부와 이부(吏部)에서 이들에 대한 심문이 있었다. 아담 샬은 당시 이미 73세의 고령에 중병을 앓고 있었기에 페르비스트가 대신 나서서 양광선의 공소 사실을 하나하나 반박하였다. 1664년 12월 27일 예부는 아담 샬의 모든 직책을 파하고 다른 선교사들을 형부(刑部)로 넘겼다. 1665년 1월 4일 선교사 4명이 쇠사슬에 묶인 채 형부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15일에 형부는 역모죄로 아담 샬에게 교수형, 나머지 서양선교사들에게는 각각 장(杖) 100대와 추방형을 내렸다. 마침 1665년 1월 16일 수도 북경에 일식(日蝕) 현상이 나타나 신구 역법 중 어느 것이 옳은지 가늠할 좋은 기회가 왔다. 보정대신과 각부 대신, 흠천감 양광선, 페르비스트 등이 함께 관상대(觀象臺)에 나란히 서서 그 결과를 지켜보았는데, 당연히 페르비스트의 예측이 맞았다. 양광선은 크게 당황했지만 〈일식천상험(日食天象驗)〉을 기술하여, 신역법 수정에 관해 계산상 잘못을 거론하는 대신 선교사의 정치적 음모를 집중 부각시키는 논리를 이어갔다. 4월 중순 조정은 아담 샬의 모든 직위와 봉호(封號)를 박탈하는 한편 아담 샬과 이조백 등 흠천감 관원 5명을 능지처사(陵遲處死)하고 또 다른 5명을 참수(斬首)하기로 처결하였으며, 마갈랜스, 부글리오, 페르비스트 등 신부 5명은 변경 충군으로 판결하였다. 아울러 천주교의 전파를 금지하고 신역법을 폐기하는 대신 구역법을 부활시켰다. 역법투옥 관련 처결 아담 샬 등에 관한 판결 결과는 4월 16일 황제와 황태후에게 전해졌는데, 마침 이날 북경에 대지진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죽고 가옥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혼란 중 보정대신들이 아담 샬 사건을 태황태후(太皇太后) 즉 순치제의 모친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에게 보고하였다. 태황태후는 천문을 바로잡는 등 공이 커서 앞선 황제가 특별히 신임하던 아담 샬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질책하였고, 어떤 죄가 있는지 재조사하도록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에게 하명하였다. 5월 17일 역법투옥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아담 샬 등 선교사들은 무죄로 풀려나고 이조백, 송가성(宋可成), 송발(宋發), 주광현(朱光顯), 유유태(劉有泰) 등 5명의 천주교도 감관(監官)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나머지 신도들과 중국 관리 허계증(許繼曾), 동국기(佟國器), 허지점 등은 파직되었다. 아담 샬은 출옥 뒤 남당에 거주하도록 허락받았으나 양광선이 사주한 폭도들이 난입하여 순치제가 하사한 ‘통현교사(通玄敎師)’ 편액을 부수는 등 난동이 일자 동당으로 옮겨 지내다가 이듬해 8월 15일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담 샬은 29세에 중국으로 와서 39세에 북경 사역을 시작하였고 조정에서 흠천감 등 관직을 맡아 30여 년 동안 봉직했다. 그는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 《항성표(恒星表)》, 《교식역지(交食曆指)》, 《신발역인(新發曆引)》 등 저술을 남기며 중국 천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또한 《주제군징(主制群徵)》, 《주교연기(主敎緣起)》, 《진복훈전(眞福訓詮)》 등 천주교 관련 저술을 통해 명말청초(明末淸初) 중국 천주교회의 선교 기반 확립에도 기여하였다. 양광선과 흠천감 역법투옥사건을 주도한 양광선은 1665년 흠천감 감정(監正)에 임명되고 오명훤(吳明煊)은 감부(監副)를 맡았다. 양광선이 역법 옥사를 일으킨 것은 천주교를 반대했기 때문이지만 정작 그 자신은 역법에 능통하지 못했다. 그는 흠천감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오명훤에게 역법 관련 모든 사무를 주관하게 했다. 1668년 양광선이 《칠정민력(七政民曆)》을 진상하자 페르비스트가 그 책 중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였고 친정에 나선 지 겨우 일 년 된 강희제는 페르비스트, 부글리오, 마갈랜스 선교사 등과 흠천감의 마우(馬佑), 양광선, 오명훤 등 관리들을 동화문(東華門)에 모이게 한 뒤, 중국 역법과 서양 역법을 서로 비교하여 최선의 역법을 완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대학사 도해(圖海)를 비롯한 20명의 대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문에 관한 논쟁을 벌인 결과 페르비스트를 대표로 하는 서양 역법이 대승을 거두었다. 1669년 3월 8일 강희제는 역법 문제를 논의하는 회의를 소집하여 양광선을 파직하고 그 죄상을 낱낱이 조사하도록 하는 한편 페르비스트를 흠천감 감부로 임명하였다. 1669년 8월, 페르비스트는 상소하여 아담 샬의 누명을 풀어 줄 것을 청원하였고, 강희제는 아담 샬의 ‘통미교사(通微敎師)’ 칭호와 원래의 품계를 복원하였다. 또 은 525량을 하사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예부 관원을 아담 샬 묘지로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어제(御製) 제문에서는 아담 샬이 서역에서 건너와 천문에 통달하여 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했음을 강조하며 애도하였다. 아담 샬 이외에 목숨을 잃은 관리들과 파직된 자들도 원직으로 회복되었다. 양광선은 무고 반역죄로 참형이 내려졌지만, 고령인 점이 참작되어 원적 귀향 조치 되었고, 귀향하는 도중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리하여 그가 주도한 역법투옥사건은 막을 내렸다.
사진설명 | 양광선의 초상화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