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  통권 220호     필자 : 왕빈
[선교나침반]
중국적인 ‘선교적 코뮤니타스(Missional Communitas)’를 꿈꾼다

요즘
중국교회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사무조례의 전방위적인 적용과 시행, 교회 성장에 순기능을 해온 수많은 선교사들의 비자발적 철수, 코로나19 팬데믹까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중국교회는 오히려 확장성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 비해 모임을 자유롭게 갖기 어렵지만 온라인상에서는 연대 의식이 더욱 강화되고 중보기도의 열기 또한 뜨겁다. ‘선교중국 2030(2030년까지 2만 명의 타문화권 선교사를 파송하자는 중국교회의 결의)’를 향한 목회자와 성도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하나가 되고 있다. 이 거룩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온라인상으로 협력이 이뤄지고 서로의 뜻을 나눌 뿐 아니라 선교중국 2030을 위한 선교사 후원 대열까지 손쉽게 이뤄지고 있다. 교회의 다음 리더십을 세우는 데도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는 등 시공간을 초월하는 중국교회의 노력이 돋보이고 있다. 일정 신분 노출을 감수한다고 해도 자민족 전도를 넘어 세계복음화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고 중국교회 내부에 정통한 소식통이 전해올 정도다. 

이는 중국교회와 초대교회가 오버랩이 되는 지점이다. 초대교회의 경우 박해기에 잠시 움츠려든 적이 있었지만 결국 확장해나갔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1∼2세기 당시 로마제국은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천들을 열등 종교, 철학을 신봉하는 하찮은 부류로 여겼다. 로마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수많은 신과 다양한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의 부상은 불가사의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런 기독교가 훗날 공인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과거 필자가 읽었던 최종원 박사의 ‘초대 교회사 다시 읽기’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최 박사는 기독교적인 사랑, 인권과 평등사상, 내세관 등 세 가지를 들어 설명했다.
 
“기독교에서 보여주었던 사랑은 차원이 달랐다. 기독교의 박애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던 것이 초대교회부터 실천됐다. 당시 가난한 자들과 고아, 과부를 돌보는 구제사역을 교회가 담당했다. 로마인들은 사람을 지칭할 때 오직 남자, 성인, 자유인만을 의미했다. 여성이나 미성년자, 노예는 사람의 범주에 들지 못했다.” ‘움직이는 가구’로 불리는 노예(하인)를 고쳐달라고 예수를 찾아온 로마 백부장과 같은 모습은 당시의 신분제(,) 사회적 상황에서는 정상이라고 여길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노예와 여성을 동등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고 교육하는 크리스천들의 사회 안전망 역할은 일반인들은 물론 상류 계층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었을 정도로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서 부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러면 대안적 인간관, 사회관을 보여주었던 초대교회로부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중국교회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런 점에서 중국적인 ‘선교적 코뮤니타스(Missional Communitas)’를 제안하고 싶다. ‘코뮤니타스’라는 용어는 문화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 박사에게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잠비아 은뎀부 부족의 성인식 전통에서 이 용어를 생각해냈다. 은뎀부 부족은 한계 위기의 상황에서 삶의 비결을 터득하도록 극한 훈련을 거치게 한 뒤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터너 박사는 계층의 단절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그들만의 의식을 치르면서 불균형과 서로 간의 단절을 회복하고, 다시 서로가 남남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 행위를 코뮤니타스라고 명명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 누군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절박함이 안전함에 안주하지 않고 위험과 장벽을 넘어서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며 미래를 준비하게 할 것이다. ‘선교적 코뮤니타스’는 예배와 제자 양육(제자도), 공동체, 선교(전도)라는 교회의 주요 기능을 강화시킬 수 있다. 특히 선교적 교회를 꿈꾼다면 선교와 전도를 핵심으로 한 예배, 제자 양육, 공동체가 존재해야 한다. 그럴 때 위험한 선택을 통해 ‘선교적 코뮤니타스’를 목격할 수 있다. 일정 환경이 뒷받침해주기 때문에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힘에 부치도록 열심히 선교를 하다 보니 교회의 내연은 단단해지고 외연까지 넓혀지는 것이다. 끊임없이 세상 속 크리스천으로서 복음전파의 한계 상황을 극복해나가면 선교적 코뮤니타스의 꿈은 실현될 것이다. 

중국교회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복음의 원리에 충실하고 순례자의 영성을 갖고 적극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의 공동체, 선교적 코뮤니타스로 쓰임을 받도록 모드를 전환할 때이다. 미래는 수많은 어제들이 모여 오늘의 연장선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과거에도 비대면 사역이 있었고 미래에도 대면사역이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교회로 하여금 목회자 관점이 아니라 성도 관점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했다고 생각한다. 재미, 감동, 위로, 경험, 정보, 보상이라는 6대 가치를 제대로 융합시킬 때 콘텐츠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클릭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지듯이 중국교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각각 강한 콘텐츠를 구성해 크리스천과 비기독인 각각의 마음을 움직이는 코뮤니타스를 실현하면 현재의 시련은 내일을 위한 걸음이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혁신을 얼마든지 가능하게 하고, 설령 시행착오를 겪는다고 해도 용납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더 멋진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지혜는 복음대로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의 몸부림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중국교회가 돼야 한다. 그때 교회는 낡은 전통에 만족하지 않고 시대적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전통을 존중하되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크리스천 삶의 보편성, 복음의 공공성과 총체성, 문화 변혁의 선도성과 공동체성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면서 용기와 도전정신을 갖고 중국적인 선교적 코뮤니타스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중국의 크리스천들은 늘 경계적 삶을 살아가는 사명자의 공동체 일원이 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올 한해 안전에만 매몰되지 않고, 복음의 선교적 동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두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중국교회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모험적인 사명과 열정적인 제자도를 만들어가는 이들이 계속 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교회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을 때가 위기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인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그것에서 모든 처방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중국교회도 인정하기를 바란다. 

선교적 코뮤니타스는 크리스천의 삶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크리스천의 삶을 하나님의 선교에 맞추는 공동체이다. 불안과 두려움은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존재방식과 교회의 목적 실현으로 더 이상 중국 크리스천을 어렵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함으로 모험의 바다에서 항해하면서 세상을 회복시키는 소중한 대안 공동체가 곧 중국교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의 양식과 존재가 곧 이것이었음을 잘 드러내면 그것으로 만족하기를 바란다. 그 결과는 열매로 이어질 것이기에 걱정할 필요 없다. 초대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일상과 영성이 함께 숨 쉬는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었다. 내적 자체만을 목적하지 않고 끊임없이 외적 사회적 공동체에까지 나아갔던 것처럼 중국 크리스천들의 모험심과 용기가 ‘거룩하면서도 위험한’ 중국교회의 미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왕빈 | 중국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