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3  통권 205호     필자 : 김종건
[중국기독교회사]
루지에리 중국선교의 성격과 의의

루지에리 중국선교의 성격
루지에리는 중국선교 사업의 실제적 개척자이며 중국 내륙에 들어가서 선교 사역을 진행한 첫 번째 선교사였다. 그는 사비에르와 발리냐노의 동방선교전략을 계승하면서 적응성 선교전략의 기본 원칙을 세워나가는 기본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아쉽게 조기에 유럽으로 귀환하였지만, 그의 선교 성과는 그의 뒤를 이은 마테오 리치에 의해 본격적인 체제 개편과 방향 정립을 이루며 선교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다. 그의 중국선교에서의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예수회 선교사들의 동방선교와 관련된 선행 사례를 적절히 계승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로서 중국선교에 처음 주목한 사비에르는 타종교를 무조건 배척하던 기존의 선교 관념에서 벗어나, 동방의 종교와 문화에도 진리가 있음을 깨닫고, 천주교의 교리를 중국이나 일본의 종교와 결합시키려고 시도한 선구자였다. 발리냐노는 서양인으로서의 문화적 우월감을 스스로 떨쳐 버리고 중국 문화에 적응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중국선교가 중국에서 고유의 문명을 훼손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되며, 중국의 정치와 사상에 대해 도움을 주는 작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뒤를 이은 루지에리는 사비에르와 발리냐노의 새로운 선교 관념을 기본적으로 계승하였다. 그는 조경(肇慶)에서 중국 관원들과 교제하던 중 서방선교사들에게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말살하지 말고 그들에게 없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초자연적인 경지를 보완해 주도록 강조하였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와 중국 고대사상과의 일치하는 점들을 부각시킴으로써 기독교와 중국 고대 유가사상과의 만남의 장을 선구적으로 열었다.

둘째, 중국 현장선교의 과정에서 적응성 전략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적응성 선교전략은 우수한 중화 문명에 대한 충실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기초가 성립되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5가지 내용을 포괄한다.

(1) 중국 현장선교의 초기 단계에서 그는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공개적인 방식으로 교리를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제의 대상이 되는 사대부와 관리들에게 집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 지배층을 지휘하고 있는 황제의 허가를 얻는 것이 중국에서 자유로운 선교의 토대를 마련하는 관건임을 절실히 인식하게 되었고, 그의 선교활동 후반부는 여기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국의 정치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선교전략 수립의 대표적인 면모이다.

(2) 그는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전개하면서 선교 방식도 전환하였다. 대규모로 영세를 주어 기독교에 귀의시키고자 하는 당초의 열망을 수정하여, 중국인들의 저항을 유발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제하는 평화적 접근 방법으로 전환하였다. 아울러 저술을 통해 지식인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썼다. 중국 언어와 문자를 학습하며, 중국 승복으로 갈아입고, 중국의 고상한 존명이나 자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국화로 나아갔다. 이는 지식인들의 활동이 왕성하고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절대적인 중국의 사회·문화적 환경을 잘 인식한 바탕위에서 나온 적응성 전략이었다.

(3) 선교사의 청빈 정결한 생활 방식을 드러내는 것을 선교의 유력한 수단으로 삼았다. 이는 서방 종교의 도덕적 절조와 중국 사대부의 도덕적 기조를 숭상하는 기풍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4) 중국어로 교리 서적을 찬술하고, 서양식 해시계, 자명종 등 과학 기기들을 제작하고, 천체 운행, 지리대강, 종교 신앙, 영혼 구원 등의 문제를 토론 교류하는 등 학술 보급을 선교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아울러 중국 관원에게 자명종, 프리즘(三棱鏡), 우단(天鵝絨) 등 서방의 새롭고 정교한 물품을 선물하는 것을 우의를 맺고 도움과 배려를 얻어내는 보조 수단으로 삼았다. 이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관심이 컸던 중국 지식계층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를 통해 서양 기독교에 대한 우려 대신 호감을 유도할 수 있었다.

루지에리가 초기에 확립한 이러한 적응성 선교전략은 지금까지 굳게 닫혀 있던 중국 문호를 여는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전략의 효과로 루지에리는 조경에서 교회당을 건립하고 사대부들과 폭넓은 교제를 할 수 있었고, 최초로 중국 내지 현장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새 역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선교사상 및 실천 과정과 관련하여 모순과 번복이 거듭되는 아쉬움도 보였다. 적응성 전략이란 서양선교사들이 기독교의 부산물에 불과한 서양인으로서의 관습과 다른 민족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중국 문화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지키면서 전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지에리는 당장의 이익만을 노려 중국 법률과 관습을 존중하지 않다가 저항을 받기도 하였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록》에서는 중국 문화의 일부인 불교의 윤회, 살생 금지 등의 이론을 전면적으로 공격 비판하고 심지어 사찰 보살을 마귀의 화신으로 배척하기도 하였으나,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 방문 이후 불교 미신과 살생 금지에 대한 비판 대신 선교를 위해 인정할 영역이라는 관점을 보이기도 했다. 루지에리의 사상 인식의 애매모호함과 우유부단함, 모순의 심리 상태를 보이기도 한 것은 중국 문화에 대한 보다 충실한 이해를 하지 못한 채 중국에서 선교 근거지를 얻기 위한 목적에 이끌리면서 나타난 일종의 수동적 면모였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루지에리 중국선교의 의의
중국선교 역사에서 루지에리가 남긴 성과는 대단히 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높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루지에리는 중국선교 사업의 실제 개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중국선교단의 책임자가 되지 못했으며 충분한 신뢰와 그에 상응하는 책임자적 권위를 행사하지도 못하였다. 그는 비록 선교활동 중에 많은 정확한 결정을 내리고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지만, 선교 진행과정에서 빚어진 예기치 못한 몇 가지 실책들로 인해 중국선교 현장에서 조기 소환되고 말았다.

유럽으로 귀환한 이후에도 중국선교에 대한 열망은 중국선교 관련 저술활동 등으로 이어졌지만, 미완의 선교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지는 못하였다. 그는 유럽 귀환 뒤 숙원이었던 교황 파견 사절단의 중국 황제 알현을 통한 중국선교의 안정적 기초 마련을 시도하는 계획을 계속 주창하고 입안하기까지는 하였으나, 자신은 계획된 사절단 명단에 들지도 못하였다. 이후 사절단 파견에 적극적이었던 교황이 선종하면서 이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고, 그의 만년은 중국선교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중국선교에서의 기여는 지대하다

첫째, 중국내지선교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경에서의 선교 근거지 확보와 교회 건립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둘째, 적응성 선교전략의 구체적인 기초를 마련하였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고, 불철저한 면모도 있었지만 사비에르와 발리냐노를 통해 접근된 중국 문화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의 선교전략은 그의 현장선교의 과정을 통해 보다 구체화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셋째, 그는 명말 중국에서 천주교회의 기반을 확립하는 성과를 올리게 되는 마테오 리치가 적응성 선교전략의 집대성자가 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마테오 리치를 중국선교 현장으로 인도한 추천자였고, 마테오 리치가 중국어와 환경에 익숙해지는 과정의 핵심적인 조력자였다. 마테오 리치의 독보적인 성과는 실제 루지에리가 남긴 성과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지에리가 업적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선교 과정에서의 부득이한 시행착오, 마카오에 체류하고 있던 다른 선교사들의 오해와 폄하, 유럽으로의 조기 소환, 추진한 교황사절단 파견에서의 배제와 무산, 후계자인 마테오 리치의 괄목할 만한 공헌, 마테오 리치와 달리 중앙 정계 고위 인사들과의 교제 미흡 등의 요인이 작용했다고 평가된다. 어쩌면 그에 대한 저평가된 중국선교의 성과까지 그의 뒤를 이은 마테오 리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부가되었다는 일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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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