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3  통권 203호     필자 : 변성래
[책 속의 중국]
《중국인 이야기》 (4)
김명호 | 한길사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지난 6월 20일 북한 평양에 도착했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북한을 방문한 것은 2005년 10월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주석 이후 14년 만이다. 시진핑 주석은 방북 기간 동안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북·중관계와 한반도 문제 등의 현안을 집중 논의할 것으로 보여 주목되었다. 특히 이번 방문이 교착상태에 빠진 북한 비핵화 관련, 남·북·미 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당사자들이 촉각을 세우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의 북한 방문 일정 중 뒷이야기도 무성하다. 매우 융숭한 대접을 받은 듯하다. 가는 곳마다 꽃다발에 묻히고, 대단한 환영단이 열성 박수로 맞이하는 모습을 외신 보도로 보게 되었다. 

북·중 우호관계의 출발점은 중국과 북한의 공동의 적인 일본을 상대로 조직된 동북항일연군과 88여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부터 8년간 전개된 중국 항일전쟁의 지도자는 국민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였다. 그러나 장제스나 국민당 원로들은 북한의 지배층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1931년 가을, 일본 관동군(関東軍)이 무력으로 동북을 강점했을 때 장제스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했다. 동북군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동북군은 하루아침에 왜적의 침입에 저항을 포기한 군대로 전락했다. 이 부분이 장제스에게는 큰 실책으로 남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랬을까? 어찌 동북을 총 한 방 안 쏘고 일본에게 내주었을까? 
 

대도시를 중심으로 항일전쟁을 촉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제 나라 땅에 들어온 남의 나라 군대를 내쫒자”라고 하는데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부의 암 덩어리인 중공 홍군을 먼저 정리하고 일본과 일전을 겨루겠다는 장제스의 기본 전략인 ‘안내양외(安內攘外)’는 더 이상 국민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민심이 따르지 않다 보니 정책의 옳고 그름은 둘째 문제였다. 그 틈을 중공 지도부가 잘 활용했다. 공공외교를 유용하게 펼쳤다. 미국 언론인 에드거 스노 등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정당성과 존재 이유를 외부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전국의 2인자나 다름없던 동북군 최고 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만남은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1936년 12월, 장쉐량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항일전쟁을 요구했다.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 국공 양당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된 장제스는 일본에게 전면전을 선포한다. 단, 자신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장쉐량은 연금하고 동북군도 해산시켰다.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동북인들의 불만은 해소할 방법이 없을 지경으로 악화됐다.
 

신중국 수립에 기여한 북한
중국인 대다수가 6·25전쟁 시절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압록강을 건넌 사실은 알아도, 북한이 신중국 수립에 기여한 사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중국 최고 지도층은 틈날 때마다 북한과의 우의를 강조해왔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마오쩌동(毛澤東)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두 집안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가 돕고, 너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도와야 되는 그런 사이다. 지금 조선은 위난지중(危難之中)에 처해 있다. 우리가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홍기에는 조선열사들의 선혈이 배어있다.”
 

국민당이나 공산당에게는 동북을 장악해야 중국에 군림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지리적으로 조선, 소련, 몽골과 인접한 지역이다. 동북을 놓고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공산당이 열세였다. 넓디넓은 만주 벌판에서 공급을 차단당한 중공은 남만주의 부상병과 가족들은 물론 전쟁 물자를 수송하는 데도 난관에 처하게 된다. 기댈 곳은 단동에서 투먼까지 800킬로미터의 국경을 맞댄 북한밖에 없었다. 김일성과 중국공산당의 끈끈한 관계가 맺어지기 시작한다. 마오쩌동이 김일성에게 직접 부탁을 했다. 김일성은 만주에 대한 물자 수송로를 터주고 부상병과 간부 가족들을 돌봐주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한술 더 떠서 김일성은 패전 후 긁어모아 놓았던 일본이 두고 간 무기를 중공에게 무상으로 공급했다. 10만 명이 무장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 북한에서 보내온 무기를 받은 (공산당)동북민주연군 지린(吉林)군구와 랴오닝군구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기 분배를 담당했던 간부 한 사람이 구술을 남겼다. “각목과 화승총을 무기랍시고 들고 다니던 전사들은 날이 샐 때까지 춤추고 노래하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전쟁은 묘하다. 제아무리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정신력으로 무장이 됐다 하더라도 후방이 든든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고,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사기와 정신력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공산당에게 안전한 지역은 강 건너 조선 땅 외에는 없었다. 평안북도 강계에 후방을 설치했다. 압록강 연변은 김일성의 지시로 동원된 군·관·민으로 복작거렸다. 전쟁 기간에 평북 초산은 동북민주연군이 북한 땅에 설치한 최대의 후방기지였다. 300여 가구가 살던 작은 지역에 랴오동군구 공병부와 야전병원을 포함해 13개 기관이 이전해 있었다. 심지어 통화현(通化县)은 현 정부가 통째로 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신중국이 국공내전 시절 북한의 지원을 인정하면서도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대국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일까? 비록 힘들고 어려울 때 북한에게 기대기는 했지만, 북한을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기 싫어서 그랬을까? 김일성은 눈치를 챘을까? 그 당시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들이 시간이 흘러 회고록을 남기면서도 북한에 대한 대목은 어물쩍 넘어가고 말았다는 후문이다. 그 대신 김일성 부자가 중국에 올 때마다 일반 중국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긴 했지만 기상천외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김일성은 마오쩌동의 부탁을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깊은 관계가 중국과 북한 사이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