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신하영1.JPG) 내가 처음 중국에 가게 된 것은 1998년 교회 청년부 선교여행에 지원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대학생 시절부터 선교관련 모임참석과 성경공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교사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전히 말씀에 순종하려면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를 가든, 아니면 한국에서 있든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고 이왕이면 선교사가 되어 선교지에 가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한번 선교사가 되면 평생을 선교지에서 뼈를 묻어야 하는 정도의 결단과 헌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움도 많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선교지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가 하면, 선교사로서 추방되는 사례도 있고, 한편 선교사는 아니지만 비즈니스 때문에 크리스천으로서 평생 해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선교의 가능성은 더욱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선교사의 선교지이동도 빈번하다.
어쨌든 교회 청년들과 중국에 갔을 때 내 상태는 선교헌신자로서 하나님이 어느 지역으로 선교사로 보내실까 궁금해 하며 선교지를 찾던 중이었다. 일정을 잘 보내고 마지막 날 선물을 사러 홍챠오(红桥) 시장-우리나라 예전 남대문시장 같은 분위기-을 들렀을 때 물건을 팔던상인이 팀의 한 자매의 옷소매 끝에 씌어 있는 ‘예수’라는 글자에 꽂혀 계속 질문을 했다. 젊어 보이는 상인아저씨의 진지한 눈빛을 보면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으로 가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중국에 다시 와야 한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주변에 수많은 보따리들, 장사에 열중하고 돈을 세는 다른 상인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생소한 이름-예수-을 놓고 진지하게 질문하던 아저씨의 눈빛이 나에게 깊이 박혔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중국선교사로 부르신다는 확신이 없었음에도 ‘지금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밀려 중국이 하나님을 알 기회를 잃어버리기 전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때이구나!’하는 부담감을느꼈다.
사실 선교지를 정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 대한 강한 확신을 얘기하는데 나는 사람마다 인도하심이 다르겠지만 그 확신을 기다리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선교의 대전제 아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 사역자가 적은 곳,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필요로 하는 곳, 함께 팀 사역을 할 수 있는 곳 등의 성경의 원리에 따른 기준에 부합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려고 중국어문선교회에서 진행하는 훈련을 받았다. 1999년 가을부터 중국어문선교회에서 –당시에는 서울 방배동에 있었다.- 훈련을 받은 뒤 중국의 동북부, 동남부, 서남부의 여러 지역을 둘러보았다.
여행 중 몇 군데에서 만난 한국인사역자들에게 서북지역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면, 그 지역의 사람들은 좀 사나운 인상인데다 항상 칼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소 겁도 많고 추위도 많이 타는 나는 ‘아, 그 서북쪽은 갈 데가 못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온순한 서남쪽 소수민족들이 많이 사는 따뜻한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교회 청년들과 서남쪽을 가보게 되었고 그리고 그 뒤에 한 파송선교회에 가서 선교사로 가기 위해 구체적인 절차를 밟으며 선교지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을 만났고, 2005년 한 살, 세 살 된 두 아이를 데리고 ‘칼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사람들이 사는 추운 곳’을 단 한 번의 선교지 답사여행도 하지 않고 떠나와서 8년을 살았다.
하나님은 참 재미있는 분이시다.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을 단번에 깨뜨리시며 그분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분이시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내게 부정적인 정보를 주신 분들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고 또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신 것 같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선교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또는 말할 때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행여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오히려 방해하지 않게 말이다. 재미있게도 주님은 내가 부정적인 이야기기를 듣고 중국 안에서 내가 ‘절대로’ 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에 나를 어린 자녀들과 보내셨고 또 그곳에서 항상 함께하셨다. 우리 가정은 그곳에서 2009년 7•5사태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지만 안전하게 지켜주셨다. 이제 중국 AB지역은 우리 가정의 제2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현재는 그곳을 떠나 같은 K민족을 섬기기 위해 이웃나라에 있지만 가끔씩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7•5사태가 있던 당일날 주일도 우리 가정은 평소대로라면 사태가 시작된 장소에 갔었겠지만 주일예배 후에 너무 피곤해서 일정을 바꾸어 집에 있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우리가 자주 가던 곳에서 큰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만약 만 4살, 7살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있었다면 우리는 무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우리 집은 폭동 현장의 한가운데 위치했는데 남편이 버스나 택시도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에서 예정대로 오기로 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밤에 공항으로 나간 상황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것을 위해 기도했던 것이다. 그때 7살 난 딸아이가 이렇게 물었다.
“엄마 왜 우리는 이렇게 위험한 데서 살아요?”
한참을 망설이다 난 이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없단다. 우리가 안전하고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던 미국에서도 9•11사태가 있었단다. 우리나라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 -아이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었다.- 등 사건 사고가 많았지? 우리는 주님의 손안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단다.”
아이의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그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선교지를 싫어하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으로 다른 나라 예를 들어가며 이렇게 대답했을 때 딸아이가 다시 질문을 했다.
“그럼, 천국은 안전한 곳인가요?”
“그럼, 가장 안전한 곳이지, 그리고 우리가 꼭 가야 하는 곳이지.”
딸이 지금도 이 대화를 기억하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 9년이 지난 지금 그야말로 전세계에는 안전한 곳이 없어졌다. 그 사건후 1년 동안 AB지역의 인터넷은 안되고 주변 상황은 위험했지만 우리 가정과, 또 나와 딸의 대화에 성령님이 특별히 함께하셨다고 믿는다. 처음 AB지역에 갔을 때 이미 중국어를 말할 줄 아는 남편은 민족어를 열심히 배웠고 나는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선교지에서 가장 설레는 시간이다. 대학 졸업을 한지 십수 년 만에 다시 학생이 되어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며, 내가 있는 지역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를 배워 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민족어를 배워야 했는데 대학에서는 외국인을 위한 민족어 연수반을 많이 폐강했고 개인학습선생을 찾기도 어려웠다.
거기서 만나는 현지인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서 전도도 하고 제자양육도 했다. 멀리 있는 (차로 20시간 정도 걸리는) 자매를 격려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그 집을 방문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전했다. 폭넓게 현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남편은 작은 회사를 통한 비즈니스사역도 했다. 비즈니스사역을 통해 한국 사역자들이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남편은 리서치 경험을 살려 이 지역을 더 잘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알리고자 여러 사역자들과 연합하고 같이 모여 기도하며 직접 사진도 찍고, 인터뷰하고, 자료도 모으면서 AB지역 소개 책자를 2차례에 걸쳐 정식으로 출간했다. 지금도 가끔 그 책을 읽고 오시는 분들을 보면 감사하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사역하기에는 중국정부의 정책이 너무나 자주 바뀌고 정부의 제재가 점점 심해졌다. 거기에다 무슬림들의 굳어진 마음과 외국인에 대한 경계는 더 심했다. 대부분 접촉하는 사람들은 젊은 학생들인데 우리는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고 나이차도 많았다. 친해지기 어려운 점도 많았다. 부인 선교사로서 특히나 어려운 점은 더 많았다. 정체성의 혼란도 컸다. 나도 선교사이니까 사역에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싶지만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가사일들은 매일매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기에 하나님과 개인 시간을 갖는 일도 쉽지 않았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무슬림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는 이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심지어 무슬림이 옳든 아니든 그들은 변화를 무서워했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살아남는 일은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젊은이로서 미래에 대한 꿈을 꾸기보다는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 무엇보다 시급했다. 내가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도 힘들었다.
선교사는 누구인가? 나의 부르심은 무엇일까? 참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했고 나름대로 한국에서 편안하고 익숙한 삶을 포기하고 이곳에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맘껏 전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복음을 들어도 딱딱하게 굳어지는 그들을 보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복음의 능력을 깨닫게 해준 현지인 신자들도 있었다. 한번 믿기는 어렵지만 제대로 믿고 고난의 영성을 지닌 신자들은 선교사인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는 했다. 나는 그들에게 정말 많이 배웠다. 그곳에서 힘들 때 가끔 맘껏 제약 없이 사역을 할 수 있는 지역으로 가서 사역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적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형태의 사역을 하고-교회건물을 세우고, 신학교를 운영하는 등 만족감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어려움 가운데서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고난의 영성을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 가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을 떠나 1년 반 전에 옆 나라로 이동해서 우리가 있던 AB지역을 생각하며 작은 교회를 개척했다. 함께 AB지역에서 양육을 받던 D형제 일가가 옆 나라로 이주를 했다. 그때 싱글이었던 D형제는 믿는 자매와 결혼해서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으며 지금 우리 교회의 좋은 일꾼으로 섬기고 있다. 아직은 초기지만 선교하는 교회를 꿈꾸며 나중에는 AB지역에 K족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그리고 치유가 필요한 가정이나 개인을 위해 ‘트라우마힐링’이라는 치유사역을 하고 있다.
여기도 신자가 0.1%밖에 안 되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더 어려운 중국의 AB지역을 품고 기도한다. 지금 AB지역에서는 외국인선교사들을 계속 추방하고 비자발급을 제한하거나 거주 문제를 어렵게 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현지인들은 여권을 빼앗기기도 하고 젊은 남자들은 계속해서 잡혀가는 상황이 비일비재한 상황이다. 학생비자도 35세 미만까지만 준다고 하고 비즈니스도 사실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더더욱 많은 젊은이들이 AB지역에 와야 한다.
D형제는 며칠 전 우리 가정에게 AB지역의 어려운 상황을 야기기하면서 하나님이 미리 우리를 이곳으로 예비하셨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동의하면서 어쩌면 우리가 AB지역에서 사역하지 못한 일들을 이곳에서 하게 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의 계획하심과 일하심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지금 AB지역은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어서 많은 기도와 중보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렇지만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없을 때가 바로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는 때라고 생각한다. 문화대혁명 때도, 선교사가 없을 때도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던가!
선교사의 가장 큰 특권은 이런 것이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을 때 연회장과 사람들이 이렇게 맛있는 포도주를 어디서 만들었는지 몰랐지만 물 떠온 하인들은 알았다(요한복음 2:8-9). 왜냐하면 가장 일선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손으로 물을 떠왔기 때문에 포도주는 하인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이 첫 번째 기적이 자신들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그들은 경험했다.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웠을지 상상해 본다. 어렵고 때때로 막막한 선교지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기적 같은 놀라운 일하심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생활 가운데서 경험할 때의 감격이야말로 선교사가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이다. 그리고 결국은 내가 일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셨다고, 나는 그냥 은혜로 그 기적의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신하영 | K족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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