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3  통권 179호     필자 : 사무엘
[선교일언]
선교입니까? 전도입니까?
(미완성 과업을 위한 올바른 선교관 정립의 필요성에 대한 고찰)

총체적인 선교를 지향하며
전도와 선교의 차이점과 정의를 제대로 정리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전도와 선교에 대한 고찰은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1948년에 WCC(세계교회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es, 世界教会协议会]의 탄생으로 에큐메니칼운동(ecumenical movement)이 일어남으로써 훨씬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복음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준 바 있습니다. 그 결과 복음주의권에서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시작된 로잔대회가 열렸으며 지금까지도 이 대회에서 세운 ‘로잔언약’이 권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로잔언약이 있기 전, 선교는 거의 전도와 대동소이하게 쓰였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타문화권에 가서 전도하는 것은 선교라고 했으며, 자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도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로잔언약이 생기면서 선교는 전도(복음전파)와 사회참여 둘 다를 포함하되 전도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선교는 전도보다 더 넓은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현재에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전도는 주로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선교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타문화권에서 전도와 사회참여, 교회개척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전도는 자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선교는 타문화권에서 그 문화상황에 적합하게 교회개척을 하는 것인데, 궁극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총체적인 사역을 하는 것으로 전도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전도는 자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선교는 복음전파보다 넓은 의미를 갖되 복음을 포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선교하시는 것, 선교(mission, 단수) - 교회가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하는 모든 행위(전도와 구제도 포함)이고, 선교사역(missions, 복수)은 주로 선교사가 하는 사역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주로 교회개척, 개발사역, 교육사업, 의료사업 등입니다. 이런 사역 가운데 전도도 포함이 됩니다.
 

‘선교입니까? 전도입니까? (미완성 과업을 위한 올바른 선교관 정립의 필요성에 대한 고찰)’에서 밝힌 바와 같이, 무조건 교회가 세워져서 자생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에서는 전도이고 그렇지 못한 (아직 자생적인 교회가 없는) 곳에는 선교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에는 무리가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면이 없지는 않지만 정확히 이야기해서 이런 식으로 구분을 짓기에는 전도가 어디서나 이뤄지며 선교도 그와 같은 조건이 없이 어디서든지 이뤄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타문화권의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는 경우, 전도도 선교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문화에 대해 익히고 타문화 커뮤니케이션을 할 줄 알아야 되며, 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문화화(化)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선교가 광의의 성격을 띠기는 하지만 복음주의권에서 선교는 전도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하여 전도와 선교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지금과 같이 하는 것보다 달리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태웅 박사, 전 GMTC 훈련원 원장]



선교가 무엇입니까?
‘왜 전도와 선교를 구분해야 합니까? 그리고 왜 우리는 모든 민족에게 선교를 해야 합니까?’라고 누군가 저에게 질문을 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쉽지 않은 주제임을 압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올바른 선교관 확립을 위해 선교현장에 있는 저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에 감히 그 질문에 답을 하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순서를 바꿔 전도와 선교의 차이(구분)를 먼저 말하는 것이 보다 더 쉽게 이 글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전도와 선교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많은 오해와 크고 작은 문제들이 선교현장과 한국교회 안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전도’와 ‘선교’의 본질이 인간의 구원이라는 차원에서는 같지만 그 방법과 목적에서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밝혀두어야 할 것은 이 글이 좁은 의미의 선교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과 사회참여를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선교가 아니라 구원과 교회개척에 초점을 두고 쓰여진 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해를 없애기 위해 짧게 나마 복음과 사회참여의 관계에 대해 잠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복음과 사회참여는 마치 자동차의 앞바퀴와 뒷바퀴 같은 관계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선교라는 자동차의 동력이 복음이라는 앞바퀴에 있기 때문에 사회참여라는 뒷바퀴가 없어도 억지로 앞으로 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속도가 매우 느리고 불안정하고 불편한 주행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복음이라는 앞바퀴가 없이 사회참여라는 뒷바퀴만 있다면 선교라는 자동차의 본래 기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사회참여는 인간 본유적(本有的)인 죄와 인간이 처한 환경적인 죄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만든 사회구조적인 죄로부터 온전한 구원을 위해 반드시 둘 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인간을 이론적으로 육체와 영혼으로 분리할 수는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서로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고 이듯이 복음과 사회참여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룰 때에야 인간의 전인격적 구원이라는 선교의 본래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왜 전도와 선교를 구분해야 합니까?’
‘전도’는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디모데후서 4:2에 근거하여 개개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여 그의 구원과 전인격적인 변화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한 민족 혹은 한 국가의 복음화를 목적으로 하는 사역입니다.
 

‘선교’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마태복음 24:14절에 근거하여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여 그 민족들 안에 생명력(자치, 자립, 자전)있는 교회가 세워지고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갖게 하여 궁극적으로 온 세상의 민족들 그리고 넓게는 온 피조세계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역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 많은 외국인근로자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명한테 복음을 전해서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과연 이것은 전도일까요? 아니면 선교일까요? 만약 그 외국인의 민족 안에 이미 자전, 자치, 자립이 가능한 교회와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있다면 이것은 ‘전도’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민족 안에 아직 생명력 있는 교회와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없다면 이것은 ‘선교’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국내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사역자들도 해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와 동일하게 파송된 선교사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또 전도의 관점을 뛰어넘어 선교라는 거시적인 관점으로 외국인근로자들을 대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만약 한국의 어떤 교회의 청년부가 중국으로 단기사역을 갔다면 이것은 전도일까요? 아니면 선교일까요? 만일 그 청년부가 중국의 ‘한족’을 대상으로 단기사역을 갔다면 이것은 전도입니다. 왜냐하면 그 ‘한족’ 안에는 이미 생명력 있는 교회들과 일꾼을 양성하는 교육기관들과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교회들은 이미 자생적인 교회들이 있고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있는 민족들을 대상으로 서로 경쟁하며 중복 전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중복되고 경쟁하듯 하는 전도가 오래 지속될수록 현지의 교회들이 그러한 한국교회들과 선교사들한테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엄격한 무슬림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90% 가까운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오랑아스리’족 같은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기 때문에 중복되는 선교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슬림사역이 아니기 때문에 추방이라는 부담이 없고, 한국에서 오는 전도여행팀이 원하는 단기사역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름과 겨울이면 수많은 한국교회의 전도팀들이 같은 마을에 중복하여 다녀가고, 그 원주민교회는 그들의 방문을 재정적인 도움을 받는 기회로 생각할 뿐 아니라 한국에서 오는 팀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사역들을 대신 해주기 때문에 여전히 선교를 받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랜 편중과 과잉 그리고 중복된 선교로 인해 원주민교회의 역사가 이미 50여 년 가까이 됐음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민족을 스스로 복음화하는 교회로 성장하지 못하고 자생력이 없는 교회로 남아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비단 ‘말레이시아’ 만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만약 동일한 청년부가 같은 중국이지만 현재 1억이 넘는 기독교 인구를 가진 한족인 아닌 자생력(자치, 자전, 자립) 있는 교회가 아직 없고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도 없는 어떤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단기사역을 갔다면 이것은 전도일가요? 아니면 선교일까요? 선교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 교회와 성경 혹은 성경음성파일이 없이 미전도종족으로 남아 있는 대부분의 민족들은 그 수가 적을 뿐 아니라 접근이 쉽지 않은 지역에 있거나 혹은 오랜 인내와 헌신,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선뜻 헌신하는 선교사와 교회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결론적으로 ‘선교’와 ‘전도’는 구분(차이)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0:14,16절의 말씀처럼 교회와 성경이 없는 민족이 스스로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선교사가 미전도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생명력(자치-스스로 다스리고, 자립-스스로 운영하고, 자전-스스로 전도하고) 있는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번역해주는 것이 선교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생명력 있는 현지의 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민족 복음화를 위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 안에 자생적인 교회들이 세워졌고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이 번역되었다면 일반적인 전도와 교회개척 혹은 성경학교사역은 그 민족교회와 사역자들이 하도록 일임하고, 그 민족이 아직 하지 못하는 전문사역을 위해서 남아야 할 소수의 선교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선교사들은 바울처럼 때가 되면 다른 미전도족속을 찾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전문사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교회가 감당 할 수 있는 전도와 교회개척, 성경학교와 같은 일반적인 사역을 위해 어느 선교사가 그 선교지에 꼭 남고 싶다면, 그 선교사는 모든 권위 의식과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그곳 현지 지도자 혹은 조직의 권위 아래서 지도를 받으며 현지 교회를 돕는 위치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현지 교회가 잘 준비만 되어 있다면 외국에서 온 어떤 선교사보다 그리고 어떤 전도팀보다 더 효과가 있고 능력 있게 자신들의 민족을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미 교회가 있고 성경이 있는 민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선교’가 아니고 ‘전도’입니다. 이는 마치 어떤 미국교회가 2017년 한국의 서울로 선교사를 파송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설령 미국에서 온 선교사가 서울 시민을 전도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심지어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하여도 이것은 ‘전도’는 될 수 있어도 ‘선교’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울에는 이미 자생적인 교회들과 훌륭한 신학교 그리고 한글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때에 지도력을 현지 지도자에게 이양하고 미련 없이 선교지를 떠나는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되기 위해서는 ‘전도’와 ‘선교’의 명확한 차이를 인식하고 자신들이 떠나야 될 시점을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사무엘 |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