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꾸밈.jpg) “천리의 본 모습은 어느 곳을 따라 발현되더라도 조금도 멈추거나 쉼이 없다. 그 본체와 작용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어찌 물질의 사사로운 욕망이 그것을 가로막아 짓눌러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그 마음에 물질적 욕망이 들끓는 가운데에서 헤맨다 할지라도, 그 양심의 싹 또한 일찍이 자신이 접하는 일 때문에 드러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들은 이에 양심의 싹을 잘 살펴서 잡아 보존하면 대본(大本)과 달도(达道)의 전체를 관통하여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살피지 못해 그 싹이 짓눌려 죽게 내버려 두어 야기(夜气) 때에도 그 싹을 보존하기에 부족하여 금수로 빠지게 되면 이는 누구의 죄이겠는가?” -주자-
미발체인 수양에 실패한 주자 스승 이통이 죽은 이후 주자는 계속해서 의식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 일어난 의식을 끊어내고 의식 이전의 본체로 돌아가려는 상태를 중시하며 의식 이전의 초월적이고 순수한 마음의 본체를 직관하려는 수양을 계속해서 체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주자는 이러한 미발수양의 체험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는 이때를 회고하며 ‘의식이 끊어져 아무런 지각도 없는 상태(泯然无觉)’와 ‘의식이 어두컴컴하여 꽉 막힌 듯한 상태(邪暗郁赛)’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체험적 실패를 이론적으로 보완해나가며 수양에 대한 두 번의 사상적 전환을 맞게 되는 것이 37세의 중화구설(병술지오)과 40세 이후의 중화신설(기축지오)입니다. 중화구설의 시기가 그 이전의 미발기상체인설과 수양의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본체를 직관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에서는 공통점이 있고, 이후 중화신설에서는 본체를 직관하려는 목적까지도 본성을 길러나가는 것으로 수정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중화구설 시기부터 주자에게 수양론은 ‘종교적 체험과 깨달음’의 영역이 아닌 철학의 성찰과 사상 실천의 영역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전까지 마음과 선한 본성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마음이 발동하지 않은 미발시와 발동한 이발시의 ‘때’를 잘 살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 머물기만 하면 선한 본성이 저절로 밝혀질 것이라 기대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미발체험만을 추구하다 보면 마음이 일어나 갈등하는 현실의 문제와 유학이 추구하는 도덕 실천의 경지를 이룰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이상적이고 초월적인 종교의 영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자는 종교 수양이 아닌 도덕 수양으로 돌아섰고 이것이 송대의 불교와 유교의 수양론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되었습니다. 수양을 현실초월로 보지 않고 윤리실천으로 하여 그것이 곧 공부의 내용임과 동시에 공부의 목적이 되게 한 것입니다.
성체심용(性体心用),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친다 주자는 미발체인을 연구하며 마음이 아직 일어나는 미발시를 정말로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가를 다시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심을 이발로, 성을 미발로 보는 호상학파와 교류하면서 미발과 이발을 마음이 발동하는 시간의 범주로 파악하지 않고 체용(본체와 작용)의 범주로 파악하게 됩니다. 이것을 정리한 것이 이 시기의 심성론인 성체심용(性体心用)입니다. 곧 본성은 그 자체로 직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을 통해 간접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호상학파는 마음의 작용에서 ‘단서를 찾아 인식한다(察识端倪)’는 방법론을 가지고 수양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단서는 우리의 마음이 자기의 사적인 이익에 기인하는지 선한 본성에서 기인하는지 마음의 근본 동기를 추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본성에 기인한 마음을 먼저 발견하려 애쓰고 그러한 이후에 찰식을 통해 찾아낸 마음의 근본 동기를 잘 간직하도록 애쓰라는 것이 호상학파가 내세운 ‘선찰식후함양(先察识后涵养)’의 방법론입니다.
주자는 중화구설을 통해 인간 도덕의 주체성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수양을 통해 행동의 동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면 도덕 실천의 선한 행위와 선한 동기를 모두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서를 살펴 아는 일’을 통하여 일상의 생활에서부터 수양을 하게 된다면 사람이 행동하고 살아가는 모든 일이 수양 아닌 것이 없게 됩니다. 일상을 떠난 윤리가 아닌 일상에서 구현하는 참된 윤리를 생각해 볼 때 주자는 이러한 사상에 크게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찾는 마음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이발찰식의 수양은 일과 대상이 없을 때의 수양까지 포괄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승환은 훗날 주자가 <관심설(观心说)>을 통해 ‘마음으로 마음을 보려는’ 자기 직관의 수행법이 지닌 철학적 오류에 대해 비판한 점을 파고들며 마음은 주체이지 객체로 대상화할 수 없다는 점을 꼬집습니다. 물론 자신이 행동한 이후 그 행동에 대한 마음의 동기를 생각해보는 반성과 성찰은 가능하지만 행동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의 주체적 마음이 동시에 자신을 대상화하여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화구설이 이러한 비판에 다다르게 된 것은 그 방법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파악함을 통하여 유학이 추구하는 인간상인 도덕의 주체성을 확립할 것으로 보였지만 그 목적에서는 여전히 마음의 작용과 동기의 단서를 통해 그러한 마음을 일으키는 본체를 직관하려는 송대의 종교문화의 분위기에 그대로 젖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을 찾아 더욱 선한 실천에 이르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단서들을 통해 현실 너머의 지고지순한 종교의 본체를 추구했을 때 마음은 결국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넘지 못하고 두 마음으로 찢기게 됩니다. 이는 결국 마음을 잘 관찰하기만 하면 본성을 기를 수 있다는 과한 확신이 사실은 행동하는 그 순간 본성을 발견하기에도 어렵고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본성을 포착하려는 또 다른 마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본체직관은 우리의 의식 이전에 ‘진정한 자아’가 따로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끊어내려는 미발체인의 수양이나 의식의 흐름을 끝까지 추적하는 이발찰식의 수양 모두 현실의 수양하는 주체적인 마음을 끝내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는 여러 수양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종합하며 지금 여기서 수양하는 나의 마음 바로 그것이 진정한 도덕의 주체라고 말합니다. 보려하지 말고 되려하라는 것이 주자의 의도였으리라 생각해봅니다.
김주한 | 길가에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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