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2.JPG) 지난 6월 7일부터 9일까지 지구상 최고의 입시전쟁이 치러졌다. 중국판 대학수학능력시험 ‘가오카오(高考•고등교육기관입학시험)’, 성적에 따라 대학을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해당 학생뿐만 아니라 한 집안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 시험은 어문, 수학(이과, 문과), 영어, 이과 종합, 문과 종합 등 과목으로 나뉜다. 전체 응시생은 940만 명. 특히 올해 가오카오가 더 많이 화제가 된 것은 역대 가장 엄격한 시험이었기 때문. 부정행위자는 곧 범죄자가 된다. 즉, 커닝을 하다 걸릴 경우 최대 7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3년 동안 같은 시험에 응시하지도 못한다. 중국의 대학생 수는 1998년 340만 명에서 2015년 262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올해 중국의 전체 대학 모집정원은 4년제 363만 명, 전문대 335만 명을 합쳐 총 698만 명. 하지만 취업난 탓에 명문대로 쏠리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 대학은 중국교회에 있어 선교동력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최고의 모판이다. 중국교회가 노력하기에 따라 대학의 상아탑은 단지 입신양명의 길을 닦는 곳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에 밀알이 되는 청년들을 대거 양성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주요 선교동원의 시발점이자 걸출한 선교지도자 배출의 수원지였던 복음주의 청년•학생 선교운동이 중국에서도 활활 타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호부터 3회에 걸쳐 세계 청년•학생 선교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고 선교중국을 위한 중국 청년•학생선교운동의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왜 청년•학생 복음화운동이 중요한가 청년•학생선교운동은 세계 기독인들에게 선교지향 교회를 세우는 꿈과 비전을 심어줬다. 데이비드 하워드는 “교회가 때때로 새롭게 힘을 공급받고 복음화에 추진력을 얻은 것은 이들 학생들의 꿈과 노력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존 위클리프의 개혁운동은 옥스퍼드대학 시절 잉태됐으며, 얀 후스의 보헤미아 종교개혁운동도 체코의 심장인 프라하대학에서 시작됐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비텐베르크대학에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강의하다가 시작됐다. 장 칼뱅의 개혁정신도 파리대학 법대생 시절 싹텄다. 뿐만 아니라 경건주의와 개신교 선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모라비안 미션’도 할레대학 설립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개신교는 초창기 해외선교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개신교가 교회 개혁에 치중한 반면 가톨릭은 예수회를 중심으로 전 세계로 복음을 들고 나갔다. 그러던 중 개신교 학생들의 선교운동이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독일 출신 7명의 법학도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선교 비전을 갖고 기도하던 중 3명이 선교사로 떠났다. 그중 피터 하일링은 이집트에서 2년 동안 체류하고 1634년 아비시니아로 이동, 20년 동안 성경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에 힘썼다.
이후 현대 의미의 선교는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 속에 시작됐다. 경건주의는 새로운 종교개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영국의 청교도운동’, ‘미국의 대각성운동’ 등 복음주의 운동의 원천이 됐다. 아울러 청년·학생선교운동의 원형이 됐다.
캠퍼스 복음화 원형인 독일의 경건주의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50년 동안 독일의 경건주의는 개혁적인 신앙생활 운동과 교회의 선교 동력화에 주력했다. 당시 루터교회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생명력을 상실한 채 사변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로 전락했었다. 이때 경건주의는 기독교 체험과 감정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평신도들에게 기독교의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세상에 대해 엄격한 금욕의 자세도 요청했다. 특히 필립 제이콥 스페너(1635-1705)는 ‘콜레기아 피에타티스’(경건의 모임)를 조직, 성도 개개인의 신앙 성장과 삶에 집중했다.
교회 안에 있는 작은 교회의 원형인 이 소그룹 모임은 성경공부와 자발적 학생단체의 원형이 됐다. 영국 존 웨슬리의 홀리클럽과 감리교운동의 핵심체인 ‘클래스’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스페너는 할레대학의 창설에 깊이 관여하며 선교운동의 단초를 제공했다. 할레대학은 스페너의 주장과 교육방침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어 스페너의 동역자이자 영적 계승자였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는 7개의 학교를 세워 교육의 평등권을 실현했다.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위해 ‘누더기학교’를 세웠다. 고아와 빈민을 위한 수용소, 성경보급소 등을 세워 개인의 회심 못지않게 전도의 열정과 선교정신을 강조했다. 특히 ‘데니슈 할레 미션’을 통해 이교도들을 위한 해외선교 사역을 시작, 260명의 선교사를 전 세계로 보냈다.
그린란드 초대 선교사인 한스 에게데, 노르웨이의 위대한 부흥가 한스 닐슨 하우게 등을 배출한 프랑케는 1705년 덴마크 프리드리히 4세의 요청으로 ‘현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캐리보다 100여 년 앞서 자신의 제자 2명을 인도선교사로 보냈다.
프랑케의 제자인 바돌로매 지겐바그와 하인리히 폴뢰차우로부터 시작된 할레대학의 선교행전에 따라 18세기에 60명의 인도선교사가 배출됐다. 이 중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슈바르츠는 1750-1798년 남인도에서 휴가는 물론 결혼도 하지 않고 복음전파에 힘썼다. 프랑케의 정신을 이어간 할레대학은 유대인 선교까지 감당했다. 스페너와 프랑케에 이어 친첸도르프의 ‘모라비안 미션’은 1732년 2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한 이래 선교사 수천 명이 세계 곳곳에 피를 뿌렸다.
영국 청년·학생복음운동 1885년 파란 눈의 선교사들이 중국식 복장과 변발을 하고 중국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매일 장거리를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에 발에 심한 상처가 나기 일쑤였다. ‘케임브리지 7인’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영국 학생복음주의 운동과 미국의 부흥전도자인 D. L. 무디(1837-1899)의 케임브리지대학 전도집회의 열매였다.
케임브리지 7인의 출현에 앞서 18-19세기 영국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물질주의 세속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교회는 마이너리티로 전락했다. 신앙은 더 이상 국민생활과 지성 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때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홀리클럽 운동이 전개되고 이는 훗날 감리교운동으로 발전했다. 이어 케임브리지대 출신 찰스 시메온(1759-1836)에 의해 학생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옥스퍼드 출신 존 웨슬리(1703-91)는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와 윌리엄 모간, 프란시스 등과 함께 홀리클럽을 시작했다. 조지 휘트필드는 1735년 홀리클럽에 동참했다. 이들의 목적은 우선 자신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성경공부와 기도, 고전연구, 사랑 실천에 힘썼다. 특히 초대교회 전통에 따라 매주 수•금요일 두 차례 금식했다. 매주 한 차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구속의 은혜를 기념하는 성찬식에 참여하는 등 엄격한 규칙을 지키며 자기성찰에 집중했다.
홀리클럽운동이 성장하자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성찬형식론자’ ‘열광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너무 딱딱하고 종교적으로 엄격하고 형식에 구애된다며 ‘메소디스트’(Methodist)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메소디스트는 훗날 감리교운동으로 발전했다. 프랑스혁명은 피의 혁명이었지만 웨슬리 등을 통한 각성운동은 생명을 살리는 사랑과 화해의 운동이었다.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은 “웨슬리의 영적 각성운동이 영국을 폭력혁명에서 구출하였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찰스 시메온은 명문 이튼고교를 거쳐 케임브리지대학 킹스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1779년 1월29일 ‘인간의 전적 의무’라는 서적을 읽으면서 금식과 기도를 병행,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개는 죽을 수 있으나 나는 지난날의 죄 때문에 영원히 죽지 못하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깊은 죄의식에 빠져 있었다.
4월 4일 부활절 아침, 그는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부활하셨다.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넘쳐났다. 은혜를 체험한 그는 나눔의 삶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주일에 거의 교회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하인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양서와 기도문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 남기로 결심하고 홀리트리니티교회의 교구목사가 됐다. 그때부터 54년 동안 결혼도 하지 않고 케임브리지 복음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사역 초기 그는 교구 신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악명 높고 고집 센 ‘시메온주의’라는 비난도 받았다.
킹스칼리지 기숙사 계단 맨 꼭대기에 있는 그의 방에서 대학생들과의 대화 모임을 통해 캠퍼스 전도에 힘썼다. 학생들은 평소에 궁금했던 주제에 대해 거침없이 그에게 질문했다. 격의 없는 토론을 통해 학생들은 그리스도의 용사로 세워졌다. 아울러 시메온은 강해설교가들을 양성했다. 그가 남긴 성경 66권 강해설교집은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유산은 J B 라이트푸트, B F 웨스트코트, F A 호트 등 케임브리지 주석학파를 탄생시켰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전을 깊이 다루는 케임브리지 신학훈련은 소위 문법과 역사의 주석원리를 해석의 근간으로 삼게 됐다. 윌리엄 캐리, 데이비드 리빙스턴, 카를 귀츨라프 등 걸출한 선교사들이 배출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시메온의 제자 중 토머스 부차난 등은 당시 영국 최대선교단체인 CMS(Church Missionary Society)를 통해 선교지로 떠나갔다. 또 케임브리지대에는 자발적인 모임이 4개 설립됐다. ‘젊은 예수쟁이들’(the Jesus Lane Lot) ‘케임브리지학생기도회’(Cambridge Prayer Union) ‘케임브리지대학선교회’(Cambridge University Church Missionary Union) ‘매일 기도모임’(the Daily Prayer Meeting) 등. 이 단체들은 대학과 교회,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통로가 됐다. 특히 1877년 케임브리지기독인연합(CICCU)을 만들어 기독학생회(IVF)뿐 아니라 ‘케임브리지 7인’이라는 영국선교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교지도자들을 양성했다. 20세기 초 세계선교사에서 영국이 최대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기초가 대학생들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미국 학생선교운동의 발아기 18세기 말-19세기 초 미국은 영적 위기에 빠졌다.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세속주의 앞에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일어났던 대각성운동(1734-35)과 부흥운동(1740-41) 등의 영향력이 상실된 것이다. 무신론이 하버드대를 흔들어놓았다.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칼리지 학생들은 성찬을 비웃었다. 어떤 대학에서는 성경이 불태워졌다. 캠퍼스는 폭음 음란 도박 방탕의 장소로 전락했다. 기독학생들은 비밀리에 모임을 가져야 할 정도였다. 이때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중심으로 미국의 선교대국화의 길을 준비하셨다.
1798년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무엘 존 밀즈 주니어(1783-1818)는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드릴 것을 서원한 뒤 1806년 윌리엄스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학자적인 은사는 부족했지만 영적 리더십만큼은 탁월했다. 그해 8월 밀즈 주니어는 세계선교의 비전 등을 나누기 위해 4명의 기도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제임스 리처드, 프란시스 L 로빈스, 하비 루미스, 바이렘 그린 등.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학교 뒤 단풍나무 숲에 들어가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하고자 했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그들은 급히 피할 곳을 찾다가 건초더미가 쌓여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갔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만일 우리가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세계복음화)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한 그곳에 지금은 이끼 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5명의 대학생들이 드린 이 기도가 바로 미국학생선교운동과 미국교회의 해외선교의 기원이자 원형이 됐다. 밀즈 주니어가 이끈 건초더미운동(Haystack Movement)은 철저하게 기도와 세계선교를 강조했다. 1808년 조직한 ‘형제회(the Society of Brethren)’의 정관을 보면 그 정체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관 5조는 이방선교지에 나가려는 뜻에 맞지 않는 어떤 종류의 약속을 한 사람은 회원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형제회의 대부분 멤버들은 해외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엔도버신학교에 진학했다.
반면 밀즈 주니어는 예일대학으로 전학, 훗날 위대한 전도자가 된 에사헬 네틀톤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선교의 비전을 공유했다.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다트머스대학과 유니온신학교에도 세계선교를 위한 조직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1809년 밀즈 주니어도 엔도버신학교에 진학, ‘선교연구회’를 결성하고 수많은 선교자원자들을 배출하는 토양을 만들었다. 이 중에는 미국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된 브라운대학 출신 아도니람 저드슨, 유니온대학 출신 사무엘 노트, 하버드대학 출신 사무엘 네웰 등이 포함돼 있다. 회원 372명 가운데 271명이 해외선교사로 떠났다. 교회는 이들로 인해 미국 최초의 미국선교사회(AMS)를 조직하고 기도와 선교헌금을 후원하게 됐다. 선교기관과 교회의 협력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건초더미운동의 선교정신은 1844년 설립된 YMCA와 1880년 결성된 미국신학생선교연맹(the American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등에 면면히 이어졌다. 한국에 첫 선교사로 온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1883년 하트포드에서 열린 신학생선교연맹대회에서 조선선교에 소명을 받았다. 이어 1886년 로버트 윌더(1863∼1938)에 의해 설립된 ‘프린스턴해외선교회(PFMS)’는 역사상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학생자원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씨앗을 잉태하게 됐다.
윌더의 아버지 로얄 G 윌더는 엔도버형제회 출신으로 인도에서 브라만 계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라퍼스에 학교를 세우며 선교 사역을 펼쳤다. 따라서 윌더는 인도에서 태어나서 마라티족 언어를 익히고 10살 때부터 교회학교에서 마라티족 어린이들을 위해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해외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 윌더가 건강상의 이유로 30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고향인 미국의 프린스턴으로 돌아오면서 청년 윌더는 1881년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미국의 수재들만의 모임인 ‘피 베타 카파 클럽’의 멤버로 선출됐다. 12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언어에도 천부의 소질을 지녔다.
대학 3학년시절 윌더와 그의 두 친구는 신학생선교연맹의 가을 수양회에 참석, A. J. 고든 박사의 성령에 대한 메시지에 완전히 압도됐다. 윌더는 캠퍼스 부흥을 위한 기도와 사역에 힘쓰는 한편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겠다는 뜻을 구체화했다. 따라서 윌더는 PFMS 총무를, R. W. 반 커크는 회장을 맡았다. 처음엔 문리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됐지만 곧이어 신학생들도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 일본, 중국, 인도, 불가리아 등에 선교사로 떠난 자가 적지 않았다. ♣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 왕빈 | 중국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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