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1  통권 165호     필자 : Mr. HAN
[단기선교 경험기]
6박7일, 중국 신장 기도여행을 떠나다(#4)



 여섯째 날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카스에 도착해 도심의 한 호텔에서 짐을 풀었다. 호텔에서 잠깐 휴식하고 날이 밝으면 현지교회 지도자와 만나기로 했다.

카스는 신장지역에서 가장 처음으로 이슬람 국가가 세워진 도시로 이슬람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중국에서 성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카스에는 중국에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이슬람 사원인 에티갈 마스지드 사원이 있으며, 이들의 98%가 위구르 사람들이다.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긴하다. 새벽 4시가 넘어 잠이 들었는데 저절로 잠이 깨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30분이었다. 나는 평소에 7시 30분에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나곤 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된 모양이었다.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오니 거리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열지 않았다. 다만 식당 하나가 불을 밝혀 놓고 열심히 아침장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식당 앞에는 왕복 6차선은 되어 보이는 큰 길 하나가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나무들이 즐비했고, 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동상도 보였다. 무슨 공원인가 하고 큰 길을 건너 나무들이 즐비한 곳으로 가니 내가 생각한 것처럼 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작은 공원이 있었다. 여남은 사람들이 아침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운동을 했다. 공원의 아침공기는 아주 시원했다. 운동을 좀 하고 나니 몸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

일행의 아침식사로 동북에서 궈즈(果子,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간을 한 후, 길이 30센티 정도의 길쭉한 모양으로 만들어 기름에 튀긴 바삭바삭한 식품. 주로 아침에 콩국을 먹을 때 같이 먹는데, 여우티아오(油条)라고도 한다. 편집자주)와 만두 몇 개, 그리고 한국의 순두부찌개와 비슷한 더푸나오(豆腐脑)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Y자매와 W가 안에서 나왔다. W는 오래 전에 카스에서 10년 정도 살았는데 그때의 절친들을 만나보고 전도도 하고 싶어 했다. W가 이번에 부득부득 따라 나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오늘은 사도행전 7장을 묵상했다. 스데반의 순교였다.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우리 가운데 순교자가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다른 순교자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묵상하는 사도행전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일하심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감사함으로 기도했다.

현지목사님은 10년 전에 중국 내륙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카스로 온 내지 선교사였는데, 10년 동안 카스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카스에서 서북영공단이라는 중국 산동에서 출발해 복음을 전파하러 서북지역으로 온 단체의 선배들을 만나 그들의 간증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다. 카스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들의 간증이 힘이 돼 이겨낼 수 있었으며, 지금은 다른 목사님과 함께 공동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서북영공단의 선배들은 이미 대부분 다 주님의 영원한 품에 안기시고 두 분만이 살아계셨다.

서북영공단
현지목사님은 W를 제외한 우리 일행 6명을 서북영공단원들의 무덤이 있는 카스에서 조금 떨어진 수러(疏勒)라는 도시의 외곽으로 데리고 갔다. 서북영공단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다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바로 앞에 방어벽이 쳐 있었는데 ‘교통통제 중이니 다른 곳으로 우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현지목사님은 폭동이 자주 일어나 교통통제를 하는 일은 다반사라고 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차머리를 돌려 다른 길로 돌아갔다. 이렇게 세 번 정도 막혀 있는 길을 에돌아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 묘지는 특별하게 조성된 것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허용되는 묘지였는데, 서북영공단 단원들의 묘지는 맨 가장자리에 안치돼 있을 뿐이었다.

서북영공단의 유래
현지목사님의 소개에 의하면, 1945년경 중국 산동 위방(淮坊)의 한 교회에서 집회가 있었다. 그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 여러 사람이 함께 뚜렷하게 들은 주의 음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복음을 예루살렘까지 편만하게 전하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집회가 끝나고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던 중 여러 사람이 동일한 음성을 동시에 들은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음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했다. 산동에서 출발한 그들은 상하이로 가서 기차를 타고 란저우로 갔다. 란저우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던 중 당시 란저우를 지키고 있던 국민당 군인에게 조사를 받았다. 그때 조사를 담당하던 사람은 소령급의 탠페이친이었다. 그는 잡혀 온 서북영공단 단원들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너희들은 무엇 하러 여기 왔느냐”

그 물음에 서북영공단 단원들은 한나절 동안 울기만 하면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국민당 군대 장교는 웃는 얼굴로 그들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천천히 말해 보라고 했다. 그때 서북영공단 단원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들이 산동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일과 이곳으로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국민당 장교는 알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며 그들을 보내줬다. 그리고 그날 밤, 집에 돌아간 탠페이친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설치다가 주의 음성을 듣고 다음날 바로 군복을 벗어 버리고 사직서를 제출한 후 그 길로 서북영공단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그는 후에 서북영공단을 이끌던 지도자 중 한 사람과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는데, 그의 무덤은 제일 뒤쪽에 안치돼 있었다.

이렇게 란저우에서 출발한 서북영공단은 신장의 관문인 하미(哈米)에 도착했다. 하미에서부터 거리전도를 하며 열매를 거둬 부흥회를 열었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복음의 열매를 거두면서 1948년 초에 카스에 이르렀다. 카스에 도착해 보니 또 다른 내지에서 온 선교단체가 있었는데 그들을 변방전도팀이라고 불렀다. 변방전도팀은 카스까지 복음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서북영공단 단원들은 카스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변방전도팀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계속 예루살렘으로 전진하기로 결정했다. 쿤룬산(崑菕山)을 넘어 티베트를 지나 아프가니스탄으로 가기 위하여 허텐으로 갔다. 허텐에 도착한 서북영공단은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 해방군에게 잡혔다. 그 자리에서 심문하던 해방군은 탠페이친의 신분을 알게 됐다.

국민당 군의 소령이었던 사실을 안 해방군은 간첩으로 오해해서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그들에게서 별다른 혐의를 발견하지 못한 해방군은 그들을 다시 카스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카스로 돌아온 서북영공단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시도했다. 하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도 국경을 지키고 있던 해방군에 의하여 저지당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카스로 돌아온 서북영공단은 거기에서 좀 떨어진 수러에서 공동체생활을 하며 평생을 함께 살았다. 서북영공단의 지체들 중에 청나라 옹주가 있었다. 두 번의 중앙아시아 진입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 수러로 돌아왔을 때 다행히 옹주의 귀걸이와 목걸이 등 귀중품들을 팔아서 작은 흙집을 하나 살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구입한 흙집에서 외부세계와 연락을 끊고 그들만의 공동체생활을 꾸려갔다. 거의 70년을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영적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주님께서 보내주신 카스에서 그들의 평생을 마쳤다. 그들 중에는 사회 유명 인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현지목사님이 2004년 카스에 왔을 당시만해도 이 무덤의 주인들 가운데 세 분이 생존해 계셨다고 했다. 목사님이 그분들을 찾아뵙고, “타향에서 오랫동안 사셨는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자, 그분들은 “자네는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는가?”라고 되물었다. “저는 선교사로서 선교를 하러 왔습니다.” 그랬더니 “자네가 출발할 때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던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네. 복음의 일꾼으로 사는 사람은 앞으로 가는 일만 있을 뿐이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주의 군사로 살기에는 합당하지 않다네.”

현지목사님이 섬기고 있는 교회는 서북영공단 지체들의 자녀들과 그 영향을 받은 믿음의 지체들이 모이고 있었다. 그들은 서북영공단에게 약간의 서운한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분들 살아생전에 서북영공단의 비전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안수를 해 주시거나 다른 형식을 통하여 바통을 넘겨주기를 원했고 어르신들에게 직접 요청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소원이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서북영공단이 받은 비전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우리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안수한다고 해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든지 전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서북영공단이 받은 비전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비전을 공유하고 섬기는 사람이 이어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비전을 이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나의 맘속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왜 서북영공단의 발걸음을 카스에서 멈추게 하셨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지목사님께 “혹시 서북영공단이 활동하던 시절에 위구르인교회도 많이 부흥했나요?”라고 묻자 “그때는 주로 한족교회가 더 크게 부흥했습니다. 위구르인교회도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을 서북영공단에게 주신 비전을 멈추고 계신 뜻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북영공단 선배들의 무덤을 마주하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선배들에게 주셨던 비전을 우리가 이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못 다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우리가 이어가게 하옵소서. 카스는 위구르인들이 대대로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이전에는 한족 중심의 교회가 부흥했다면 이제는 위구르인들 가운데서 복음이 폭발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한족과 위구르족이 함께 손을 잡고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는 이 일을 이루어가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에티갈 마스지드 사원에서
에티갈 마스지드는 중국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이다. 이슬람 사원에서는 하루에 다섯 번씩 나마즈(예배)를 드린다. 나마즈는 한번에 30분씩 드린다. 이슬람에서는 구원을 얻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마즈를 열심히 드리는 것이다. 에티갈 마스지드 사원에서는 나마즈를 드리는 시간 이외에는 일반 여행객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개방하고 있다. 우리가 에티갈 마스지드 사원에 도착해보니 나마즈 시간이어서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광장을 둘러보고 한 시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에티갈 마스지드 사원 정문 앞 오른편에 석류 짜는 기계를 놓고 그 자리에서 짠 석류주스를 파는 위구르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아저씨에게 다가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석류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석류주스를 시켜놓고 아저씨와 대화를 하려고 “안녕하세요?” 중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아저씨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약시무시즈” 했더니 아저씨가 나를 돌아보며 “약시무시즈” 하며 반응을 했다. 그래서 다시 중국어로 “석류주스 한 잔에 얼마에요?” 했더니 또 반응이 없었다. 이때 옆에 있던 꼬마가 중국어로 “5원입니다”했다. 그리고 “우리 아빠는 중국어를 못해요” 했다. 5원을 주자 웃으며 돈을 받았다. 그리고 그 꼬마는 무슨 볼일이 있는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자리에 앉아서 석류주스를 천천히 마시는 동안 여러 사람이 석류주스를 사는데 모두가 위구르 사람들이었다.

아마 이슬람 사원 앞이라 나마즈를 하러 온 위구르 사람들이 갈증이 나면 이곳에서 석류주스를 사먹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대화를 해 보려고 했으나 중국어가 통하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아이싸 약시 큐르둠” 하고 말해 볼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이슬람 사원 앞이라 조심스러웠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이 아저씨를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마음으로 빌었다.

이때 광장 가운데에서 C형제가 나를 그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석류주스를 한 숨에 다 마시고 광장 가운데로 뛰어갔다. C형제는 캠코드를 들고 나보고 이슬람 사원에 대해 설명을 좀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대로 에티갈 마스지드 사원을 소개했다. 촬영을 마치고 나니 사원에서 사람들이 물밀 듯 쏟아져 나왔다. 우리 일행도 여기저기에서 사원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다 빠져 나오자 우리는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큰 문을 지나나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가 눈에 보였다. 일인당 20원이었다. 표를 사고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이 꽤나 널찍했다. 마당에는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나마즈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지나 다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슬람 사원 건물 안 바닥에는 양털로 된 주단이 깔려 있었다. 주단은 한 사람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네모난 그림으로 나눠져 있었다.

우리를 안내하던 사원 직원은 그 네모 하나에 한사람씩 앉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외에 사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벽에 걸려 있으면 좋겠다 싶은 그림 한 점도 없었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알라 외에는 아무것도 신으로 알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 사원 안에 아무것도 놓아두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단에 앉아 보아도 되냐고 했더니 직원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한마디 더 했다. 혹시 우리가 기도해도 괜찮으냐고 했더니 그 직원은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더니 웃으며 이야기 했다. “당신들은 기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무슬림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들이 하는 기도는 신이 듣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 우리는 사원 중앙에 앉아 눈을 뜨고 각자 조용히 기도를 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제자
우리는 에티갈 마스지드 사원에서 기도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저녁엔 예전에 위구르 공부를 했던 S교회의 파송을 받고 온 두 가정과 저녁식사가 약속돼 있었다. 약속장소는 우리 호텔에서 가까운 공원 뒤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 중에 신장이 자그마한 한 청년이 나를 보더니 “미스터 한” 놀라움에 소리를 지르며 급하게 다가왔다. 나도 깜짝 놀라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ZH라는 친구인데 2년 전에 신학교에서 강의요청이 있어서 강의를 하러 갔다가 알게 된 청년이었다. 그때 그 청년은 반장이었다. 일주일 동안 강의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자신은 선교에 비전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자매와 혼담이 오고가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카스에서 나타났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때 혼담이 오갔던 자매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결국 혼사가 취소됐다고. 그리고 JS라는 자매가 고향을 방문했을 때 서로 알게 돼 만남을 갖던 중 동일한 선교비전이 있음이 확인되었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결혼한 지 1년이 지났고 딸을 출산하였다고 했다. 그 자매가 딸을 출산했다는 이야기를 자매 본인을 통하여 듣기는 하였지만 남편이 ZH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놀라운 재회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몇 사람이 들어왔다. 그중에 신장이 훤칠하고 얼굴이 훤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나는 또 놀라서 “WA장로님!” 하고 부르니 그도 나를 보며 “어이구 이게 누구시오” 하면서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반가워했다. WA장로는 S교회연합회에서 선교를 담당하고 있다. 이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자신들의 연합회에서 파송한 가정들을 둘러보러 왔다가 우연히 만났다. 그때 대화 중 자신의 조카가 한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데 나에게 한국에서 기회가 되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었다.

내가 그 후에 한국에 들어가서 그의 조카에게 연락을 해 보니 한 대학교에서 언어과정을 마치고 상담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시간을 내어 그 학교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신장이 작고 천진하고 순수해 보이는 자매였다. 학교 안에 마침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빵집이 있어서 자매에게 맛좋은 빵과 피자를 사주었다. 그리고 혹시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지난 방학에 어느 음식점에서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이전부터 같은 교회에서 알고 있던 L노무사에게 연락을 했다. 그 자매는 내가 한국에서 외국인 사역을 하고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외국인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회사에서 월급을 받지 못한 사건이 있으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두 발 벗고 도와주었다. 이번에도 사연을 대충 설명하고 가능하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그 조카에게서 연락이 왔다. 밀린 월급을 받았다고 했다. 나에게도 감사하고 또 L노무사에게도 감사를 전해달라고 했다. 이런 일이 있었던 관계로 WA장로에게 그의 조카가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그때 조카를 도와줘서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지금은 자신의 조카가 대학과정을 마치고 대학원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된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오전에 서북영공단의 묘지를 방문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받았던 비전을 듣고 감동했는데 하나님께서 오후에는 위구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이 있고 그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다. 예전의 서북영공단은 한족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중국 안에 머물렀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족뿐만 아니라 한족과 위구르족, 그리고 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주의 일을 이루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한족교회가 위구르선교를 이루어 함께 손을 잡고 주의 일을 섬길 때 놀라운 세계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날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주신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고 말로 선포하면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여호와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해주셨다. 아버지께서 그 일을 이루실 때에 우리는 그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동역은 불평 없이 원망 없이, 정죄 없이 온전한 순종과 섬김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아니하는 복음의 길이 열길 것이다. 한족과 위구르인 사이에 넘어야 되는 큰 구덩이가 있다. 누구의 탓인지 따지고 물으려면 끝도 없다. 누구의 잘못인지 잘 가려지지도 않는다. 복음만이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 복음에 우리는 동역하고 있는 것이다. ♣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 Mr. HAN | 중국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