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은 한국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여름방학을 이용해 비전트립을 많이 가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각 교회의 비전트립팀의 구성과 일정과 프로그램 등 교회마다 다양하게 준비해서 떠나지만 목적은 하나일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선교하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이 소중한 사역이 계속되길 바라다.
그래서 이번 비전트립은 첫째, 비전트립팀의 만족이 아니라 선교현장에 도움이 되는 비전트립이 되기를 바란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준비한다 해도 현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자기만족에 빠진 비전트립을 과연 주님이 기뻐하실까? 현장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와 현지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기도하며 준비하기를 바란다. 중국어 찬양 몇 곡 준비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달할 방법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준비하기를 바란다.
둘째, 비전트립을 관광으로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비전트립 중 무엇에 집중하는가가 비전트립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행가방을 꾸렸다면 조용히 풀어놓기를 권면한다.
셋째, 단회성 비전트립을 지양하라. 겨우 한번 방문한 것으로 현장을 평가하지 않길 바란다. 주님은 현장을 평가하라고 보내지 않으셨다. 계속해서 기도하고 후원하며 재방문하는 것이 선교현장을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비전트립은 무엇일까? 선교사의 입장에서 늘 고민되는 딜레마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중심이 아닌 하나님중심의 비전트립이 되게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오랫동안 기도하고 준비해왔던 ‘NK LOVE 중보기도팀’과 여리고 기도행전을 시작했다. 2013년, 한반도의 평화로운 복음통일을 위해 북한을 중심으로 매년 한차례씩 7년 동안 비전트립을 진행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였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할 동역자들을 불러 모아주셔서 마침내 올해 첫 출발을 하게 됐다. 비전트립을 참여한 사람들의 상황들이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저마다의 사연들이 있었다. 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이 일을 진행하게 하셨는데, 출발부터 예상하지도 못했던 변수들로 인해 무릎 꿇게 하셨고 날마다 찾아온 어려움을 순간순간마다 해결해주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하셨다.
압록강 하구에서 두만강 하구까지 중국 동북삼성의 최대도시 S공항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D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땅인 황금평에 서서 첫 북한 동포들을 만나게 하셨다. 압록강 하구의 큰 폭만큼 그들과 사이가 멀어져 있는 것을 느껴졌지만 동포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더 빨리 복음으로 평화통일이 되어야 함을 마음 깊이 느끼게 하셨다. 국경선 높이만큼 흑암의 권세가 강하게 감싸고 있는 땅. 신압록강 다리, 북한을 통하는 철교를 거쳐 압록강을 따라 상류를 향해 출발한다. 압록강 중류 Z에서는 자강도 M지역을 향해 기도하게 하셨고 상류지역인 C에서 양강도 H를 향해 엎드리게 하셨다. 사실 처음에는 비전트립 예산이 확보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C현 방문을 제외했었는데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인도하셔서 두 번이나 재방문하는 은혜를 경험했다. 백두산과 T시 H시 두만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여러 관문지역과 NK 인도자의 만남은 첫 조·중 국경지역을 방문하는 중보팀들이 큰 도전을 받는 기회가 되었고 비전트립을 인솔하는 입장에서도 보람이 컸다.
바람부는 고향, 윤동주(尹東柱)와 명동(明洞)마을 중국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는 조선족에게는 어머니의 품과 같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한 변화로 많은 조선족들이 이 지역을 벗어나 한국과 해외, 그리고 중국의 대도시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그래서 조선족자치주로서의 존속 자체가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옌벤은 조선족들 마음의 고향이다. 조선왕조가 망국으로 치닫던 18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에 이주는 절정을 이루었다. 대부분이 먹고 살기 위한 경제 문제였지만 실상은 일제의 강압정치가 원인이었다. 이주를 결심한 이들 중에는 독립운동과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도 있었다. 용정(龍井)은 조선족 북간도 이주의 중심지이다. 현재 ‘용정시농업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정성결교회 옛 건물은 조선족의 이주역사를 그대로 잘 전해주고 있다. 허허벌판 황무지인 이곳 북간도 지역을 논농사가 가능한 지역으로 만든 것은 우리 민족의 공로이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이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논농사를 짓는 조선족마을을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족들이 거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윤동주의 고향 명동마을도 다르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떠난 마을에는 빈집과 휴경지가 우리팀을 반겼지만 골짜기의 너른 땅을 개간했을 선조들의 노고가 눈에 선하게 떠오르게 했다.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 골짜기는 바람이 참 많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통해 바람을 노래했다. 그리고 깨끗한 밤하늘을 수놓은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별을 이야기했다. 시인은 1917년 12월 북간도의 추위가 절정인 날 이곳 명동촌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성장했다. 시인에게 기독교의 영향은 외삼촌이자 명동교회 목사였고 북간도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하셨던 김약연(1868-1942)과 기도의 어머니 김용의 영향이 컸다. 시인의 가정과 명동마을 사람들은 명동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조선인 기독교인들의 북간도 이주역사는 청교도 신앙을 생각나게 했다. 그들이 정착하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졌다. 조선족교회의 시작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북간도를 점령한 후 ‘위만주국(僞滿洲國)’을 세운 일제의 강압정치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을 때마다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보복을 이겨낸 힘은 신앙에서 나왔을 것이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의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어머니 ...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별 헤는 밤 중에서 ...
시인은 용정 명동마을 떠나 있는 시간에도 고향을 노래했고 시를 통해 신앙을 지켰으며, 조국의 독립을 노래했다. 고종 송몽규 고향동무 문익환 그리고 정지용 등 그들과 함께. 결국 일제는 조국의 독립을 노래했던 시인을 일본 후쿠오카의 차가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용 주사를 투약하며 송몽규와 함께 사망케 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방문했다. 무덤 앞에 서서 한참을 말없이 기념비를 바라보며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했다. 기독교인에게 애국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도 던지며.
이번 여름에도 비전트립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 용정과 조선족 지역을 방문할 것이다. 영화 ‘동주’의 영향이 잠깐 불고 마는 바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신앙 안에서 애국애민의 정신을 되새기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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