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JPG) 《敎會》편집자 주: 교파문제에 대해 몇 분의 목사님을 모시고 좌담회를 가졌다. 그분들의 교파에 대한 견해, 교파가 초래할 수 있는 잘못된 생각을 포함하여 교파전통이 당대 중국 가정교회에 갖는 가치와 의의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 편집부(이하‘편’이라 약칭한다.): 교파에 대해 언급하려면, 먼저 개념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셸리(雪莱)의 《기독교회사(基督教会史)》(1)에 따르면 교파(宗派, denomination)라는 말을 사용하여 어떤 종교단체의 견해를 묘사한 것은 대략 1740년부터였고, 그때는 요한 웨슬리(约翰 • 卫斯理)와 조지 휫필드(乔治 • 怀特菲尔德)가 이끄는 복음부흥운동의 초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이론 자체는 그 전 세기에 잉글랜드(英格兰)와 미국 청교도 급진파 지도자들과의 몇 차례 토론을 거친 후 생겨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진정한 교회교파이론 창시자는 17세기의 독립파(独立派, 公理宗)이며, 그들은 웨스트민스터대회(1642-1649)에서 소수파(少数派)를 대변하였습니다. 이런 다른 의견을 가진 형제들이 교회교파이론을 아래에서 몇 가지로 종합하였습니다:
첫째, 인간은 한결같이 진리를 분명히 파악할 능력이 없으므로 교회의 외부형식에 대한 관점상의 차이는 피할 수 없다. 둘째, 설령 이런 차이가 신앙의 기본진리와 관계가 없을지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믿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할 의무가 있다. 셋째, 어느 교회도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단일화된 교회조직도 진정한 기독교 교회를 완전히 대표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단순히 분리란 사실이 분열을 형성하지 않는다. 여러 부분에서 구별이 존재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사실은 여전히 가능한 일이다.
이로 볼 때, 교파제(宗派制, denominationism)와 교파주의(教派主义, sectarianism)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교파(sect)는 오직 자신만이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진실한 본체라 여기죠. 또한 자신이 진리의 전부를 가지고 있고, 다른 교파에는 모두 없다고 합니다. 정의에 근거하면, 교파는 배타성이 있고, 반대로 교파, 이 단어는 포용성의 단어입니다. 특수한 명칭으로 부르거나 명명되는 기독교 단체는 단지 하나의 더 큰 단체로서의 교회의 일원으로, 모든 교파는 교회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개념적 배경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교파를 어떻게 보십니까?
가오바오뤄(高保罗) : 나는 두 가지 방면으로 교파를 봅니다, 하나는 긍정적이고, 하나는 부정적인 것입니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사람은 모두 유한한 존재이며, 교파는 우리의 한계를 나타냅니다.우리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인식, 교회에 대한 치리, 모두 차이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부터 이런 다양성이 점점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이끌던 교회와 베드로가 이끌던 교회의 차이는 뚜렷하였는데 갈수록 이런 다양성이 점점 더 두드러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교파는 자연히 형성되는 것이지 특별히 뭔가를 세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파의 부정적인 면은 교파가 사람을 통제하거나, 인위적인 것이 너무 많거나, 교파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교파주의는 자신이 가장 옳고 다른 것은 배척하는 것으로 이것이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중국 가정교회가 오늘날까지 왔는데, 모든 사람이 지지하는 것은 무교파주의(无宗派)로 교파의 부정적인 면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른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경향은 중국 문화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습니다. 중국 문화는 가족 문화이고, 중국인의 사고방식 역시 가족 이익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사회적 개념은 그다지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로 하여금 이런 각도에서 교파를 보게 하고, 교파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요즘 중국의 국가적 정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파가 억압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교파에 대한 인식의 한계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야거(雅各) : 제 생각에는 교파가 형성되는 건 두 방면의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 자체의 합일성(合一性)입니다. 교회와 교회가 연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세 가지 제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교제(主教制)로 피라미드처럼 연결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장로제(长老制)로 서로가 서로간에 연결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독립교회(独立教会)입니다. 독립교회는 교파가 없다지만 사실 그 자체로 일종의 교파입니다. 또 다른 방면의 원인으로는 신학적인 입장차이가 있겠습니다. 성경은 내용이 너무나도 풍부하여 모든 사람들이 통일된 입장에 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대부분 의견에서 일치할지라도 몇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교파는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구다오(古道) : 교회사적으로 봤을 때, 교파는 사람의 뜻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닌 자연스레 생겨난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마틴 루터(马丁路德) 츠빙글리(慈运理)가 하나가 되고 싶어 했지만 성찬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달랐기에 그들은 합칠 수가 없었고, 루터교(信义宗)와 개혁교(改革宗)가 자연스레 생겨납니다. 나중에는 성공회(圣公会)도 생겼죠. 그러니 교파의 형성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저도 교파의 형성은 필연적이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세 종류의 교회가 있기 때문이죠. 첫 번째는 신앙고백적 교회, 두 번째는 의식을 중시하는 교회, 세 번째는 경험을 중시하는 교회입니다. 천주교처럼 의식을 중요시하는 교회가 여기 속하죠. 영은파(灵恩派)는 경험을 중시하는 교회이고, 개혁교는 고백적 교회에 속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뿌리는 교회에 있어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앙의 내용이 우리의 중심이 됩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신앙에 있어 다르다면 같이 이 길을 걸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지만 만장일치는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의 신앙의 양심을 따라 자신이 받았고 또 믿는 신앙을 따라 주님의 일을 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모양의 신앙이 생겨나고, 다른 신앙 생활이 생겨납니다. 중국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대다수의 교회는 교파 속의 교회죠. 중국교회의 역사가 겨우 2백 년 이지만 이 2백 년 동안 교파가 없었다고 해도 그건 1949년 후의 이야기이고, 그 전에는 처소교회를 포함한 많은 교회가 교파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파는 자연스런 필연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교파의 존재로 인해 기독교가 분열되었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그저 느낌일 뿐이고 진정으로 교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안습니다. 예를 들어 침례교(浸信会)와 장로교는 서로 깨달은 것이 다르고, 자신들의 인식이 더 성경에 부합하다고 생각하지만(자기가 느낀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교파 안에 있지 않을 겁니다.) 서로 상대방을 주의 교회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합니다.
그 외에도 교파는 서로가 합일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우리가 합일함은 진리에서 합일하는 것이고, 진리에서 떨어지면 연합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받은 것이 다르다면 연합할 방법이 전혀 없죠. 하지만 교파의 형식을 빌린다면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사람들끼리 완전하게 연합할 수 있으며 그 연합은 진실됩니다. 이것은 교회에게 유익하며, 사람들이 고립하거나,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서로 흩어지는 것을 방지합니다. 그러니 여러 가지 교회 사역의 전개에 있어서도 유익합니다.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한 교파로 그 사람들의 깨달음을 한 신앙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교회에 대단한 도움이 됩니다. 신앙의 규범과 완전한 제도가 있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신앙의 규범이 없고, 모두가 제각기 깨달은 대로 생활한다면, 교회가 수없이 많은 작은 개체들로 나눠질 것입니다. 중국교회는 교파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상 굉장히 합일되지 못하고 혼란스런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교회간에 서로 관계가 없고, 믿는 것과 신앙생활까지 달라서 손을 잡는다 할지라도 표면적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더욱 깊은 내면의 합일은 거의 없습니다.
교파가 없는 것이 역으로 교회에 엄청난 손해를 입힌다고 생각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합일이지만 그 속은 더욱 깊은 불합일입니다. 중국에 교파가 없는 것은 그 역사 때문이며, 이것은 대공교회(大公教会)의 특징이 아닙니다. 저는 중국교회가 지금 혹은 나중에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하는 것 보다는 대공교회의 흐름에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끌고 왔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가오바오뤄 : 제 생각에는 교파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개개인에 묶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신앙이 무엇인지 잘 알기 위해서는 인도자가 누구인지 봐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뭘 믿는지 우린 모릅니다. 그럼 거기 인도자는? 누구누구입니다. 아, 우리가 아는 분이시군요. 그럼 그 교회를 신뢰하게 됩니다. 신도들이 개개인의 신앙을 인도자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인도자가 만약 떠난다면, 그 교회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인도자가 외길로 빠진다면, 그 교회 전체가 외길로 빠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도자 빼고 기준이 없기 때문이죠. 이런 시기에 교회가 은사주의를 들고 나서며, 개인의 매력과, 개인 인도자의 권력을 돋보이기 시작합니다.
천천히 그렇게 교회가 중심에서 벗어납니다. 사실상 우리가 걷는 것은 자기자신을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입니다. 교파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분열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상 교파가 있어서 우리는 더 겸손할 수 있으며, 다른 교파의 장점을 보게 됩니다. 교파가 있으면 우리는 더욱 더 합일될 수 있으며, 서로를 더욱 사랑하고, 다른 교파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학적 입장을 밝혀야 됩니다. 신학적 입장을 버릴 순 없어요, 그것은 우리의 교회 건축의 기초에요. 신학적 입장 없이는 교회의 건설이 중심에서 벗어나게 되며, 신학적 입장을 버리고서 합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서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며, 다른 신앙의 교회들과 합일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옌둬(岩铎) : 제 생각에는 교파의 형성은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와 갈라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관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가 한 신앙고백 아래, 한 제도 아래에 있게 하기 위한 것이죠. 교회 간의 관계가 우리를 방종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저는 교파를 제도와 규제가 있는 교회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교회 단체와 다른 것은 교파는 자발적인 것이 아닌 자각적으로 제도와 규제를 따르는 것이죠.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의 행동이나 교회 간의 행동도 규칙이 있는 상황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교파는 서로 더욱 더 가깝게 연합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녀 간의 관계를 연애라고 하죠. 서로가 싫으면 헤어지면 됩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된다면 서로 간에 명확한 책임과 약속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게다가 이 결정은 일평생 서로 간에 대한 책임이죠.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혹은 교회 간의 관계에서도 제멋대로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떡하죠?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배운, 주를 사랑하는 많은 성도들에게서 인정받은 신앙고백과 제도로 자기자신을 관리하는 겁니다 치헝(祈恒) : 다들 모두 현실 속의 교회에 대해 토론하고 계셨지만, 교회도 사실 이상 속의 교회도 있죠. 지상에서는, 저는 사도들이 사역하는 교회, 사도들이 전도 중인 교회를 비교적 이상적인 교회라고 봅니다. 사도들이 사역하는 교회는 분명 교파가 없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에서는 고린도 장로회나, 고린도 침례교가 없고, 고린도교회가 있을 뿐이죠. 고린도에 교파가 있었다면 바울이 이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것을 보자면, 하늘나라 교회는 분명 교파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지상에는 존재하지만 천상에서 없어질 것이라면 분명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파 자체를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파의 형성은 인성의 연약함에서 온 것이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의 슬픔이며, 교회의 풍부해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파의 형성은 어쩔 수 없습니다. 루터, 츠빙글리와 칼뱅 모두 성찬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 갈라섰죠. 하지만 그 세분이 개개인의 연약함이 없었다면, 모두 정확하게 성찬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겠죠. 성찬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개혁자들이 갈라서고 심지어는 서로를 죄악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성찬 때문에 생긴 분열이 성령의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더욱이 풍부해진 단어로 형용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실로 사람의 연약함과 견해의 짧음입니다. 개혁자들의 관점이 서로 달라서 그들의 추종자들은 또 서로와의 다른 부분을 힘줘서 강조하고, 그렇게 교파가 형성됩니다. 저는 교파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사람의 연약함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에 교회가 하나만 있다고 한다면 저는 이것을 부정할 사람이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상태죠. 교파가 없는 것이 가장 좋은 상태인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저는 현실에 굴복하고, 현실과 싸우기를 포기하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화제라도 현실에 너무 집중하여 성경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교파 자체가 교회의 타락과 인성의 연약함 그리고 패배로 인해 역사 중에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에 속한다 하고,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에 속한다 하면 바울은 상심할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교파 속에 있을 때 그 사람은 교파주의를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교파가 적어도 성경이 기대한 것은 아니며 하늘에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파는 타락한 사람이 역사 속에서 만들게 된 것이죠. 만약 교파를 깨뜨릴 수 있다면 이것은 교회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물론 어렵습니다만, 이것이 주 그리스도가 기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상에서 타파할 수 없어도 하늘에서는 깨집니다. 끊임없이 교파를 깨뜨리며, 모두가 같이 교통하고, 나누며, 서서히 합일을 이루며, 같이 이상적인 상태를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이 교파 속에서만 명백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 그게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자체에 신앙고백이 있으며, 이 신앙 때문에 우리가 하나인 것이고, 비로소 교회라 불려지게 됩니다. 교회 자체가 신앙고백의 나타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파 안에서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하는 거죠? 제 생각에 이것은 개념적인 착오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교회를 만들었으며, 신앙고백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자기의 깨달음을 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신앙고백이 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교파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독립교회의 노선을 걷자는 의견에는 더욱 더 반대합니다. 오늘날 많은 전도자들이 어떠한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고 어떠한 교파에도 들어가지 않는, 소위 독립교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자기자신을 자신만이 깨어있다는 시험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성경 속에 어떠한 도시도 다른 교회와 교류하지 않는 독립교회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립교회는 굉장히 무섭다는 생각을 합니다. 독립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교파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교파를 인정하신다면 그것은 사람의 연약함 때문에 허락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더욱 더 큰 연약함을 피하기 위해 이 연약함을 허락하신 것이죠. 옌둬 : 나는 치헝의 관점을 절반은 동의합니다. 오늘날 교파의 존재는 확실하게는 인간의 연약함과 타락 때문이지만, 나의 이해와 다른 점은 나는 교파는 연약함과 타락이 가져오는 결과를 억제하고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이 연약함과 타락이 가져다 주는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치헝 : 이런 이해는 아주 좋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웨한(约翰) : 우리가 초기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통상적으로 한가지 사실을 빠뜨립니다. 당시 모든 사물은 시작단계이지 아직 완성체가 아니었죠. 사도들의 전해 내려온 교의도 아직 철저히 변증되지 못했습니다. 사도시대 이후 교부시대까지 교회는 점차적으로 5대 중심교구로 형성됩니다. 그중 예루살렘교구는 교의상 변론문제가 생겼을 때 이미 사도시대처럼 그렇게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죠. 동방과 서방의 문화에 차이가 있고,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더 학파 사이에도 차이가 존재했죠. 심지어 어떤 학파 중 몇몇 지도자들, 예를 들어 터툴리안(特土良), 오리겐(俄利根) 같은 지도자들은 마지막에는 이단이라고 규정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교의의 발전은 굉장히 많은 대가를 치른 이후에야 비로소 오늘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의 실제 역사의 각도로 얘기를 하자면 진리의 문제는 끊임없이 논쟁되어 왔고,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세워지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최후의 판단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상의 매 시기의 교회를 모두 교회라 칭한다면,“어느 시기의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았다. 혹은 그 시기는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고 저주받은 시기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전체 교회의 역사는 분열과 실패, 오류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교파라는 이 말은 18세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전체 교회역사 가운데 놓는다면, 교파현상은 역사 단계마다 모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중국교회가 이런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심지어 중국교회가 이미 이런 연약함을 극복했다고 가볍게 말해선 안됩니다. 교파의 발생은 말할 것 없이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고 혹은 필연적이고 혹은 피할 수 없는 악행 때문이죠.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겸손한 인간은 자신이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가볍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중국교회의 선배들은 교파의 발생을 능히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반교파(反宗派)의 기치를 높이 든 사람들은 뜻밖에도 더 크고 세상 교회와 더 합쳐지기 어려운 교파를 만들었습니다. 처소교회가 비록 교파를 비판하고, 스스로 교파가 없다고 말하고, 성직이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제일 큰 교파입니다. 이로 볼 때, 교파문제를 처리할 때는 실제 교회역사에 입각하여야 합니다. 중국교회와 2000년 교회역사를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중국교회는 그중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더 많이 겸손해야 합니다. 현재 전통적인 중국 가정교회는 분열과 와해되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교파라는 체제에 놓여있고 그들 중 몇몇 지도자와 사역구조가 사실은 교파와 유사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삼자교회의 신학은 정치적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신앙의 핵심(그들은 복음의 핵심을 얘기하지 않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해서만 얘기합니다.)은 사도신경(使徒信经)과 니케아 신경(尼西亚信经), 이 두 가지만 인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교의를 밝혀내는 힘겨운 과정은 교회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중국의 상황에서 삼자교회는 합일을 얘기하면서도 교파는 반대합니다. 사실상 중국교회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었는데 이 현상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가정교회의 선배들이 힘겹게 교의를 밝혀내지 못했다면 오늘날 가정교회라는 길이 있었을까요? 교파는 보통 성경 진리의 체계화에 대한 이해와 표현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이것을 신앙고백이라 하고, 그에 상응하는 교회를 세우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목양과 관리에 대한 기본적인 규범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파의 기본 요소이죠. 교파를 세우기 위해 진리를 밝혀내는 사람은 없으며, 그 과정과 주님의 교회를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교파가 생겨난 것입니다. 중국 본토의 이단도 많고, 외국에서 온 이단들은 더 많습니다. 계속“예수님만 믿으면 뭐든지 괜찮다”라는 태도를 취한다면, 교회는 실질적으로 어떠한 이단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파와 비교파(非宗派)를 생각하기 전에 어느 정도 규범과 강제력을 가진 이단을 막을 수 있는 단체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진리는 체계화가 된 규범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체계화하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으로 이단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죠. 둘째로는 교회가 조직에서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죠. 여기서 또 다른 문제에 맞닿게 됩니다만, 제 생각에는 교회의 연약함은 전도자들의 연약함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간에 연합체계에서 성경에 맞는 규범을 세운다면 소극적인 각도에서 전도자들의 연약함을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세대에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우리의 선배들은 감옥에서 신앙을 굳게 지켰는데 우리는 그것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러할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환경이 너무 다릅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정을 돌볼 겨를 없이 전도를 하러 나갔는데, 우리는 그들의 목양방법과 그 정신에서 뭘 배워야 할까요? 우리는 그들에게서 뭘 받은 걸까요? 우리가 다음세대에 전해줘야 할 것은 또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 앞에 남겨진 과제입니다. 매력 있고, 능력 있는 전도자는 또 교회에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요? 제가 살펴본 바로는 매력 있고, 능력 있는 전도자들은 수많은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은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다음세대에 미치는 영향은 파괴적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사기에 기드온이 있죠. 기드온처럼 적은 대가로 그렇게나 큰 승리를 가져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40년 동안의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동시에 왕권에 관한 문제, 동족상잔의 문제, 우상숭배의 문제도 후손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세대에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 우리 신앙의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종교개혁 시대의 개혁가들과 그 뒤에 나타난 신앙의 선배들에게 빚을 지고, 선배들이 개혁정신을 관철하여 교회가 성경에 대한 해석, 신학의 체계화와 구체적인 교회의 관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세워졌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개개인의 신앙과 도덕적인 모범을 남겨놓는다고 해도, 우리는 다음세대에게 우리와 똑같은 곤경만을 남겨주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신학을 세우고 목양의 기본과 규범을 세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매 세대마다 처음부터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하는 걸까요? 그리스도와 사도를 위주의 신학과 목회는 매 번 그 기본과 그 규범을 다시 정립해야 하는 걸까요? 마지막으로, 교회가 줄곧 대면하고 있던 문제죠. 교회는 세상을 정복하는 동시에 세상도 교회를 정복하게 됩니다. 특히나 지금 중국 사회는 격변 중이며, 많은 문제들이 동시에 출현하고, 서로 얽히고 엉켜, 목회자 혼자 대면하기도 어렵고 성도들을 인도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나의 눈에 보이는 단체가 있다면 좀 더 나아질 것이지만, 지금 독립된 교회는 너무나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사역에서도 서로를 지탱하고 상호 약속이 된 단체가 급하게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사회의 흐름에 대면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연합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떻게 연합을 하느냐, 이 연합 과정 중에 어떠한 약점이 있는가, 우리는 뭘 피해야만 하는가, 뭘 쫓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아직 공통된 인식이 없는 상황에서는 막연히 교파에 대해 얘기를 하더라도, 겸허하고 신중한 교류가 아닌 모두 자기자신의 체험과 관찰에만 집중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 서로 간의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편 : 저는 치헝이 천국에는 교파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을 때, 종말론의 관점에서 교파문제를 인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천국의 때는 하나님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상태이며, 동시에 우리의 신체가 변화되고, 새로운 형태를 띠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신체가 유한하며, 언젠가 썩어 문드러질 연약한 형태인 것처럼 교회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신체로 존재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교파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선 교파문제를 사람의 죄가 가져온 것으로 이해하는가, 혹은 사람의 유한함(진리에 대한 이해의 유한함 등) 때문에 생긴 현상인가를 아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때는 죄의 문제가 섞여 있을 때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종류 사람의 유한함으로 본다면 매우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는 지금 단계의 교파가 가질 수 있는 긍정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장래에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때, 우리는 주님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는 눈물도, 슬픔도, 통곡함도, 고통도 없습니다. 옛일은 모두 지나갔기 때문이죠. 하지만 누군가 지금 당장 주님의 진짜 모습을 봐야 하고, 지금 눈물과 아픔은 없고, 질병이 있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죄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적인 말세론(实现的末世论)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당장 교파가 없는, 천국과 같은 완전히 일치하는 합일된 상태를 추구한다면, 그것도 과도한 현실적인 말세론으로 치우지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교회역사로 봤을 때, 천주교가 상당한 범위 안에서의 대통일(大一统)을 실현하려고 했을 때, 교회를 암흑시기로 빠뜨렸죠. 반대로 종교개혁 이후, 공인된 신앙의 중점을 가지고 서로의 신앙양심을 존중했을 때는 교회가 여러 차례 대부흥의 시기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맨 처음 웨스트민스터에서 형제들이 강조했던 첫 번째 의견인 “그 누구도 진리를 완벽하게 알 수 없다는 것으로 보아 교회의 외부적인 형식이 관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이 관점이 더 올바른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들이 강조했던 두 번째 의견 “이러한 차이가 신앙 속의 기본적인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닐지라도 쉽게 넘겨서는 안되며, 모든 교인들은 그들이 믿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행할 책임이 있다.”는 이것 또한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천주교가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대통일을 하자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교파를 반대하고 있죠. 이러면 실질적으로 많은 독립교회가 생기게 됩니다. 이 때에‘하나 됨’을 얘기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족하는 합일의 기초는 신앙을 최대한으로 요약화한 뒤에 생겨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강조했던 두 번째 의견이 요약화한 합일의 기초에서 많은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을 실천하며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합일하기 위해 많은 문제를 넘겨버리곤 합니다. 이 문제들은 복음의 핵심이 아니니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가 신앙에 대해 점차 간략해지는 상태가 되지 않을까요? 이 시대에 많은 사상과 이단으로 충격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저항할 힘을 점차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위기이죠. 가오바오뤄 :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가 교파에 대해 생각할 때는 지금의 문제와 후에 생길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사이의 대립은 결코 애매모호하게 넘어가선 안됩니다.
치헝 : 교파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독립교회라는 건 아닙니다. 제가 가장 반대하는 것이 독립교회입니다. 독립교회는 교파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보다도 더 큰 위험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파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은 교파가 좋아서가 아닌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죄와 타협한다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그것과 꼭 싸워나갈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에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한 마을에도 교회가 여러 군데 있었지만 저희 고향엔 한 마을에 교회가 한 곳 밖에 없었죠.
한 마을에 교회가 세 군데나 생긴다면 비신자들은 말도 안 된다고 할 것입니다. 교회가 많아서 좋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래서 저는 목표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도 회개하고, 동방정교회도 회개해야 하고, 기독교도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은 계속 저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 침례교가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봐야 합니다. 다같이 천천히 노력하고, 천천히 쫓아가며,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영원히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연약함을 이길 수 없을까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거인을 상대할 때 우리의 창을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현실은 우리의 목표와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내려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얘기가 나왔었는데, 그들 가운데선 계속 팽팽한 대립이 있었으며, 저는 사도들이 줄곧 그 대립을 비판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가 쓴 모든 편지에서 이에 대해 얘기했었죠. 서로를 받아 들이고 같이 식사를 하라고 말입니다. 만약 분리된다면 바울은 분명히 반대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이건 교파와 연관 지어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오바오뤄 :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도 구분이 필요합니다. 같이 식사하는 것은 외적인 것이지만 바울이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복음의 문제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막았을 때도 그의 행동이 복음에 부합하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중에서도 할례를 주장한 할례파들도 있었고요. 우리가 교파를 좋게 본다면 그것은 성도에 대한 보호입니다. 마치 울타리를 치듯이 말이죠. 울타리를 쳤다고 해서 이웃과 교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우리는 종종 연합과 합일을 혼동하곤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연합을 좋아합니다. 연합은 같이 일을 하는 것이죠. 일이 없으면 연합이란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합일이란 것은 좀 더 교파 안에 있는 것으로 성경 속에서 말했던 “진리에서 하나되다(在真道上同归于一)”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의 이해라는 것이죠. 오늘날‘서로 사랑하라’,‘서로를 용납하라’고 얘기할 때는 때때로 그 근본을 허무는 대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옌둬 : 게다가 원래 더 깊이 파고 들었던 단체의 분열을 대가로 하기도 했죠.
편 : 웨스트민스터회의 중에 다른 의견을 가진 형제들도 말했죠.“나눠졌다고 해서 분열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확실하게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것은 가능하다.” 치헝이 초대교회의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사도가 있었을 때에 교파가 없었다고 얘기했었죠. 확실히 그때는 교파라는 단어나 이론 자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유대교회와 이방교회의 분별은 있지 않았나요? 핵심신앙을 제외하고(사도신경이라는 핵심) 그들은 각자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고 또 그것을 따랐죠. 유대교회에 대해 말하자면 모세의 율법 중에 몇 가지를 고집했으며(하지만 복음에 위배되지 않는), 이런 것은 허용되지만 이미 그들만의 교의와 예의가 형성되었죠. 동시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이방교회는 이러한 규칙들을 따르지 않아도 몇 가지 규칙을 따르면 된다고 규정했을 때, 이것 또한 이방교회 특유의 교의가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며, 이것도 이미 교파의 특징이 형성됐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분열하지 않고 합일합니다. 사람의 유한함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규범들을 지키면, 우리는 합일할 수 있습니다.
치헝: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한 방에서 살고, 우리는 각방을 쓴다는 것이죠.
후시미엔(胡西缅) :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오랜 교회역사에서 이어진 것입니다. 즉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에베소서 4:13). 이 말씀처럼 성령은 교의를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하지만 무교파의 성경에 대한 인식이란 것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전도자 개인에 대한 숭배를 불러올 수 있는데 이것은 굉장한 문제이며, 크나큰 연약함입니다. 교회의 치리 제도로 보자면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머리로 모시고, 젊은이들이 연장자에게 순종하는 등의 규정 외에는 명확한 분부가 없습니다. 교회를 치리할 때 어떠한 제도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목양의 현실적인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다른 시대의 교회들은 조금씩 다른 치리 제도를 가지고 있었죠.
치리 상의 합일을 위해서라도, 진리상의 합일을 위해서라도, 역사적인 전통을 참고할 뿐만이 아니라 그대로 가져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역사가 남긴 유산은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것은 교파형식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무교파는 2000년의 대공교회의 전통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무교파의 사람은 아닙니다. 치헝이 말했던 것에도 동의합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입니까?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나되게 하시고” 라고 기도하신 것은 주님이 기도하실 때, 주님이 재림하실 때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으니 그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이것을 이루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물론 이 기도는 많은 종교혼합주의자(宗教混合者), 종교통일주의자( 统一者)들에게 오용되고 있습니다.어찌되었던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으며 저희는 이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주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합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며,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역사 속에 전해져 오던 성경에 대한 인식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종합하는 것, 혹은 교의입니다. 동시에 자신과 관점이 다른 형제들과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으며 끊이지 않는 교류를 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교류(联络)입니다. 에베소서에는 교류에 대해 많은 말씀이 있으며, 교파의 무서움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 다른 점을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며, 그것을 근본적으로 피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합니다. 적극적인 방식은 서로 교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가지 상황 속에서 이 교류가 끊길 수 있는데, 첫째로 교의 중에 세세한 것들이 강조되며, 심지어 규칙으로 정해지기도 하며, 신조 혹은 교의의 문답 중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수 없습니다. 연약함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이 연약함 때문에 다른 형제들이 자신과 다르면, 그것을 강조하고 규칙으로 만들게 되고, 그렇게 다른 형제들과 교류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그 ‘교회들의’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라”(에베소서 4:2-3)라고 합니다. ‘교회들의’는 제가 덧붙였습니다. 맥락상 그 당시의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이지 에베소서교회의 성도들에게만 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의 하나를 힘써 지킨다면 ‘진리에서 하나 되어야’합니다.‘진리에서 하나 됨’은 우리의 교류를 지켜줄 것입니다. 이 교류를 파괴하는 것은 나와 다른 형제들의 다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들과 다른 입장에 서서 얘기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는 것은 사람의 연약함을 잊은 것입니다. 다름을 강화하면 다른 형제들과 얘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고, 다른 형제들도 교류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구역 안에서 구원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일치한다는 전제하에서 어느 정도의 차이, 교회의 관리방법과 기타 많은 방면에서의 차이는 보류하며, 서로를 관용으로 받아주는 것이 진정한 합일이라 생각합니다. 웨한 : 한 교파가 형성되면 교파 안의 교회와 그 지역의 다른 교파의 교회와 교류가 적어집니다. 이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지역 조직이나 교파 조직이 건립되면 그 계획이나 목표 안에서 같은 지역의 다른 교회에 대한 도움이나 협력 같은 게 적은 것도 사실이죠. 이것이 교파가 비판을 받게 되는 이유입니다.
가오바오뤄 : 전 교파를 지지하지만 교파주의는 반대합니다.
후시미엔 :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총회죠. 형제 지역 간에 서로 협력하는 대신 전국적으로 같은 체계를 설립한다면, 이 총회는 다른 단체와의 교류를 막게 됩니다. 총회에선 치리의 강화와 차이점에 대한 강조가 있기 때문이죠. 사실상 가정교회가 8,90년대에 부흥하던 때도 크게 합일했던 적도 있으며 크게 분열하던 때도 있었죠. 이 합일은 사실상 선한 형제들의 교류와 진리에 대한 기초와 가는 길과 경건함의 추구에서 기본적으로 일치한 교회들이 큰 단체를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도 여러 큰 단체들은 교파의 형식이 아닌 단체라는 방법으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모 지방의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는 여러 방면에서 비교적으로 일치합니다. 교회의 치리 체계로 보자면 장로제죠. 처음에는 주교제였지만 지금은 장로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안드리에 : 하지만 그건 이상적이지 못합니다. 같이 있다고 해서 합일은 아니며 자발적인 것은 자각적인 것이 될 수 없어서 다음세대가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가오바오뤄 : 총회는 상설 기구가 아닌 한 회의입니다. 평소에는 지역회가 많은 것을 운영하죠. 총회는 회의상의 기구입니다. 정기적으로 매년 1회 혹은 이단이 나타났을 때 특별모임을 갖곤 하지만, 상설 기구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그것은 대회이며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 간의 문제가 있었을 때, 바울이 이 문제를 대회에 가지고 옵니다. 총회라는 것은 회의입니다.
후시미엔 : 저도 이런 회의식의 교류에 대해 찬성합니다. 다른 지역회와 아름다운 성도의 교류가 있다면 일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의 모임이라도 중요한 교의에서 일치를 보고, 심지어 서로를 권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지역회의 규칙은 우리에게 이런 권리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지만 상대방의 죄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제도는 사람의 연약함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거만함은 교회의 전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크나큰 거만이죠. 하지만 꼭 자신과 생각이 다른 형제들과 교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미주> 〔 1 〕 布鲁斯• L. 雪莱:《基督教会史》(第三版),刘平译,上海人民出版社,2012年,第311-312页。
출처 | 《敎會, CHURCH CHINA》, 2014년 5월 3호(통권 47호) 번역 | 황광희 · 자원봉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