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27  통권 144호     필자 : 김성곤
[한시 강좌]
두보의 <江南逢李龜年> (下)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기왕의 저택에서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최구의 집에서는 또 몇 번을 들었던가
지금 한창 풍경 좋은 강남 땅
꽃이 지는 시절 그대를 또 만났구료

岐王宅裏尋常見(기왕택리심상견),
崔九堂前幾度聞(최구당전기도문).
正是江南好風景(정시강남호풍경),
落花時節又逢君(낙화시절우봉군).

1 李龜年(이구년) - 당나라 성당(盛唐)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에 활동했던 음악가. 특히 노래를 잘 불러 현종(玄宗)의 총애를 받고 궁정음악가로 활동했다. 안록산의 난 이후로 강남 땅을 유랑하며 노래를 팔아 호구하는 처지가 되었다.
2 岐王(기왕) - 당 현종의 동생으로 이름은 이범(李範). 음률에 뛰어났다.
3 尋常(심상) - 늘. 자주.
4 崔九(최구) - 최척(崔滌). 현종 때 전중감(殿中監) 벼슬을 지냈으며 중서령(中書令) 최식(崔湜)의 아우이다. 궁중에 출입하며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같은 항렬의 형제 중에 아홉 번째 였으므로‘최구’라고 한 것이다.
5 江南(강남) - 여기서는 호남성(湖南省) 일대를 가리킨다.
6 落花時節(낙화시절) - 음력 3월 늦은 봄을 가리킨다. 동시에 늙어가는 사람이나 쇠락해가는 사회를 비유한다.
7 君(군) - 여기서는 이구년을 가리킨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 악사 어르신, 전 한림 봉공 이백(李白)을 통해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몇 번이고 들어도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모란이 피던 침향정의 이야기 말입니다.” 노인의 얼굴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그의 쭈글쭈글한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노래 한 자락이 흘러나왔다.

구름은 님의 치마, 꽃은 님의 얼굴
봄바람 난간을 스칠 체 이슬꽃 짙어라
군옥산에 만난 선녀런가
달나라 누대에서 만났던 선녀런가

雲想衣裳花想容, 春風拂檻露華濃.
若非群玉山頭見, 會向瑤臺月下逢.

이구년의 아득한 노랫자락 한 소절을 타고 나는 정확히 26년 전인 천보 3년 낙양의 봄날로 돌아갔다. 모란이 한창 피던 늦봄 현종 황제로부터 황금을 하사받고 산으로 돌아가던 태백 형을 나는 낙양에서 처음으로 만났었다. 그는 이미 천하의 주목을 받고 있던 대시인이었다. 천상으로부터 온 듯 아름다운 그의 시와 분방하기 그지없는 그의 삶이 만들어 낸 일화들은 설화가 되고 전설이 되어서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낙양에서 이제 막 문단을 들락거리며 문인들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나에게는 그저 하늘같이 아득한 경지였다. 낙양 문단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거창한 잔치를 열었고 나 역시 낙양 문단의 풋내기 시인이었던 탓에 태백 형을 볼 수가 있었다. 나로서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그였는데 그가 술이 그윽하게 취하여 내 쪽으로 건들건들 다가와서는 내가 지은 <태산을 바라보며(望岳)>의 마지막 구절을 큰 소리로 외치며 내 어깨를 쳤을 때 내 가슴은터질듯했었다.

“내 반드시 태산 꼭대기에 올라 자그마한 산봉우리들을 다 굽어보리라
(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이 얼마나 대단한 기백인가! 여보게 두보선생, 아니지 나보다는 한참 어리니 아우라 불러도 되겠지. 여보게 두보 아우, 나는 자네의 시를 보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직감했소. 위대한 시인이 이끄는 위대한 시의 시대가 곧 도래하게 될 것이야. 자, 내가 위대한 시인에게 바치는 존경의 술을 한 잔 받으시오.”

그날 이후 나는 태백 형과 호형호제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고, 천보 3년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함께 개봉, 제남 등지를 여행하며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이 여행은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값진 날들이 었으니 나는 그가 동서남북을 횡행하며 경험했던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정치적 이상과 좌절, 문학적 성취에 대한 자부와 고민에 대해서도 낱낱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나에게는 충실하기 그지없는 세상 공부요 문학 수업이었던 것이다. 그해 가을이 막 깊어가는 산동성 노군(魯郡)의 범십(范十) 은자를 찾아가는 길에 그가 들려줬던 천보 2년 흥경궁 침향정에서 있었던 궁정(宮庭) 일화는 얼마나 환상적이었던지 마치 하늘나라 천궁에서 벌어진 일인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들려줬던 일화의 대강은 이러하였다.

천보 2년 늦봄 현종 황제와 양귀비가 흥경궁 침향정에서 새로 핀 탐스러운 모란을 감상하고 있었다. 이 황제의 잔치자리에는 당대 최고의 가수인 이구년이 이끄는 이원제자(梨園弟子)들이 분위기를 돋굴 노래와 춤을 헌상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황제의 명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종이 새로운 주문을 내놓았다.

“양귀비가 이처럼 새로 곱게 단장을 했고, 또 모란꽃도 이렇게 새로 피지 않았느냐. 어찌 노래만 옛날 것이어서야 말이 되겠느냐.”

현종이 이미 상당한 수준의 작곡가이기도 했으므로 작곡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사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한림학사 이백이 보이지 않았다. 현종이 환관들을 장안 저자거리로 보내서 이백을 찾게 했다. 황제의 짐작대로 이백은 대낮부터 장안 저자거리의 술집에서 술이 떡이 된 채로 잠들어 있었다. 환관들이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황제가 부르니 어서 궁궐로 가자했더니 겨우 눈을 뜨고서 혀 꼬부라진 말투로 “누가 나를 불러? 나는 술에 취한 신선이니라!” 했다.

옥신각신 배에 태워 흥경궁에 도착해서는 찬물로 세수하게 하고 침향정으로 부축해갔더니 황제의 최측근이자 권력자였던 환관 고력사가 맨 먼저 달려나와 이백에게 황제의 뜻을 전하였다. 이백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고는 고력사에게 진흙으로 엉망이 된 자신의 장화를 벗기라고 호탕하게 명령하니 고력사로서는 분통터질 일이었으나 주변의 시선도 있어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대로 신발을 벗겨주었다. 무거운 신발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백이 휘청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조는 듯 하다가 일필휘지로 내갈겨 써서 턱 황제에게 바치니 그것이 바로 유명한 <청평조사삼수(淸平調詞三首)>이다. 방금 이구년이 불렀던 노래는 바로 그 첫 수였다. 내가 이구년의 첫 수에 응수해서 제2수를 읊었다.

한 떨기 붉은 꽃 이슬에 향기로워
무산 신녀는 공연히 애만 끊나니
묻노니 한나라 궁전의 누구와 닮았나
사랑스런 조비연도 새 단장해야 겨우 비슷할까

一枝紅艶露凝香, 雲雨巫山枉斷腸.
借問漢宮誰得似, 可憐飛燕倚新事.

이구년은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가 읊는 시를 듣고 있었다. 아마도 그 역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천보 연간, 그 태평한 세월, 영광의 시절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간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던 그가 돌연 물었다.

“한림학사 이백을 만났었소?”

“어찌 만났기만 했겠습니까? 호형호제하며 막역하게 지냈었지요. 하지만 천보 3년 늦가을 산동성 석문(石門)에서 헤어진 뒤로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9년 전쯤인가 당도(當僅)의 친척집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이백은 참으로 대단한 시인이었소. 황제가 그를 그렇게 돌려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게 다 그 못된 고력사 때문이었다오. 이 청평조사를 노래할 때마다 그때 그 시절이 떠올라 생각이 복잡하다오.”

“고력사가 양귀비에게 이백을 참소한 일 말이지요?”

“그렇소. 당신이 방금 읊었던 이백의 청평조사 제2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외다.”

침향정에서 이백의 장화를 벗겨주었던 일로 수치심에 절치부심하던 고력사는 침향정 모란 잔치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양귀비를 찾아가 청평조사의 가사를들먹이며이백을참소하였다.

“마마, 한림학사이백의시가맘에드시옵니까?”

“들다마다요, 나와 모란을 서로 엇섞어서 묘사하니 내가 모란인지 모란이 나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것이 여간 맘에 드는 게 아니었어요.”

“근데 좀 찜찜한 것이 있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황제께서도 흡족해하셨고, 이구년과 이원제자들도 다들 좋아했었는데요.”

“제2수에서 마마를 한나라 조비연에 비유한 대목이 맘에 걸립니다. 왜 하필 조비연이었을까요? 조비연이라면 한나라 성제(成帝)의 성총을 흐리게 한 여인이 아닙니까? 혹시 마마를…….”

그날 밤 양귀비는 침소에 든 현종 황제에게 이백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고, 양귀비의 치마폭에서 세상사를 잊고 살던 현종은 곧바로 이백에 대한 관심을 접어버렸다. 이백은 결국 한림학사를 사직하고 궁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치국제세(治國齊世)의 거창한 이백의 꿈은 모란이 화사하게 핀 어느 봄날 잠깐 꿈꾸었던 한바탕의 백일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침향정의 봄날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벌써 밤이 깊어졌다. 술도 제법 되어서 거나해진 이구년은 이백의 유명한 <백저사(白紵辭)>를 노래했다. “맑은 노래 울리며 하얀 이를 드러내는 북방의 가인과 동쪽의 절세미인이여, 녹수곡(濫水曲) 멈추고 백저곡(白紵曲) 노래하며, 긴 소맷자락 얼굴을 스치며 일어나 춤추누나. 구름은 밤 되어 걷히고 찬 서리는 내리는데, 북풍은 변방의 기러기에 불어 가누나. 고운 얼굴 방에 가득하니 즐거움 끝이 없어라.” 이 <백저사>는 이백이 살아있을 때 이미 크게 유행한 노래로 가무계에서 그 인기가 대단했었다. 갑자기 세상 떠난 태백 형이 너무 그리워 급기야는 눈물을 쏟고 말았는데, 이구년은 노래를 멈추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두 대인, 부탁이 있소. 이백이 천하의 시인인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소. 그런 이백이 존경하고 인정했다면 두 대인 역시 천하의 시인임에 틀림없을 것이오. 그래서 하는 부탁인데, 두 대인께서 나를 위해 시 한 수 써주실 수 있겠소? 내개원, 천보 한 시절을 풍미하던 가수였음에도 말년에는 이토록 영락하여 쓸쓸하기 그지없으니 내가 죽은 다음에야 누가 내 이름자 하나 기억이나 해주겠소? 다행히 천하의 시인 이백을 만나 청평조사의 배경에 내 이름을 희미하게 올렸으나 이것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는구려. 만일 두 대인께서 내 이름자가 든 시 한 수를 써주신다면 아마도 내 짐작컨대 내 이름자 역시 대인의 시명과 함께 불후하게 될 것이오. 오늘 술값은 내가 낼 터이니 노망난 늙은이의 주책이라 여기지 마시고 잘 좀 부탁하외다.”

부탁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벌써 그에게 줄 절구시 한 편에 대한 구상을 끝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비싼 술 한병 더 시키겠습니다. 하하. 벌써 다 써놨습니다. 제목을 ‘호남봉이구년(湖南逢李龜年)’, ‘ 호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로 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구년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호남보다는 강남이 낫지 않을까? 요즘 너도나 도 강남스타일 어쩌구 저쩌구 하던데….”


김성곤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