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기왕의 저택에서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최구의 집에서는 또 몇 번을 들었던가 지금 한창 풍경 좋은 강남 땅 꽃이 지는 시절 그대를 또 만났구료
岐王宅裏尋常見(기왕택리심상견), 崔九堂前幾度聞(최구당전기도문). 正是江南好風景(정시강남호풍경), 落花時節又逢君(낙화시절우봉군).
1 李龜年(이구년) - 당나라 성당(盛唐)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에 활동했던 음악가. 특히 노래를 잘 불러 현종(玄宗)의 총애를 받고 궁정음악가로 활동했다. 안록산의 난 이후로 강남 땅을 유랑하며 노래를 팔아 호구하는 처지가 되었다. 2 岐王(기왕) - 당 현종의 동생으로 이름은 이범(李範). 음률에 뛰어났다. 3 尋常(심상) - 늘. 자주. 4 崔九(최구) - 최척(崔滌). 현종 때 전중감(殿中監) 벼슬을 지냈으며 중서령(中書令) 최식(崔湜)의 아우이다. 궁중에 출입하며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같은 항렬의 형제 중에 아홉 번째 였으므로‘최구’라고 한 것이다. 5 江南(강남) - 여기서는 호남성(湖南省) 일대를 가리킨다. 6 落花時節(낙화시절) - 음력 3월 늦은 봄을 가리킨다. 동시에 늙어가는 사람이나 쇠락해가는 사회를 비유한다. 7 君(군) - 여기서는 이구년을 가리킨다.
때는 영태(永泰) 원년인 765년 4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엄무(嚴武)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주인을 잃은 성도(成都)는 다시 대란에 빠졌다. 이곳 성도에 더 머물 이유가 없어진 나는 가족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가주(嘉州), 융주(戎州), 유주(押州), 충주(忠州)를 거쳐서 운안(雲安)으로 갔다. 운안에 이른 뒤 병이 깊어져서 이듬해 대력(大曆) 원년(766) 봄까지 머물렀다. 이 시기 지은 <상징군과 이별하다(別常徵君)>에서 “아이가 부축해도 외려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신세/ 온 가을 지나도록 병으로 누웠다네/ 백발 머리 새로 감았더니 더욱 숱이 적고/ 겨울옷은 몸이 말라 헐렁하기만 하네”라고 할 정도로 내 건강은 아주 염려스러운 상황이었다.
대력 원년 늦봄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자 운안을 떠나 기주(夔州)로 향했다. 기주는 사천성 삼협의 하나인 구당협(瞿塘峽) 부근이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대력 3년(768) 봄까지 대략 2년간을 보냈다. 이 시기 역시 경제적으로 여전히 어려운 시기였지만 나는 430수나 되는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내 전체 작품의 10분의 3을 넘는 양이니 평균적으로 매월 20여 수를 쓴 셈이다. 인생의 저물녘에서 쓴 이 시기의 시들 속에 나는 낙조의 장엄한 색채를 담고자 했다. 전과 같이 노골적인 사회적 비판이나 분개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깊은 우수와 비애 속에 세상에 대한 선의와 애정을 담고자 했다. 이 시기 지어진 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는 칠언율시 <등고(登高)>다. 이 시를 쓰고 더욱 깊어진 향수 때문에 나는 한동안 많이 아팠다.
바람 급하고 하늘 높은데 원숭이 울음 슬프다. 물가 맑고 모래 흰 곳에 새는 날아 돌아온다. 끝도 없이 낙엽은 쓸쓸히 지는데 다함없는 장강은 꿈틀꿈틀 오는구나. 만 리 슬픈 가을 늘 나그네 되어 백년 병 많은 몸 홀로 누대에 오른다. 간난에 머리 하얗게 센 것 심히 한스러운데 노쇠하여 근래 들어 탁주잔조차 멈추었어라.
風急天高猿嘯哀 渚淸沙白鳥飛乂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艱難苦恨繁霜靈 念倒新停濁酒杯
대력 3년(768) 정월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기주를 출발해 삼협을 지나 호북성(湖北省) 강릉(江陵)으로 나왔다. 이곳에서 다시 한수(漢水)를 따라 북상하면 고향 낙양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에서 일어난 변란으로 고향으로 가는 북행길은 막혔고, 어쩔 수 없이 머물게 된 강릉에서의 생활은 어렵기만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호남(湖南)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호남에는 친한 벗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특히 형주(荊州) 자사 위지진(韋之晉)은 나와 각별한 사이이니 그에게로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형주로 가는 길에 악양(岳陽) 동정호(洞庭湖)에 들렀다. 동정호 호변에 세워진 악양루에 올라 바다와 같이 광활하기 그지없는 호수를 대하니 내 떠도는 신세가 더욱 초라해져서 심히 서글퍼졌다.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지어서 “오와 초는 동남으로 나뉘었고, 해와 달이 밤낮으로 떠오른다(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라고 말해 동정호의 광활함을 그럴듯하게 묘사하기도 했는데, 이 시의 5,6구에서 “친척도 친구도 한 자 소식 없고, 늙고 병들어 외로운 배 한 척 있을 뿐(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이라는 신세 한탄은 당시 내가 처한 가혹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악양에서 겨울을 보내고 대력 4년(769) 봄 거센 풍랑에 시달리며 마침내 형주에 도착해서 오랜 벗 위지진을 만났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위지진은 타지로 발령이 나서 형주를 떠나게 되었고, 전근한지 얼마 안 되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천리 길을 찾아왔건만 나는 다시 의지할 곳을 잃어버렸다. 친구를 잃은 상심과 생활에 대한 염려로 내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다.
나는 담주(潭州)로 가서 무너져가는 몸과 마음을 추스리면서 그곳의 인사들과 이러구러 교유하면서 대력 4년을 보냈다. 그때 소환(蘇渙)이라는 친구가 찾아와 좋은 시우(詩友)가 되어주었기에 그나마 그 어려운 시절을 버틸 수가 있었다. 그리고 대력 5년(770) 봄 왕년의 저명한 음악가 이구년(李龜年)을 만났던 것이다. 꽃잎이 날리는 늦은 봄날 담주의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길거리 악사가 있었다. 그의 청아한 노랫가락에 떠들썩하던 저자거리가 한 순간 고요해졌다.
홍두는 남국에서 나지요 봄이 와 몇 가지나 싹이 났나요? 그대여 이 홍두를 많이많이 따 주세요 홍두는 그리움 하염없이 깊어지게 하는 것이니까요.
紅豆生南國, 春來發幾枝. 願君多采遠, 此物最相思.
유명한 왕유(王維)의 <상사(相思)>라는 시에 곡을 붙인 노래였다. 그리움을 노래한 이 왕유의 <상사>는 본래 왕유가 이구년이라는 가수에게 준 시여서 <강상증이구년(江上贈李龜年)>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가사가 단순하면서도 비유와 함축이 깊고 노래 가락 또한 애절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불렀다.
멀고 먼 남국에 와서 왕유의 <상사>를 듣자니 벌써 세상을 떠난 왕유가 너무나 그립다. 구슬픈 노래 가락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여리게 반복되며 이어지는 동안 가수의 목소리에 정한이 가득 베어나고 둘러선 사람들 역시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멀찌감치 서서 노래 가락에 의지해 아련한 개원 성세의 지난 시절을 더듬던 나는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가수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앞쪽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자리에 앉아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인의 행색을 자세히 살피던 나는 그만 놀라서 숨이 콱 막혔다. 그는 바로 개원 성세에 현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궁정 악사 이구년이었다. 노래뿐만 아니라 피리에도 뛰어났고, 특히 현종이 좋아했던 갈고(珏鼓)라는 북 연주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던 사람, 작곡에도 뛰어나 그가 창작한 <위천곡(渭川曲)>은 황제로부터 극찬을 받았었다.
현종이 이끌던 악단 이원제자(梨園弟子)의 리더로서 그가 현종에게 받았던 총애는 대단했었다. 왕공귀인들은 늘 그를 초청하여 노래를 듣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고 그가 받은 사례금은 엄청난 액수여서 낙양에 건축한 집은 그 규모가 권문세족의 저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 초라한 늙은이가 정말 그 이구년이 맞는 것일까?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그 시절의 영화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 그를 본 것은 개원 시절 낙양의 문단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현종의 동생인 기왕(岐王) 이범(李範)의 집이 낙양에 있었는데, 기왕은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시인들과 가객들이 항상 그의 집에 넘치고 있었다. 나도 몇몇 시인 선배들을 따라 그 집에 드나들면서 이구년의 노래를 몇 번인가 들을 수 있었다. 전중감(殿中監) 최척(崔滌)의 집에서도 이구년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는데, 최척은 당시 재상이었던 중서령 최식(崔湜)의 동생으로 현종 황제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궁중에 자주 출입하면서 이구년과 특별한 사귐이 있었던지 이구년은 자주 그의 집에 들렀었다. 젊은 시절 이구년의 목소리는 청아하면서도 힘이 있어서 듣는 이들을 늘 매혹시켰다. 내가 천보 연간에 벼슬을 구하기 위해 장안으로 이사해 십년 간 권문세족의 식객으로 신산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도 이구년은 장안에서 제일 잘나가는 가객이었다. 식객들의 말미에 자리한 나는 늘 멀리서 들리는 그의 애잔한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남은 술잔을 쓸쓸히 기울이곤 했었다. 내가 회상에 젖어있는 동안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걷고 돌아서고 있는 이구년에게로 가서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이악사어른, 전좌습유 낙양 사람 두보가 인사 올립니다!”
노인이 고개를 돌려 흐린 눈빛으로 두보를 바라보았다. “뉘신지….”
“이 악사께서는 저를 잘 모르실 겁니다만, 저는 어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개원 연간에 낙양의 기왕의 집에서, 전중감 최척의 집에서 어른을 몇 차례 뵌 적이 있사옵고, 천보 연간 장안에 있을 적에는 먼 발치에서 어른께서 노래하시는 모습을 자주 뵈었더랬습니다.”
이구년이 눈이 빛나면서 입가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그는 주름지고 야윈 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반갑소, 두 대인!”나는 그와 함께 근처 주막으로 갔다. 이구년은 어지간히 목이 말랐던지 연거푸 술 석 잔을 마셨다. 그리고 나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좌습유 두보라고 했소? 현종임금시절에 좌습유를 지냈소?”
“아닙니다. 숙종 임금 때 좌습유를 지냈습니다. 현종 때는 병조에서 무기고를 관리하는 솔부주조참군(率府胄曹參軍)이라는 미관말직을 지냈습니다.”
이구년의 눈이 빛났다.
“혹시 황제께 <삼대례부(三大禮賦)>를 올려서 집현전에 불려가 시험을 치렀던 사람 아니오?”
“아니 그 일을 어찌 아십니까?”
“하하, 당신이 지은 <삼대례부>가 황제에게 전달되었던 날 궁전에서 큰 잔치가 있었다오. 그날 주상께서 막 노래를 끝낸 나를 불러서는 <삼대례부>를 보여주셨소. 기가 막힌 문장이라면서 연신 칭찬하시고는 명을 내려 이 글의 작자를 집현원으로 불러서 문장을 시험하라 하셨소. 나는 속으로 큰 문장가가 났으니 대단한 벼슬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겨우 솔부참군이었구료.”
나는 그런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그 시절 생각을 하면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대하고 얼마나 설레었던가. 집현원의 내로라하는 학사들이 위시하는 자리에서 얼마나 의기양양 문재(文才)를 뽐냈던가. 하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무기고를 관리하는 창고지기에 불과했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 악사 어르신, 전 한림 봉공 이백(李白)을 통해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몇 번이고 들어도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모란이 피던 침향정의 이야기 말입니다.”
노인의 얼굴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그의 쭈글쭈글한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노래 한 자락이 흘러나왔다.
구름은 님의 치마, 꽃은 님의 얼굴 봄바람 난간을 스칠 제 이슬꽃 짙어라 군옥산에 만난 선녀런가 달나라 누대에서 만났던 선녀런가
雲想衣裳花想容, 春風拂檻露華濃. 若非群玉山頭見, 會向瑤臺月下逢.
<하편에서 계속>
김성곤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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