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도풍산의 루터교회.jpg) 20세기 초기 중국기독교의 특징은 1920년대에 최고조에 올랐던 반기독교운동과 토착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반기독교운동은 19세기와 달리 1915년경에 촉발된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신문화운동의 이념은 반제국반봉건(反帝國反封建)을 전제로 한, 과학과 민주주의 등의 서양 사상이었다. 교안(敎案)이 서양문화인 기독교에 대한 이질감, 그 배경이 되는 제국주의를 향한 것이었던 반면, 신문화운동의 반기독교적 감정은 오히려 기독교가 진보적인 서양사상과 배치되는 후진사상이라는 이유에서 출발하였다. 즉 종교는 과학과 합리주의에 배치된다는 것으로, 시대에 뒤떨어지며, 인류의 진보를 막는다고 보았다.
진독수(陳獨秀, 1879-1942), 채원배(蔡元培, 1868-1940), 이대소(李大釗, 1889-1927), 호적(胡適, 1891-1962) 등이 1915년경부터 이러한 주장을 하였으며, 1920년대 초 베이징,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등 대도시에서 강연, 팜플렛 등을 통하여 빠르게 반기독교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반기독교운동의 최고조기는 1924년-1927년까지의 국공합작(國共合作) 시기였는데, 주로 신문화운동, 민족주의와 관련된 것이었지만, 공산주의 사상과의 관련성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22년 상하이에서 최초로 조직된 ‘비기독교학생동맹’이 발표한 3월 9일의 선언문에는, “오늘의 기독교와 교회는 압박계급을 도와 피압박계급을 약탈하며 전자를 부양하고 후자를 압박하는 악마이다. 우리는 이렇게 잔악하고 압박적인 비참한 자본주의 사회는 불합리하고 비인도적인 것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와 결사전을 할 수밖에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반기독교운동에 대한 기독교계의 대응은 먼저 회개운동, 경건운동으로 일어났다. 즉 일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이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였다는 것과, 제국주의의 편에 섰던 경우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었으며, 또 그러한 지적을 거울삼아 자기를 살피고 더욱 순전한 신앙을 사모하며 개혁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기독교가 중국 인민과 사회, 국가와 함께 호흡하는 공동 운명을 지닌 단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토착화를 통해서 반기독교운동에 대응하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일어났다. 주로 옌징대학(燕京大學), 동우대학(東吳大學) 등의 교수와 기독교 인사들이 《청년진보(靑年進步)》,《생명월간(生命月刊)》,《진리주간(眞理週刊)》,《진광잡지(眞光雜誌)》,《문사월간(文社月刊)》등의 잡지에 기고하여 토착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뢰천(吳雷川, 1870-1944) 같은 이는 자기의 신앙을 조정하여,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예수의??자기를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舍己愛人)??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죄성을 벗어나 사회진보를 추진할 유일한 길임을 설파하였다. 조자신(趙紫宸, 1888-1979) 역시 윤리적 생활, 사회적 신앙, 현세적 실천 등을 중시하게 되었다. 또 정치적, 문화적, 사상적 변증운동이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와의 단절을 주장하고 애국주의 운동에의 참여를 주장하였으며, 문화적으로 기독교의 전통적 성격을 드러내려고 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과학사상, 공산주의 사상과 기독교 사상과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한편 교회의 토착화 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토착교회(本色敎會)운동이다. 토착교회라 함은 1922년 상하이 전국기독교대회에서 나온 말로서, 경제적 자립(自養), 행정적 자치(自治), 문화적 자전(自傳)의 탈서양적이면서 민족적인 교회를 말한다. 이러한 요구는 선교 초기에는 미약하였지만, 청나라 말에 일부 선교사들에 의하여 이미 제기되었고, 1873년 광둥성 광저우(廣州)의 진몽남(陳夢南)에 의해서 조직된 월동광조화인선도회(?東廣肇華人宣道會)를 필두로 하여 중국인에 의한 토착교회 운동이 이어졌다.
1922년 결성된 중화기독교회(中華基督敎會)는, 토착적인 교회를 망라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중화기독교회는 1927년 그 산하에 19개의 각 교단, 선교단체가 포함되어 중국기독교 최대의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예탁성(倪柝聲, 1903-1972)가 1922년에 세운 기독교인집회처(基督徒聚會處)는, 기독교와 전통 중국의 가정을 접목시킨 교회로서, 탈서양적인 교회제도와 영해(靈解)식의 성서해석, 반(反)서양적인 신학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교회였다.
또 참예수교회(眞耶?敎會)는 1917년에 위바울(魏保羅, 1877-1919)이 세운 것으로서, 성령의 충만과 신유축귀(神?逐鬼)를 강조하는 오순절 계통 최초의 독립적인 교회였다. 예수가정(耶?家庭)은 경전영(敬奠瀛, 1890-1957)이 1922년 산둥의 마장(馬庄)에 설립한, 기독교 신앙과 경제자립의 공동체였다. 또 베이징기독교인회당(北京基督徒會堂)은 왕명도(王明道, 1900-1991)가 1924년 자신의 집에서 조직한 성경공부반을 확대하여 1936년 정식으로 베이징에서 설립한 모임이다. 베이징대학 홍루(紅樓) 베이징대학 홍루는 베이징 천안문 근처의 오사대가(五四大街) 29호에 위치해 있다. 베이징대학은 1912년 5월 베이징 임시정부가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의 명칭을 변경하면서 설치되었고, 초대 학장은 엄복(嚴復, 1853-1921)이었다. 홍루는 채원배가 1917년 초 학장이 되면서 벨기에의 차관을 받아 지은 건물이다. 지상 4층, 지하 1층의 고전적인 서양 건물인데,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기에 홍루라고 불렀다.
1918년 초 이대소가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으로 있을 때, 베이징대학은 북쪽지역 혁명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五四'운동 시기 홍루와 홍루 북쪽의 광장은 애국활동의 주요장소였고, 그것은 반기독교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1918년 마오쩌둥(毛澤東)은 베이징대 도서관 보조원으로 임명되어 이곳에서 무수한 청년혁명가들과 접촉하였다. 1952년 베이징대가 해정구의 옌징대학(燕京大學) 자리로 이전해 간 후, 이곳은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이 사용해 오다가 현재는 신문화운동기념관으로 개방되고 있다.
칭화대학 청화학당(淸華學堂)과 대강당(大禮堂) 칭화대학(淸華大學)은 베이징 서북쪽 옛 황실(皇家)의 원림(園林)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칭화대학의 전신(前身)은 칭화학당(淸華學堂)으로서 1911년에 세워졌다. 의화단의 난 이후의 배상금(庚子賠款)을 가지고 미국 유학생 예비학교로서 지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1912년에 청화학교(淸華學校)로 개명되었고, 1925년 대학부가 설립되면서 4년제 대학생을 모집하였으며, 국립 칭화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28년이다. 칭화학당(淸華學堂) 건물은 독일의 고전적 풍격을 지녔는데 학교 초기의 중심 건물이다. 대강당(大禮堂)은 칭화학당의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1922년 4월 4일-9일에 칭화학교(淸華學校) 강당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세계기독학생동맹(WSCF) 11차 대회에 대한 광고가《청년진보(靑年進步)》에 실리자, 상하이의 일부 학생들이 모여 3월 9일 상하이 비기독교 학생동맹의 조직을 선언하고 전국에 호소하면서 세계 기독학생동맹 대회의 개최를 반대하고 나섰다. 이 선언은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으며, 얼마 되지 않아 베이징대학에서 비종교대동맹(非宗敎大同盟)이 조직되었고, 3월 23일에 드디어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문에 서명한 79명 중에는 많은 교육자, 지식인층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4월 9일에는 비종교대동맹 주최로 종교 반대를 목적으로 한 강연회가 베이징대학에서 개최되어 많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운동은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반기독교 단체가 결성되었고, 출판물, 강연회, 반대시위 등이 줄을 이었다. 1924년 8월에는 상하이에서 비기독교동맹(非基督敎同盟)이 조직되면서 더욱 활발해져,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되었으며,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산물이고, 중국침략의 선봉이며, 따라서 종교와 교육이 분리되어야 하고, 기독교학교의 제도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줄을 이었다.
베이징의 옌징대학(燕京大學) 1916년 미 북감리교회, 회중교회, 미 북장로교회, 영국 런던선교회 등이 3곳의 교회학교를 합병하여 세운 옌징대학의 원래이름이 베이징대학(Peking University)이었다. 교장은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 司徒雷登, 1876-1962)였다. 스튜어트는 아버지를 중국선교사로 둔 항저우(杭州) 출신의 미장로교회 선교사로서 항저우 육영서원(育英書院,), 난징금릉신학원(南京金陵神學院) 등에서 가르치다가 옌징대학의 교장으로 부임하였고, 나중에 1946년부터 주중 미국 대사로 일한 사람이다. 베이징의 샤탄(沙灘)에 있던 국립 베이징대학이 옌징대학의 교지(敎址)로 이사해 온 것은 1952년이다. 당시 정치적 이유로 14곳의 기독교 대학이 폐쇄될 당시, 쑤저우(蘇州)의 동우대학(東吳大學) 같은 경우에는 대만으로 이전해 갔지만, 옌징대학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1920년대-30년대에 이룬 옌징대학의 학문적 수준은 최고의 것이었다. 학교 재정이나 교수 환경, 교수 자질에 있어서 세계 인류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미국의 프린스턴, 하버드, 뉴욕유니온신학교, 콜럼비아 대학 등과 학술 교류를 나누었다. 오뢰천, 유정방(劉廷芳, 1891-1947)), 이영방(李榮芳, 1887-1965), 조자신, 간우문(簡友文, 1896-1978), 진원(陳垣, 1880-1971) 등이 옌징대학 교수를 지냈다. 이들 중 기독교학자들은 기독교 토착화운동 시기에 반기독교운동에 대항하여 기독교적 논리를 지켜내기 위해 최전선에 섰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끝난 후 옌징대학의 기독교정신이 계승될 수는 없었지만, 문리대(文理大)의 교수, 학생과 학술사상은 베이징대학으로, 그리고 공대(工大)는 칭화대학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도서관 등 시설과 직원은 주로 베이징대학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옌징대학의 계승자는 베이징대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종교 회복 이후에 베이징에 세워진 신학교가 옌징신학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그 영화(榮華)의 흔적을 이어가고 있다.
베이징의 중화성경회 건물(현재의 北京基督敎兩會 본부) 오늘날의 베이징기독교양회(兩會, 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 기독교협회) 본부 건물은 1923년 미국성경회 명의로 당시의 파출소 땅을 사서 1928년경에 완공하였으며, 중서(中西) 양식이 모두 나타나는 건축양식이다. 건축 당시 이미 베이징의 명소로 알려졌던 이 건물은 동단북대가(東單北大街) 21호에 위치해 있다. 미국성경회는 원래 1876년에 정식으로 상하이에 중국지회(中國分會)를 두었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1890년에 베이징지회(北京分會)가 생겨났다. 이들은 애초에 신도들의 헌금 덕에 재료비 이하 가격으로 성경을 판매하여 광범위하게 성경을 배포할 수 있었다. 미국성경회 이전에 이미 영국성경회는 모리슨을 통해 광저우에 영국성서공회 지회를 설치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에는 영국과 미국의 두 기관이 합병하여 중화성경회(中華聖經會)가 구성되었다.
해방 당시 중화성경회 베이징지회는 미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것이 끊기자 자기 건물(현 兩會 건물)을 모두 임대해 주고 매차골목(買借胡同) 1호의 주택 건물을 사용하였다. 1957년 말에 성경회는 세를 냈던 이 건물을 회수하여 삼자회(三自會)에 주고 주택건물은 세를 주었다. 1958년부터는 YMCA, YWCA가 이 건물을 사용하였으며, 60년대에는 예배당으로도 사용되었다. 1966년에 교회당으로의 역할이 중단되었고, 문화혁명 10년 기간에는 모두 이 건물을 청년회 건물로 알고 있었다. 1979년 종교업무가 회복되면서 성서 판매는 기독교협회 업무로 귀속되었고, 이 건물은 베이징기독교양회(兩會)가 사용하고 있다.
베이징의 숭문문교회(崇文門堂) 미국 북감리교회(美以美會) 숭문문교회(崇文門堂)는 현재까지도 효순골목(孝順胡同) 후구(後溝) 2호에 있는 베이징 최고의 개신교 교회당이다. 오늘날 이 교회는 베이징의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다. 이것은 원래 1870년 북감리교회가 효순골목의 부동산 한 곳을 사서 북감리교회 화북선교연회(華北宣敎年會) 본부로 삼으면서 지은 교회당으로서, 원래 명칭은 야슬리교회(亞斯立堂)이다. 의화단의 난 때 이곳 역시 불에 탔는데, 그 후 효순골목의 3/4, 선반골목(船板胡同)의 2/3에 해당하는 지역을 거의 강제 매입하여 교회당을 중건(重建)하고 휘문서원(?文書院)과 선교사 주택을 건축하였다.
야슬리교회는 1897년부터 자양(自養)계획을 세워 1909년 유방(劉芳)이 담임목사로 있을 당시 자양당(自養堂)이란 별칭을 갖기도 하였다. 교회당과 주택, 사무실 외에도 숭내대가(崇內大街) 43호와 효순골목 1, 2호도 북감리교회 재산이었는데, 후자는 미국 해군 청년회에서 쓰던 것을 1947년 미 대사관이 감리회에 기증하여 덕서원(德瑞園)으로 이름 짓고, 북감리교회 청년 신도 및 부근의 모정(慕貞), 휘문중학교(?文中學校) 학생, 부영의원(婦?醫院)과 동인의원(同仁醫院) 및 인광의원(仁光醫院) 간호사들로 하여금 활동하며 사용하게 하였다.
상하이 경림교회(景林堂) 상하이 경림교회(景林堂)는 미국 남감리회가 상하이에 두 번째로 세운 교회당이다. 애초에 중서서원(中西書院)의 교사, 학생들이 예배를 드리는 학교 교회였다. 중서서원은 남감리회 선교사인 영 알렌(Young Allen, 林樂知, 1836-1907)이 1882년에 공공조계(公共租界) 소주하(蘇州河) 이북의 홍구(虹口)에 세운 것이다. 독립운동가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갑신정변 후 이곳으로 피신하여 1885년부터 1888년 중반까지 유학한 바 있다. 중서서원은 후에 쑤저우의 동우대학으로 합병되어, 지금은 동우대학의 법학원과 제2부속 중학교가 자리 잡고있다.
1922년-23년 사이에 미 남감리회는 곤산로(昆山路) 남측 원래의 교회당 대각선 방향에 있던 선교사 숙소를 부수고, 당시로서는 1,000명이 들어 갈 수 있는 상하이 최대의 교회당을 세웠다. 그리고 알렌을 기념하여 경림당으로 이름을 지었다. 1924년 새해 강장천(江長川) 목사가 부임하면서 직접 집례하여 헌당예배를 드렸다. 송경령(宋慶齡, 1892-1981), 송미령(宋美齡, 1897-2003) 자매는 청년시절 이곳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활동하였다. 항일전쟁, 문화혁명 시기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1979년 교회가 다시 회복되었고, 경림당도 1980년 9월 홍구지역 예배당으로 문을 열었는데, 1981년부터는 경령당(景靈堂)으로 개명하였다.
베이징의 기독교인회당 사가골목(史家胡同) 42호에 있어, 일명 사가호동교회라고 불리는 베이징 기독교인회당을 세우고 담임한 사람은 왕명도이다. 그래서 왕명도 회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왕명도는 1900년 의화단 운동 시기에 기독교인 아버지를 둔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서 가난을 경험하며 자랐으며, 영적으로 민감한 시기를 보낸 끝에 신앙인이 되었는데, 스웨덴 선교사를 도와 함께 일 하였고, 1925년경부터 가정교회를 시작하였다. 아울러 해방 때까지 25년여 동안 전국순회전도에 힘을 쏟았다. 그는 처음에 동성구(東城區) 감우골목(甘雨胡同) 29호에 가정교회를 세웠다. 1936년에 사가골목(史家胡同) 42호의 땅을 사서 교회당을 지어 정부 비준을 얻었으며 정식으로 기독교인회당(基督徒會堂)이라는 명패를 달았다. 1958년 7월부터는 소년활동센터(少年活動中心)로 바뀌었고, 신중국(新中國) 출범 이후 구속된 왕명도는 1980년 석방되었다가 1991년 7월 28일 소천하였다.
산둥 마장(馬庄)의 예수가정(耶稣家庭) 예수가정은 1920년대 산둥 태안(泰安) 마장(馬庄)에서 시작된 독립교회로서 경전영이 세웠다. 경전영은 1890년 태안 마장 출생으로, 어려서는 유교서적을 보았고, 과거가 폐지되면서 태산(泰山)에 입산하여 수선(修禪)하였으나,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세운 태안 휘영(徽英)중학에 입학하여 신앙을 갖게 되었다. 1920년에는 동기들 중심으로 1원짜리의 주식을 팔아 653원을 마련하고 성도신용저축사(聖徒信用貯蓄社)를 세웠다. 1921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어 베필과 양곡을 팔았고, 아침저녁으로 영성훈련, 성경학습을 실시하고 전도활동을 하였다. 이후 1927년에 신용저축사의 전 재산을 학교 쪽으로 돌린 후 그 학습반의 이름을 “예수가정”으로 칭하였다.
이때 ‘家’를 갓머리 밑에 ‘住’를 쓰는 식으로 썼는데, 해석하면 “주(예수)와 사람이 함께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으로서 세속 가정과 구별하고자 함이었다. 처음에는 토지 2,415무(畝)에 가족 10여 명이었는데, 나중에 외지로 확대하여 화북, 서북 각 지역으로 전도를 나가면서 입교자들이 자기 가옥과 자산을 내놓으면서 마장의 “노가(老家)”, “총가정(總家庭)”과 구별되는 소위 “소가(小家)”들이 생겨났다. 1948년에 노가의 입교자는 400여명, 소가(小家)는 127곳으로 증가하였으며, 깐쑤(甘肅), 안후이(安徽), 난징, 상하이 등에까지 분포하였다.
1950년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의 발기(發起)에 참여한 산동성 1차 서명자 407명 중 예수가정 출신이 208명이었고, 두 번째 서명자 231명 중 예수가정 출신이 역시 208명이었다. 그러나 1951년부터 봉건적 가장(家長)제도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전국 삼자회(三自會)에 서신을 보내 개혁을 요청하였다. 이에 1952년 5월 27일 성토대회(控訴大會)가 열렸고, 예수가정 성년의 57%에 해당하는 120명이 공소자(控訴者)로 참여하여 이 봉건적 기독교 단체의 취소를 요구하였다. 인민정부는 경전영을 체포하고 같은 해 가을 마장 예수가정의 재산을 정리하고 회원을 혈통에 따라 원래의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홍콩 도풍산(道風山) 기독교(基督敎) 총림(叢林) 중국인이 중국의 문화 위에 기독교를 세워나가는 흐름은 여러 분야에서 나타났는데, 현재 홍콩 루터교회 신학교로 이용되고 있는 도풍산 기독교 총림(道風山 基督敎 叢林)은 아름다운 전통 양식의 건물로 유명하다(新界 沙田 道風山路 33號에 위치). 이곳을 만든 사람은 노르웨이 선교사인 라이켈트 박사(Dr. Karl Ludvig Reichelt, 艾香德, 1877-1952)이다. 그는 1904년 중국에 와서 후난(湖南), 후베이(湖北)에서 전도하는 중에, 중국 전통 종교 특히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22년 남경에 “경풍산(景風山)”을 세우고 사방의 불교 신자와 도교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1930년에 홍콩에 와서 도풍산기독교총림을 세웠다. 건축은 중국 전통양식을 채용하였고, 예배의식도 중국식으로 하여, 중국인들을 전도하는 교회가 되었다. 라이켈트 박사는 1952년 3월 13일 사망하여 이곳의 공동묘지에 장례되었다. 현재 도풍산에는 전통 중국 양식의 루터교 성전과 중국식 정자 등의 건축물이 있고, 복음 회화도자부(繪畵陶瓷部), 하문전 종교우의사(何文田 宗敎友誼社), 도풍산 복음부(道風山 福音部) 등을 설치하여 봉사하고 있는데, 그 주요 임무는 중국 종교 문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키는 데 있고, 동시에 출판 연구, 자료제작, 중국 전통 양식의 기독교 예술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김병태 | 배재대학교 복지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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