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9.2  통권 139호     필자 : 강인규
[중국선교역사]
타이완북부교회의 건설자로, 윌리엄 가울드 목사

이번 호에는 타이완북부교회의 건설자로 불리는 윌리엄 가울드 목사(Rev. William Gauld, 1861-1923, 吳威廉)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울드 목사의 생애
1861년 2월 25일, 가울드는 캐나다 온타리오성의 웨스트민스터라는 시골 농장에서 태어났다. 농부이면서 목수였던 가울드의 부친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가울드는 셋째로 위로 형, 누나와 밑으로 남동생이 있었다. 가울드는 어려서부터 웨스트민스터교회 주일학교에 참석하면서 그의 경건한 신앙생활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가울드의 가정은 매일 예배를 드리고, 그의 부친은 아이들을 위해 성경을 읽어 주고, 어머니는 잠자리에 드는 아이들에게 늘 찬송가를 불러주었다고 한다. 

가울드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성경읽기와 암송을 좋아했다. 그는 특히 시편 23편, 이사야서 40장과 55장, 주기도문, 요한복음과 로마서 등의 성경구절들을 좋아하여 시간 있을 때 마다 성경을 암송했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신앙생활의 훈련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후에 그가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매우 유익하게 사용될 줄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는 또한 주말에는 농장과 목수 일을 하는 아버지를 도우면서 망치, 삽과 톱 등의 도구를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목수만이 하는 특수 기술을 습득함으로 후에 타이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들에게 그 기술을 전해주었다. 직접 건축설계도 하고 작업장에서 일하는 그를 사람들은‘작업반장’이라고 불렀다. 

가울드가 어렸을 때는 세계가 매우 혼란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한창이었고, 유럽에서는 독일과 프랑스 간에 격렬한 전쟁 중 이었다. 또 아시아 지역에서는 서구의 식민지경쟁으로 동서간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무력 충돌로 긴장상태가 고조되었다. 가울드가 19세 때, 고등학교 시절에 동생과 함께 런던 시내에 있는 성안드레교회의 특별집회에 참석하였다. 그 특별집회의 강사는 최최 선교사로 타이완 북부 지역에서 선교을 활동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맥카이 목사였다. 맥카이 목사는 매우 열정적으로 타이완에서의 선교활동을 소개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하도록 강력히 호소하며 강력한 도전을 주었다. 가울드는 맥카이 목사의 열렬한 말씀에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생에게“나도 해외선교사가 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비전은 12년 후에 실현되었다.

가울드의 신학교육
가울드는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먼저 초등학교 교사직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시골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대학에 필요한 학비를 마련했다. “뜻이 있는 자에게 길이 있다.”는 속담처럼 비록 대학에 곧바로 진학하지 못하고 25세까지 이곳에서 교사로 있어야 했지만, 이러한 경험은 선교사로서의 좋은 훈련기간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그들은 후에 캐나다 기독교계의 많은 영도자로 활동하였다. 가울드가 시골사람들과 함께 생활한 경험은 그가 후에 타이완에서 선교활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885년 9월, 가울드는 토론토대학에 입학하여 고대하던 대학교육을 받게 되었다. 오랫동안 기대했던 대학생활이어서 적극적으로 대학생활을 즐겼다. 학과성적도 좋았고, 특히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계통에 관심이 많아 사상범위가 넓고 깊었다. 또 체격이 월등하고 건장한 그는 축구와 하키 등의 운동도 좋아해 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랐다. 

졸업 후 가울드는 녹스대학(Knox College)에 진학하여 선교사 비전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였다. 캐나다의 신학교육은 이론과 실천을 중시해서 주말에는 기차로 몇 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까지 교회를 가야해야 했다. 그 당시 교통사정이 상당히 좋지 않아서 몇 시간씩 마차를 타고 또는 걸어가서 교회봉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감사와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하여 교인들의 사랑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벽촌의 시골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마가레트안 메리스 자매를 만났다. 그녀는 성격이 매우 명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 재능이 있어 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동아리 등에 참여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녀는 후에 가울드 목사의 사모로 그의 선교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동역자이자 훌륭한 파트너가 되었다. 

녹스대학 졸업 후 가울드는 메리스 자매와 결혼하였으며, 소년시절에 꿈꿨던 해외선교사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준비했다. 가울드는 먼저 인도선교를 생각하고 인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인도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타이완의 맥카이 선교사가 동역자가 필요하니 파송해 달라는 요청이 왔기 때문에, 캐나다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는 그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그들 부부를 타이완으로 파송할 것을 결정하였다.

가울드 목사의 타이완선교
1892년 8월 가울드 목사와 메리스 사모는 태평양철도를 타고 캐나다를 횡단하여 밴쿠버에서 배를 타고, 몇 주간을 항해하여 일본을 거쳐 홍콩에 도착했다. 다시 홍콩에서 목적지인 타이완에 도착하였다. 맥카이 목사부부와 교회 형제자매들이 부두까지 나와서 폭죽을 터뜨리며 평안히 목적지에 도착한 가울드 목사 부부를 환영하였다. 그들이 타이완 단쉐이(淡水)에 도착하였을 때는 10월 22일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기였다. 타이완은 아름다운 섬나라이다. 일 년 내내 늘 푸른 산천초목과 높은 산들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맥카이 목사는 근 20년 동안 타이완 북부 지역에서 각 도시와 인구가 많은 촌락에 교회들을 개척하고 현지 전도사들을 파견하여 각 지역에서 목회하도록 안배하여 북부 지역의 선교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단쉐이에 도착하여 타이완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타이완어는 푸젠성(福建省)의 남부말로 민남어(閔南語)라고 칭하는데 보통 중국어는 4성으로 되었지만, 민남어는 8성으로 되어있어 배우기가 여간 힘든 언어가 아니었다. 더욱 그들을 힘들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다음 해에 맥카이 목사부부는 안식년을 맞아 본국으로 귀환하여 북부교회의 모든 업무를 가울드 목사가 담당해야 했다. 선교지에 막 부임한 풋내기 선교사는 목사, 대학교수, 여러 교회의 담임목사, 그리고 아직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현지 동역자들의 지도자로 그리고 현지 동역자들의 월급까지 관리해야 하는 회계의 역할까지 다양한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가울드 목사는 갈수록 더 힘들었다. 맥카이 목사부부가 캐나다로 귀국한지 얼마 안 되어 중일전쟁이 일어났고, 중국은 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해야 했다.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동안 메리스 사모는 아이들을 데리고 샤먼(厦門)에 몇 달 동안 피난을 갔다. 그러나 가울드 목사는 타이완에 남아 신도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교회를 지켰다. 타이완을 점령한 일본은 서방국가들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기독교에 대해 관대했다. 대만 주재 고위관리 들이 선교사들을 방문하며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타이완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일으켜, 외국선교사와 교회들이 일본제국주의와 연합하여 타이완을 침략한다고 오해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들을 박해했다. 심지어는 순교자까지 발생하는 위기를 맞아야 했다. 그러나 가올드 목사는 타이완 현지 교인들과 생사를 같이 하면서 이토록 어려운 난관을 무사히 극복하였다. 캐나다의 모 교회에서는 그가 이러한 역경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매우 염려했었지만, 가울드 목사는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교회를 인도하였다. 

1899년, 가울드 목사부부는 7년 동안의 선교활동을 은혜 가운데 무사히 마치고 안식년 차 캐나다로 돌아갔다. 비록 안식년 휴가로 캐나다에 돌아갔지만, 많은 교회들이 그의 선교경험을 듣고자하여 쉴 새 없이 각 교회들을 방문하며 타이완을 소개하고 그의 선교경험을 나누어 캐나다교회가 타이완교회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했다. 

1900년, 안식년을 마치고 타이완에 돌아오니 더 많은 시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이완 북부교회의 개척자인 맥카이 목사가 후두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1901년 소천하였다. 가울드 목사는 뜻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이완 북부교회의 모든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맥카이 목사는 독단적으로 과감하게 선교사역을 전개했지만 가울드 목사는 팀 사역을 중시하여 모든 일들을 신중하게 진행하는 타입이었다. 어떤 교인은“맥카이 목사는 타이완의 산과 들에 복음의 씨앗을 열심히 뿌렸고, 그 후임으로 온 가울드 목사는 그 열매를 거두고 보관하여 미래에 더 많은 열매들을 맺기 위해 창고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타이완북부노회의 성립
1872년 3월 7일, 맥카이 목사가 타이완 북부 단쉐이에 부임하여 복음의 씨앗을 뿌린지 30년이 지났지만, 타이완 북부교회는 아직 독립하지 못하고 캐나다 모(母) 교회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울드 목사는 타이완북부교회가 이제는 자치적으로 독립해야 할 시기라고 판단하고, 1904년 캐나다 모 교회에 세가지 사항을 요구하였다. 첫째, 타이완교회의 자치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마땅히‘북부노회’설립을 허락해 줄 것. 둘째, 새로운 시대의 부녀교육을 위해 적합한 여성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 셋째, 신학생들의 수준을 향상하기 위하여 수준 있는 기독교학교를 세워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캐나다 모 교회에서는 그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타이완북부장로회의 독립노회 성립을 허락하였다. 1904년 10월 4일 오전 10시, 타이완북부교회를 대표하는 13명의 대표가 단쉐이 옥스퍼드학당에 모여서 북부노회를 성립하였다. 이 역사적인 조직대회에서 가울드 목사가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쉐이반쟈오(水返脚) 교회대표가 서기로 임명되었다. 타이완 북부노회의 성립은 북부 교회의 선교 역사상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물론 노회가 성립되었다고 완전히 독립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타이완 남부의 영국 장로교회가 1896년에 독립노회를 조직하여 운영되고 있어서 북부교회에서는 이를 참고로 하여 교회의 자치적인 운영을 목표로 전진할 수 있었다. 

가울드 목사는 팀 사역을 중시하는 지도자여서, 그가 타이완북부장로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영국장로회가 개척한 남부장로회와 협조를 중요시 여기고 이를 위해 끊임없는 기도하고 노력을 하였다. 1912년 10월 24일 남부장로회 대표 20명, 북부장로회 대표 14명, 모두 34명의 대표가 장화(彰化) 시먼지에(西門街) 교회에 타이완장로회 총회대회를 개최하였다. 초대 회장으로 캠벨 목사(Rev. William Campbell)를 선임하고, 샤오안쥐(蕭安居) 목사와 리우쥔천(劉俊臣)을 각각 서기와 부서기로 임명하였다. 가울드 목사는 후에 제3대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865년 영국장로회 소속의 맥스웰 선교사(Dr. James Laidlaw Maxwell M.D, 馬雅各, 1836-1921)가 타이완 남부에서 선교의 문을 열었고, 캐나다장로회 소속의 맥카이 목사가 1872년 북부교회를 개척하였다. 타이완은 남북교회가 약 50년 동안 각각 분리된 상태에서 운영되었는데 총회가 조직되면서 남북의 장로회가 연합하는 매우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부녀교육의 강화
1904년 가울드 목사가 모 교회에 건의한 부녀교육과 기독교학교의 설립도 모교회의 적극적인 지지아래 많은 성과를 얻었다. 1905년 캐나다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대거 단쉐이에 도착하였다. 타이완 북부 최초 여성 선교사인 키네이(Miss Jane M. Kinney,金仁理) 선교사, 코넬 선교사(Miss Hannah Connell, 高哈拿)가 부임했고, 그들과 함께 밀톤잭크 목사부부(Rev. and Mrs. Milton Jack, 約美但)와 페구순 목사부부(Rev. J. Y. Ferguson, B.A. and M.D. and Mrs. Ferguson, 宋雅各) 등이 타이완 단쉐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2년 후에는 맥레오드 목사부부(Rev. George William Mackey, M.A, D.D. and Mrs. Mackey, 劉忠堅)도 북부선교 사역에 참여하였는데, 맥레오드 목사는 후에 타이완교회 지도자로 훌륭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캐나다 모 교회에서 이토록 많은 선교 동역자들을 파송하는 것을 보면, 캐나다 교회가 가울드 목사가 주도하는 타이완의 선교 사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겠다. 이처럼 새로운 동역자들이 대거 참여하므로 북부 지역 선교사역이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들 모두 전문지식이 풍부하여 본국에서도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었고, 특히 당시 캐나다에는 대학을 졸업한 여성들이 극소수여서 캐나다에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마다하고 타이완의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역만리 머나먼 길을 걸어 온 것을 보면 그들이 타이완을 얼마나 사랑했하는지 알 수 있다.

건축가 가울드 목사
가울드 목사가 타이완 북부에서 31년 동안 사역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겨 놓았는데, 그중에도 타이완 북부에 많은 서양식 건축물을 남겼다. 그는 건축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목수인 부친을 도우면서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했다. 그리고 그는 건축에 대한 흥미와 섬세함으로 북부 지역에 아름다운 서구식 건물들을 많이 남겨 놓았다. 그중 유명한 것은 타이베이 맥카이 기념병원(1912), 타이베이신학교(1918)와 4동의 선교사 숙소 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단장중학교(淡江中學校) 내의‘단쉐이여학교(淡水女學校)’의 학교건물 뿐이고, 대부분 도시계획 등으로 거의 철거되거나 개축되었다. 그의 건축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어서 타이베이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영국인들이 건물을 건축할 때는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특히 철도국 건물과 기차시간표 등을 작성할 때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울드 목사는 수학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어 기차 시간을 측정하는데 정확하였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울드 목사의 소천
1923년 6월 5일은 타이완북부교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북부교회에서는 단쉐이중학교 신축 체육관에서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기념식이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울드 목사는 병으로 인해 일어날 수 없어, 바클레이 목사(Rev. Thomas Barclay)가 그를 대신하여 대회를 주최하였다. 며칠 후 62세의 나이로 가울드 목사는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웨이와이양(魏外楊) 교수는 가울드 목사와 오랫동안 동역하였던 천칭이(陳淸義) 목사는 가울드 목사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첫째, 그는 처음과 끝이 분명하였다. 비록 중간에 어려운 일을 당해도, 끝까지 중단하지 않고 완성했다. 둘째, 그는 굳건한 신앙을 지켰다. 노년에 중병으로 고통이 심하였지만, 늘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불러 좋은 신앙의 본이 되었다. 셋째, 그는 성실하고 소박한 품격을 갖춰 전혀 과장된 말을 하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였다. 넷째, 그는 모든 일들을 신중하고 매우 질서 있게 처리하였다. 

가울드 목사는‘타이완북부교회의 건설자’라는 칭호에 어울리게 타이완 북부교회를 제도적으로 많이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맥카이 목사가 타이완 북부 지역에 60처소의 교회를 개척했으나 아직 제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다. 가울드 목사가 이를 이어받아 독노회를 조직하여 타이완 북부교회가 자치적으로 발전하도록 노력하였다. 더 나아가 타이완장로회의 총회까지 형성하여 남부교회까지 연합하여 발전하도록 노력하였으니 그에게 타이완북부교회의 건설자라는 칭호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가울드 목사의 메리스(Margaret Mellis, 1867-1960, 陳泗治) 사모도 음악가이고 교육자로 가울드 목사를 도와 북부선교 사역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사모는 단쉐이중학교(淡水中學校)에서 교장으로 오래 동안 봉사하며 음악교육에 종사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의 작품이 타이완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사모를‘타이완 북부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가울드 목사는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는데, 장녀 아유(阿玉, Gretta Gauld)는 타이완 남부와 북부의 두 기독교병원에서 간호사로 섬겼다. 셋째 딸 후아미(花蜜, Flora Gauld)는 의사로 의료선교사 요한(J. L. Little)과 결혼하여 타이완에서 선교사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하였다.

※참고문헌
1. 魏外揚《中國敎會的使徒行傳》(台北:宇宙光,2006)°
2. 台灣基督長老敎會總會曆史委員會《台灣基督長老敎會百年史》(台北:台灣基督長老敎會, 1965)°
3. 明有德<吳威廉傳>《牛津學堂通訊Oxford College Enews》第1期,2012°


강인규 | 대만중원대학 교양학부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