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  통권 135호     필자 : 강인규
[중국선교역사]
대만 문둥병자의 아버지 테일러

대만 문둥병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테일러 선교사(G. Gushue Taylor, 1883-1954)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어린 테일러, 의료선교사의 꿈을 꾸다
1883년 12월 5일, 테일러 선교사는 캐나다의 동부 대서양의 조그만 어촌 뉴펀들랜드(Newfoundland)에서 태어났다. 그는 감리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목사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영국 런던에서 가난한 어촌으로 이주해 와서 외과의사로 활동하던 거리페이(Grenfell, Sir Wilfred Thomason, 格利菲) 박사의 영향을 받았다. 의사 거리페이가 가난한 어부들을 헌신적으로 돌봐주며, 그들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어린 테일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거리페이 박사는 어린 테일러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동방 세계에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며 동방선교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었다.

테일러 선교사는 뉴펀들랜드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고 성요한(聖約翰)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리페이 박사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의학공부를 하기 원했다. 1901년 런던대학 의학과에 합격하였지만 집안의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 학비와 생활비는 장학금으로 충당하려 했다. 그러나 장학금만으로는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그는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고생고생 아르바이트를 했다. 1910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테일러는 하고 런던의 저명한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재직하면서 영국 황실의학원의 외과의사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그는 한때 바나두(巴拿都) 박사가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주치의사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 그곳의 간호사였던 밀러(Miss Marjorie Miller, 1882 - 1953)를 만나 1910년에 결혼하였다. 그녀는 사랑이 많은 간호사로 테일러의 해외선교 비전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그의 의료선교사의 비전이 하루속히 이루어지도록 적극 지지하고 격려하였다. 테일러 선교사는 런던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부인 밀러의 격려와 지지였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문둥병 환자 사랑함이 작은 씨앗이 되다
1911년 테일러 선교사는 영국장로교회로부터 대만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그는 부인과 함께 타이난(臺南)의 신러우병원(新樓醫院)에서 봉사하였다. 타이난은 대만의 행정중심지였지만, 생활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차이가 커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대만의 최초의 선교사이자 의료선교사인 맥스웰 선교사(Dr. James Laidlaw Maxwell M.D, 馬雅各, 1836 - 1921)가 1868년, 이곳에 의료선교를 시작하면서 세운 신러우병원이 계속 운영되고 있어서 테일러 선교사는 이 병원 원장으로, 부인은 간호사로 의료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테일러 선교사가 다양한 외래환자들을 친절히 돌봐주자 그의 명성이 타이난 지역에 퍼져나갔다.

테일러는 매일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돌보며, 타이난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였다. 또한 그는 환자들과 직접 대화가 되지 않아 많은 불편을 느껴 대만어를 배웠으며, 영어, 일어까지 아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언어에 대한 재능도 필요하겠지만, 우리 한국선교사들이 아직도 언어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고 있고, 선교단체들조차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이 없는 한국선교의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매우 염려스럽게 생각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하루속히 해결할 수 있기를 갈망하는 바이다.

신러우병원의 업무가 날로 가중되면서 테일러는 현지인 의료요원을 세울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외과간호학(The Principles and Practice of Nursing)》 이라는 의학 서적을 출판했다. 1917년 출판된 이 책은 대만 사회에서 최초로 출판된 의학 서적이다. 이 책은 대만어의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고, 영어로 주석을 달고, 또 그림까지 삽입하여 알기 쉽게 편집하였다. 이 책이 편찬되자 다른 의사와 선교사들도 많은 용기를 얻어 의학 서적들을 대만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테일러 선교사 부부는 이들의 번역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테일러 선교사는 신러우병원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수많은 문둥병 환자를 대하면서 그들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문둥병 환자들이 신체적인 고통은 물론 가족들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정신적으로 더 큰 고통에 시달리다가 자포자기 상태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상황을 본다. 그럼에도 이 병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느끼면서, 그들을 치료해야 하는 큰 부담을 갖는다. 

1918년 테일러 선교사의 대만 선교 임기가 만료되어 갈 쯤, 그의 부인에게 관절염이 발병했다. 그는 부인의 치료를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부부는 타이난에서 7년 동안의 선교활동을 마무리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만 문둥병 환자들에 대한 부담과 사명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씨앗이 되어 자라고 있었다.

대풍자기름(Hydnocarpus oil) 스물네 병
테일러 선교사는 영국으로 돌아와 부인의 병을 치료하면서, 바나두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는 고아사역을 하였다. 1923년 그는 캐나다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아 두 번째로 대만 땅을 밟았다. 그러나 두 번째 선교지는 타이난이 아니었다. 그는 북부 마지에기념병원(馬偕紀念醫院)의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마지에병원은 1901년 마지에 선교사가 소천한 후 폐업하였는데, 1905년 캐나다장로회가 의사 송야곱(宋雅各)을 파송하여 병원운영을 재개하였다. 그는 1912년 병원을 딴수이(淡水)에서 타이베이(臺北)로 옮기고, 대만 북부 선교의 중심지를 삼는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전 세계가 심한 경제적 불황을 겪으면서 해외선교 헌금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자 병원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6년 동안 병원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장로회는 의사 테일러가 영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에병원을 재건하는데 재격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병원장으로 초빙하여 마지에병원 재개임무를 맡겼으며 의사 테일러는 1923년, 병원장으로 부임하여 마지에병원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테일러 선교사는 두 번째 대만선교사로 부임하면서 문둥병에 대해 특별히 준비하였다. 그들은 대만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인도에 들러서 인도의 문둥병치료 전문가인 뮤일(Dr. Ernest Muir, 梅爾)박사를 방문하였다. 문둥병치료에 대한 경험과 의학지식을 지도받고, 인도의 문둥병 환자 수용시설과 운영 등에 관하여 도움을 받았다. 그는 인도의 문둥병 요양원에서 환자들이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는 독립된 공동체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도 대만의 문둥병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많이 참고했다. 그는 또한 인도에서 대풍자기름(Hydnocarpus oil)이 문둥병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스물네 병을 사왔다. 그가 문둥병 환자들에게 얼마나 관심과 부담이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부부가 합심하여 환자들을 친절히 돌보아 마지에기념병원은 빠른 시간 안에 옛 모습을 회복했다. 그러나 테일러 의사 부부가 두 번째 대만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마지에기념병원을 정상적으로 회복시킨 것보다는 전문적으로 문둥병 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할 수 있는 러산위앤(樂山園)을 세운 일이다.

문둥병 환자들의 낙원, 러산위앤을 건립하다
문둥병은 접촉을 통해 전염되는 전염병의 일종으로 마풍간균(痲?桿菌)이 상처를 통해 전염되면, 먼저 신경계통이 파괴된다. 피부와 연골이 썩어 들어가 눈썹이 떨어지고, 손발의 관절이 마디마디 떨어져 나가고 심지어는 코의 연골이 썩어서 코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며, 또 눈의 신경이 마비되어 실명하는 등 인간의 신체에 엄청난 파괴와 고통을 주는 전염병이었다. 환자들은 신경이 마비되어가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격어야 했지만, 그보다 더 심한 고통은 이 병은 전생에 엄청난 잘못으로 받는 천벌(天罰)이라고 생각하여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이웃사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멸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진 채 평생을 절망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이었다. 

대만에는 이 병이 없었다고 한다. 명말청초 한족들이 대만에 이주하면서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병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의료시설이 거의 전무한 상태여서 환자들은 치료를 받기는커녕 구걸하하다가 죽어간다. 일본 정부가 대만을 통치하면서 대만의 위생환경을 크게 향상시키기는 했지만, 문둥병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이를 중요시 여기고 필요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1925년 2월, 테일러 선교사는 북부에서 처음으로 문둥병 환자를 발견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마지에병원에 문둥병 특별진료소를 설치하고 이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은 문둥병 환자들에게 하나의 큰 복음임에 틀림없었다. 이 기쁜 소식은 신속히 전파되어 그해 말에 이미 90명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이 병원에 빈번히 출입하자 병원 주위의 주민들은 그 흉한 모습이 두렵고, 또 전염될까 걱정되어 병원을 옮기라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테일러 선교사는 이를 강력히 거절하고, 친히 썩어가는 상처를 닦아주고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날로 늘어나는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특별한 수용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테일러는 1926년 제13차 대만기독교장로회 대회에서 문둥병 환자들의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만 문둥병구제회’를 조직하자고 제의하여 1928년 동회는 테일러 선교사의 제의를 받아들여 대만 문둥병구제회를 설립하였다. 테일러 선교사, 마지에 목사의 아들 지에뤠이리엔(偕叡廉) 등 5명의 이사를 세워 정식 출범하였다. 이 구제회는 대만에서 문둥병치료 최초의 단체이며, 중요한 기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테일러는 이 기구의 이름으로 해외에서 필요한 기금을 모금하였다. 

테일러 선교사는 이 구제회가 성립되기 전에 영국과 미국의 문둥병 구제회를 통해서 모금하였다. 1927년 마지에병원 근처의 교회를 구입하여 대만 최초의 문둥병 환자 전문 진료소를 개설하였지만, 도시개발로 건물이 철거되는 바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만장로교회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아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3월 25일 타이베이 멍가(??)교회에서 대회를 개최할 때 테일러는 그동안 해외에서 1만원, 국내에서 6만4천원, 대만 일본총독부에서 2만5천원, 모두 9만9천원을 모금하였다고 보고했다. 테일러는 이에 힘입어, 문둥병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더 적극적으로 물색하였다. 그는 이 수용소가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인 동시에 환자들에게 독립된 생활환경을 제공하여 환자들이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환자촌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의 환자촌에 대한 생각은 좋았지만 적당한 장소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30여 곳의 장소를 물색하였지만, 어떤 곳은 정부가 반대하고, 또 어떤 곳은 지방 유지들이 문둥병 환자촌을 건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결사반대하였다. 1931년 타이베이 관인산(觀音山) 중턱에 19정보의 산을 매입하고, 후에 30여 정보의 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땅을 사는데 구오수이롱(郭水龍) 목사가 많은 협조를 하였다. 6월 환자촌을 건설하기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소식이 마을에 전해지자, 마을 유지들이 문둥병의 전염과 땅 값이 떨어질까 하는 염려를 극렬히 반대하여 테일러의 생명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다행히 영국 영사관과 일본 총독부가 중개하여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테일러 선교사가 문둥병 환자들을 위해 추진하는 사역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1934년 3월 20일 9개월 동안의 공사를 일단락 짓고, 마침내 대만 최초의 문둥병 환자 전문 수용소가 완성되었다. 그는 그 수용소 이름을 “러산위앤‘이라 지었다. 수용소 안에 숙소를 짓고 한 방에 4명씩 살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리고 수용소 안에서 환자들은 스스로 꽃을 가꾸고 닭, 오리, 토끼 등을 키우게 했다. 신체조건이 괜찮으면 농사까지 짓도록 했다. 비록 사회와는 격리된 환경이지만, 경제적으로 독립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가 전에 인도에서 참관한 적이 있는 문둥병전문수용소의 모델을 대만 땅에서 실현시키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3월 20일 구미 각국의 영사들과 전국 각지에서 초빙된 귀빈들과 교계의 주요인물 등 5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수용소를 완공하는데 국내외의 개인, 단체와 교회이외에도 일본총독부까지 많은 경비를 지원하여 모금한 돈이 오히려 예산을 초과하였다. 그래서 남은 돈으로 주변의 15정보의 땅을 더 구입하여 모두 34정보의 넓은 수용소를 건설하여 환자들이 자급자족하기에 충분하였다. 

1936년, 테일러 선교사는 문둥병 환자들을 더 전문적으로 치료하기 위하여 13년 동안 몸담아 봉사하던 마지에병원장을 사임하고 부부가 함께 러산위앤으로 이주하여 문둥병 환자들과 함께 동거동락 하며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문둥병은 당시 보기가 너무 흉하여 당시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버림받았다. 이들을 돌보는 의사나 간호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운데 테일러 선교사 부부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늘 고달프고 과로한 상태였다. 그런 중에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수없이 남겨놓았다. 

테일러 선교사의 가정이 부유하지 않아서 대만으로 오는 배 삯을 마련하기 위해 결혼식 비용을 절약하고 심지어는 결혼식까지 법원에 가서 공증 받아 치른 결혼식이었다. 절약할 수 있는 모든 경비를 절약한 것이 결혼 후에는 문둥병 환자들을 더욱 많이 돌보기 위해 자신들의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고, 부인이 자원하여 자궁절개 수술을 했다. 문둥병 환자들을 사랑하는 이들로 인하여 문둥병 환자들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대접을 받으며, 인간다운 삶을 누렸다. 

한센병자들의 영원한 친구 테일러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과 서방국가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대만에서 활동하는 모든 서방선교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테일러 선교사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었기에 16년 동안 봉사하던 러산위앤을 부득이 떠나야 했다. 테일러 선교사는 캐나다의 연해안 지역 교회에서 봉사하다가 1952년에 은퇴한 후 대만에 와서 그의 손때가 묻은 러산위앤을 방문하였다. 1952년 9월 2일 그의 사랑하는 부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테일러 선교사는 슬픔에 잠겨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러산위앤의 30여 정보의 땅이 대만의 토지개혁정책으로 정부에 몰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테일러는 부인을 잃은 슬픔과 고통 속에 건강까지 악화된 상황이었지만, 러산위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대만을 방문하여 2년 여에 걸쳐 싸웠다. 그는 마침내 몰수된 땅을 되찾아 문둥병 환자들이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러산위앤을 회복할 수 있었다. 

테일러 선교사는 자기의 임무를 완성한 후 1954년 4월 17일,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듬해 가을에 러산위앤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노후생활을 약속하였다. 그는 캐나다로 돌아가는 여비를 아끼기 위해 임시 화물선 주치의를 하면서 선박비를 면제받기도 했다. 이토록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십 원 한 장도 쓰기를 주저했지만 문둥병 환자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가 탑승한 화물선이 일본 요코하마를 떠난 지 이틀 후에 테일러 선교사는 갑작스럽게 급성맹장염에 걸렸고 그것이 복막염으로 진행되었다. 1954년 4월 23일, 그는 배안에서 끝내 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이었다. 그가 임종하기 전에 그는 그의 골회(骨灰)를 대만 친구들에게 주어 매장하도록 부탁했다. 그의 부인은 캐나다에 묻혔지만, 그가 영원히 휴식을 취할 진정한 고향은 캐나다가 아니고 대만이었다. 후에 그의 골회는 대만으로 운반되어 그의 유언대로 러산위앤에 묻혔다. 그는 소외된 문둥병 환자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강인규 | 대만중원대학 교양학부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