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명씨(明氏)의 본관은 중국 쓰촨(四川)에 1982년 3월 30일, 충칭시내(重慶市 江北區 上橫街)에서 방직공장 확장 공사를 하던 중에 한 고분이 발견되어 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4월 18일까지 계속된 발굴 작업 끝에 그것이 바로 쓰촨(四川)에서 대하국(大夏國)을 세운 명옥진(明玉珍)의 능묘(예릉, 睿陵)임이 판명되었다. 능묘에서 향비목(香榧木)으로 만들어진 목곽과 잣나무(柏木)로 된 목관, 그리고 귀중한 현궁비(玄宮碑)가 발견되었다.‘현궁(玄宮)' 이란 제왕의 지하궁궐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내부에서 발견된 현궁비는 엷은 푸른색을 띤 동석(茼石)으로, 그 높이는 145cm, 폭 57cm, 두께 23.5cm의 규모로 명옥진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금잔, 은기, 비단 명정, 도포, 곤룡포 등 여러 의복 및 옷감 등이 발견되어 복식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명옥진의 아들 명승(明昇)이 고려로 귀화하여 정착함으로써 명씨(明氏)를 개창하게 되었다는 것은 보학(譜學)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잘 알려진 사실이다.『서촉(연안)명씨대동보(1986, 卷1, p.3)』에 “우리 명씨는 중국 대하의 왕이신 명옥진(明玉珍) 시조의 후손으로서 서기 1372년(壬子)에 2세 되시는 명승왕께서 모후 팽씨(彭氏)를 모시고 고려 송도에 정착하시면서 국빈으로 충훈세록의 예우를 받으셨다." 고 하여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성씨 유래를 다룬『한국성씨보감』에도 명씨의 시조 및 본관 유래를 "시조 명옥진은 원말(元末) 촉(蜀)에 웅거하여 1363년 충칭에서 황제가 되고, 국호를 대하라 하여 선정을 베풀다가 1366년에 죽고 아들 명승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당시 새로이 건국한 명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1372년(공민왕 21년)에 고려에 귀화하였다. 공민왕은 명승에게 양현을 주고 송도(개성)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우리나라 명씨의 연원이 이뤄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명씨 후손들은 명옥진을 시조로 삼고 그가 통치하던 쓰촨을 본관으로 삼아 ‘서촉(연안)명씨'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원말(元末) 농민반란과 명옥진의 쓰촨성 입성 13세기 초 몽골족 칭기즈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한 후 남하하여 1234년에 금(金)을 멸망시켰다. 이후 몽골은 계속된 원정을 통해 사상 최대의 영토를 소유하여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하였다. 쿠빌라이는 수도를 몽골고원의 카라쿤룬(喀喇崑崙)에서 대도(大都, 지금의 北京)로 천도한 후, 1271년에는 국호를 원(元)이라 칭하고 중국식 정통 왕조임을 자처하였다. 이후 1279년에는 화이허(淮河) 이남의 남송(南宋)을 멸망시킴으로써 중국 전역을 차지한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약 100여 년 간 번영을 누려오던 원 왕조는 말기에 정치가 문란해지고 경제가 피폐해졌다. 특히 마지막 왕인 순치시대(1333~1368)에는 정치권이 부패하고, 경제가 혼란하여 왕조에 대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원말 국가권력의 이완과 지배층 간의 권력투쟁으로 특정의 세력이 정국을 전횡하고, 조정의 가혹한 경제 수탈과 토지의 황폐화로 농민은 고통을 받으며, 곳곳에 유랑민이 속출하여 사회는 극도로 불안한 가운데 있었다. 게다가 1351년 황허(黃河) 범람 및 재해 등으로 생활에 위협을 받고 있던 농민들은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백련교(白蓮敎)를 신봉하면서 원조전복(元祖顚覆)을 부르짖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송(宋)의 화덕(火德)을 부흥시킨다는 뜻에서 머리에 붉은색의 두건을 둘러 동료의식을 나타내었기에 이들을 흔히 ‘홍건군' 또는 '홍군'이라 불렀다. 홍건군의 중심인물인 유복통(劉福通)은 잉저우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3,000여 명에 불과 하였으나 4개월 후에는 무려 10여 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허난(河南), 산둥(山东), 허베이(河北)성 일대를 근거지로 세력을 펴나갔으며, 1355년 유복통은 보저우(亳州)를 공략하고 그곳에서 한산동(韓山童)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추대하여 '소명왕(小明王)'이라 하고, 국호를 '송(宋)', 연호를 '용봉(龍鳳)'이라 하여 몽고족을 몰아내고 한민족 국가를 재건한다는 의지를 굳건히 하였다. 한·유집단의 홍건군이 반원(反元)을 부르짖고 일어나자, 각 지방에서 원조타도를 부르짖는 농민반란군이 일어났다. 이들 세력 중 명옥진은 쓰촨을 중심으로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명옥진의 원래 성은 ‘민(旻)씨였다. 명교(마니교)를 신봉하였기에 성을 '명'씨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는 원의 명종 시대인 1329년 9월 9일에 후베이(湖北)성 쑤이저우(隨州)의 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농사일에 종사하였다. 그는 신장이 8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곧은 성격으로 의협심이 있어 마을에 쟁송(爭訟)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와서 해결할 정도로 신임을 얻고 있었다. 당시 곳곳에 군웅이 일어나자, 명옥진은 1351년에 중세(重稅)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들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 반원운동을 전개하였다.
1352년 정월, 큰 세력을 펴고 있던 서수휘(徐壽輝)는 명옥진의 세력에 공격을 가하며 항복을 요구했다. 명옥진은 향리를 보호할 생각으로 휘하(麾下)의 무리를 거느리고 서수휘 군대에 들어갔다. 1353년 서수휘는 명옥진을 원수(元帥)로 삼아 미엔양(沔陽)을 지키도록 하였다. 1357년, 명옥진은 군대를 이끌고 쓰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쿠이저우(夔州)를 거쳐 4월에 충칭에 이르렀다. 그는 충칭(重慶)을 공격하면서 병사들에게 파괴와 약탈을 금하여 성민들에게 안도감을 주었기에 인근 부대에서도 투항하는 병사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명옥진은 수년간 여러 곳에서 세운 공적이 인정되어 서수휘로부터 상장군통군도원수(上將軍統軍都元帥)에 임명되었고, 후에 광서양강도선위사(廣西兩江道宣慰使)를 거쳐 농촉사전행성참정(陇蜀四川行省參政)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명옥진의 쓰촨성 경략(經略)이 시작되었다.
대하정권의 수립 명옥진이 쓰촨지역의 원조 세력을 제거하면서 지방 정세를 안정시키고, 나아가 독자적으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천완국과의 관계이다. 명옥진은 쓰촨에서 자립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수휘 휘하의 천완 정권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명옥진은 어떻게 해서든지 천완국의 지배를 벗어나야만 하였다.
마침 명옥진이 쓰촨성 여러 지역을 공략하고 있을 당시, 천완정권의 내부에 분열과 대립 갈등이 일어났다. 어부 출신으로 전투에 능한 예문준이 천완국의 승상이 되어 권력을 전횡하면서, 주군 서수휘를 암살하고자 기도하였다. 결국 사전에 발각되어 예문준의 계획은 실패하고 황저우(黃州)로 달아났는데, 이번에는 예문준의 부하인 진우량이 예문준을 살해하였다. 예문준을 살해한 진우량은 ‘평장(平章)'이라 자칭하고, 장저우(江州)로 도읍지를 옮겨 천완정권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마침내 1360년, 진우량은 차이스지(採石磯, 馬鞍山市에서 남으로 6km 떨어진 곳)의 강가에서 서수휘를 죽인 후,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大漢)'이라 하였다. 이처럼 천완 정권에 내분이 일어나자, 명옥진은 진우량을 증오하면서 그와 관계를 끊었다. 반면 살해된 서수휘에 대해서는 묘당을 세워주고 세시에 맞춰 그를 제사함으로써 의리를 지키며 민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당장 진우량과 싸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쓰촨 지역의 원조 세력이 제거되어 정세가 안정되기는 하였지만, 진우량 토벌은 신중을 기할 일이었다. 만약 진우량을 토벌하기 위하여 대병력을 산샤에 출동시킨다면, 후방이 비게 되어, 산시와 윈난에 잔존한 원조 군대의 침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샤지역으로 군사를 출동시키는 일은 모험적인 일이었고, 쓰촨 백성들에게는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원조의 진사였던 유정(劉楨)은 명옥진에게 칭제하여 독립한 것을 건의하였다. 명옥진은 그의 건의에 따라 1362년에 ‘농촉왕(陇蜀王)'이라 칭한 후, 1363년 정월 초하루에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하(大夏)',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이때 선천력(先天曆)이라는 역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 원말에 각 지역의 군웅들도 모두 국명과 연호를 가지고 있었듯이 명옥진도 독자적인 국호와 연호를 구상하여 지배체제를 갖추어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대하정권의 중앙과 지방의 지배기구 명옥진은 나라를 세운 뒤 먼저 중앙 지배기구를 마련하였다. 중앙기구는 주대(周代)의 제도를 모방하여 6경(六京)체제를 채택하였다. 주대에는 천(天), 지(地), 춘(春), 하(夏), 추(秋), 동(冬)의 6관을 두어 다스렸는데, 대하에서도 그것을 따라 육경을 두었다. 백관을 총리하는 직인 총재(?宰, 天官), 토지와 인민을 관할하는 사도(司徒, 地官), 종묘 제사 등 예악을 담당하는 종백(宗伯, 春官), 군정을 담당하는 사마(司馬, 夏官), 사법과 형옥 및 규찰을 관장하는 사구(司寇, 秋官), 토목ㆍ공작 등을 담당하는 사공(司空, 冬官) 등 육경제도를 채택하여 지배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실의 문서작성을 담당하는 한림원(翰林院),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 지방 학교인 제거사(提擧司)를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종묘를 세워 조상을 제사하고, 사직단을 두어 황제가 천지에 제사하였으며 아악(雅樂)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군사기구로는 중앙에 추밀원(樞密院), 지방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다. 지방 행정기구도 원대의 제도를 답습하여 쓰촨을 8도로 나누어 다스렸다. 부에는 자사, 주에는 태수, 현에는 현령을 두어 다스렸던 것이다. 8도의 영역은 지금의 쓰촨성의 대부분과 산시(陝西)성, 깐쑤(甘肃)성, 꾸이저우(貴州)성, 윈난(雲南)성, 후베이(湖北)성 등의 접경 지역을 지배하면서 원의 지배를 벗어나 독자적인 지방 정권을 수립하였는데, 가장 강성한 시기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이릉(彝陵, 지금의 湖北 宜昌(후베이성 이창)), 서쪽으로는 윈난의 중칭(中慶, 지금의 昆明(쿤밍)), 남쪽으로는 보저우(播州, 지금의 貴州 遵義(꾸이저우 준이)), 북쪽으로는 싱웬(興元,지금의 陝西 漢中(산시 한중))에 이르고 있었다.
1365년 이후로는 원의 제도를 따라 6경 제도를 폐지하고 중서성, 추밀원, 평장 등의 관직을 두었다. 곧 민정을 담당하는 최고기관으로 중서성, 군정을 담당하는 최고 기관으로 추밀원, 지방의 인민을 다스리는 평장을 두고, 종래 중앙부서에서 봉직하던 인물을 그대로 발탁하여 정사를 돌보도록 하였다. 대하국이 초기에 주나라의 제도를 본떠서 행정조직을 갖추었다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는 원나라의 제도를 본떠 다시 정비한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명옥진이 초기에 중국 고대의 전통적인 주의 6경제도를 채택한 것은 그의 반원적인 태도의 표명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쓰촨성에서 원의 지배를 배격하기 위한 명분은 다름 아닌 민족주의에 호소한 것이었다. 이민족인 몽골족을 타도하고 한민족을 부흥시킨다는 것을 이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정신이 명씨대동보에 잘 나타나 있다. 족보에서 시조 명옥진을 설명하는데 “1대 시조 명옥진은 송 상흥 기원후 54년 신미년에 수주에서 태어났다(一世 始祖 明玉珍, 宋祥興 紀元後 54年 辛未 誕降于隨州)."라 서술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상흥(祥興)은 남송의 마지막 황제 조예(趙芮)의 연호로, 명옥진의 출생 기년을 원대에 대지 않고 남송 마지막 황제 조예에 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하고 해석할 수 있다.
대하국의 멸망과 명승의 고려 귀화 1366년 2월 6일, 명옥진은 윈난으로 물러난 원조 세력과의 전투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즉위 5년, 그의 나이 겨우 38세 때의 일이다. 그는 여러 신하들에게 동심협력(同心協力)할 것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으나, 이후 대하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죽은 후 내부적으로 신하들 사이에 알력과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아들 명승(明昇)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지만, 그의 나이 겨우 10살에 불과하였고, 황제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황후 팽씨(彭氏)가 섭정하기는 하였으나 관료들 사이에 많은 알력 및 살해 사건이 계속됨으로 국력은 급속도로 쇠퇴하기에 시작하였다.
최고의 개국공신인 만승이 살해당한 이후, 관료들은 왕실의 권위를 불신하며 잘 따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하국의 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명(明)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먼저 쓰촨의 대하국 정벌에 나섰다. 쓰촨은 새로 건국한 명조에 좋은 목재를 제공하는 곳일 뿐 아니라 윈난의 원의 잔존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도 먼저 점령해야 할 지역이었다. 1370년 겨울, 충칭과 쿠이관(夔關)을 먼저 공격하였다. 1371년 봄, 명의 군 총사령관 부우덕(傅友德)은 10만 병력을 이끌고 청뚜(成都) 공략에 나섰다. 명군은 도중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면서 충칭으로 진격하여 나갔다. 충칭 성 안에서 수비하고 있던 장병들은 차츰 대하 정권이 와해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371년 6월, 명군이 충칭에 도착하자 대하의 승상 오우인은 전세가 기울여져 있음을 알고 명승과 황태후 팽씨를 부축하여 국새를 가지고 투항을 선언함으로써 대하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 때 명승의 나이 15세였다.
충칭을 점령한 부우덕과 요영충은 명승과 황태후 팽씨를 데리고 7월에 난징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국새, 금인, 면류관, 의장, 은인 58개, 동인 640개 등 많은 인장과 왕실 의관 등을 명 태조에게 바쳤다. 명 태조는 명승에게 귀의후(歸義侯)라는 벼슬을 주고 난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다. 난징에 도착한 명승은 명 태조의 후대에도 불구하고 늘 우울하고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명 태조는 이들을 고려에 귀양 보내어 살도록 조처했다.
명승, 황태후, 진우량의 아들 진리 일행 등 남녀 27명은 환관 연안답리(延安答理) 및 손내시(孫內侍)의 호송을 받으며 1372년 1월에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당년 5월에 고려 송도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명 태조가 보낸 서신을 가지고 공민왕을 알현하였다. 공민왕은 명승에게 두 개의 현(縣)을 주고 송도 북부 이정리의 흥국사(興國寺)에서 거주하게 했으며, ‘군도 되지 말고(不做軍) 민도 되지 말도록(不做民)' 예우하였다. 표면적으로는 공민왕이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나 실은 고려 측에서는 또 다른 현실적인 외교 관계와 문물 교류를 기대하고 있었다. 명 태조는 홍무 4년(1371)년경부터 고려에 대하여 비교적 강경하고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에 고려는 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중국 선진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이런 양국관계 속에서 명승의 귀화가 성립되었고 그는 국빈의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하도록 배려 받았다. 그 이듬해에 명승은 총랑(聰郞) 윤희종(尹熙宗)의 딸과 결혼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성계가 등극할 때에 명승의 어머니 팽씨가 용포곤의를 지어 올려 태조에 올렸으며, 태조도 이를 만족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팽씨는 중국 궁정의 복장을 조선에 보급하는데 기여한 셈이다. 명승은 조선 태조 때 화촉군(華蜀君)에 봉해지고, 태종 때에는 충세훈록(忠世勳祿)의 예우를 받았다. 이후 후손들이 명옥진을 시조로 하고, 그가 황제로 웅거한 서촉을 본관으로 삼아 한반도에서 630여 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대하국의 역사적 의의 비록 대하 정권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의와 성격은 간과할 수 없다. 첫째, 원말명초(元末明初)의 혼란기에 사회 안정을 위한 노력이다. 명옥진은 교육을 강조하고, 능력 있는 자들을 발탁하였으며 특히 과거제(진사과)를 시행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것은 당시 쓰촨의 사회 안정과 교육문화 수준의 제고(提高)에 기여하였다. 또한 대하정권은 근검절약, 부세경감 등을 강조하면서 농민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다. 특히 지폐인 교초의 남발로 인한 극심한 통화팽창(通貨膨脹)이 만연하던 당시 천통통보(天統通寶), 천통원보(天統元寶) 등 주조 화폐를 사용함으로써 물가안정에 힘썼다.
둘째, 대하정권의 정치기구 조직 초기에는 주나라의 제도를 표방하여 6경을 두었지만, 나라가 안정되자 송·원대의 제도를 도입하였다. 초기 주대의 제도를 택한 것은 정권 수립의 명분상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쓰촨에서의 새로운 정권 수립의 명분을 반원(反元)과 민족주의에서 찾으려하였던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셋째, 그는 몽골 유풍을 없애고 전통적인 한(漢)문화를 일으키려 노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몽골민족은 좌(左)보다 우(右)를 더 숭상하였는데, 대하국은 우보다 좌를 숭상했다. 이것은 쓰촨에서 반원운동을 전개하는 과정가운데 나타난 민족주의적 태도의 발로라고도 해석된다. 한국의 명씨 족보에 명옥진이나 명승의 출생을 원대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원에 의해 멸망한 남송의 연호를 굳이 사용하고 있는 것도 대하정권의 반원정신과 민족문화 숭상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넷째, 명승의 고려 귀화를 통해 한국 명씨(明氏)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황실제도 및 궁정 문화가 조선 왕조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명옥진의 대하정권에 대한 이해는 중국의 쓰촨사(四川史),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사회상, 14세기 한중관계사를 파악하는 데 좋은 관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전순동 | 본지 집필위원·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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