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땅에서 보낸 시간들 ‘아름다운 땅에서 사랑을 입은 자 룻 올림’ 그동안 중국에서 동역자분들께 보내드렸던 편지의 마지막은 여러 차례 이렇게 끝마쳐 있었다. 자식이 부모를 닮듯 나도 이 땅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평균 해발 3천 미터에 나무 한 그루 없는 벌거숭이 산, 그 무엇이라도 삼켜버릴 듯 휘몰아치는 황사, 화사함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잿빛 일색의 건물들, 그 속에서 몸부림치며 삶을 연명하고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어느 면으로 봐도 황량한 이 곳을 ‘아름다운 땅’ 이라 부르기에 주저함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에서 처음 봄을 맞을 때이다. 곱디고운 목련의 자태와 그윽한 라일락 향기에 취할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아무런 색도, 생동감마저 느낄 수 없는 허무한 봄이었다. 아쉬운 대로 기억 속에 남겨진 한국의 봄을 잠시 꺼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사람 사는 듯한 색을 좀 더해보려고 화초도 길러 보았다. 그러나 매일 두 번씩 물을 주어도 생명력 강한 잡초성 식물 외에는 건조함과 심한 일교차를 견디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래서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 하는가 보다. 지나고 보니 나 또한 이 곳에 살면서 모진 일들도 제법 겪었다.
내가 살던 ○○지역은 상하이(上海)나 베이징(北京)으로부터 기차 타고 2~3일,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몇 시간을 들어가면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는 곳이다.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 종교를 가진 소수민족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어서인지 민족 간의 반목과 질시, 이방인에 대한 배척이 심하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살고 있는 나 역시 원수의 공격과 함께 오는 환격의 악영향을 피해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던 듯 싶다.
나그네의 설움 얼마 전 다녀간 단기선교팀을 잘 대접해준 무슬림 친구 집에 감사 인사와 함께 선물도 전해줄 겸 그가 사는 마을에 들어섰다. 그 친구가 너무도 부러워하며 갖고 싶어하던 단기팀 형제의 장갑도 가지고 갔다. 공교롭게도 친구 집 대문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잠시 기다리다가 땅밟기(수 1:3 신 11:24)도 할 겸 칭전쓰 (淸眞寺:이슬람 사원)에 갔다. 마침 예배를 마치고 흩어지는 사람들을 담아볼까 해서 비디오 카메라를 꺼내들고 길 건너편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얼마 못되어 한 떼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카메라를 빼앗으려 하면서 자기들 땅에서 당장 나가라고 사정없이 나를 떠밀기 시작했다. 그만 찍겠다 해도 소용없다. 몸으로 밀쳐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돌아가려는데 돌까지 던져댄다. 그 때 사원 앞 골목에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좀 전에 친구 집 앞에서 몇 사람에게 친구의 가족 행방을 물었으니 내가 그 집의 손님인줄 알텐데도, 누구하나 아이들을 꾸짖거나 말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갈수록 난폭해져 내가 어디로 피하든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공격했다. 머리와 얼굴, 온몸에 주먹과 돌이 날아들었다. 더 이상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긴 여행 끝이라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나그네의 설움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저들과 이 땅을 위해 기도해주며 선물을 들고 온 나를 이렇듯 박대하다니….’ 북받치는 슬픔에 순교자 스데반 집사 같은 기도는 차마 나오지도 않았다.
마을 어귀에서 택시를 만났다. 원래 1인당 1위안(元)인 것을 아는데 기사는 10위안을 부른다. 평소 같으면 흥정을 했겠지만 ‘당장 이 곳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에 올라탔다. 그대로 돌아올까 생각도 했지만 자주 오기 어려운 곳이니 이왕 왔을 때 한 군데라도 더 가야겠다 싶어, 계획대로 이웃 마을에 사는 또 다른 친구 집에 갔다. 간신히 진정하고 마을에 들어서는데 친구 가족을 만났다. 아는 얼굴을 보니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때리는 아이들보다 방관자인 어른들의 태도가 더 납득되지 않아 이유를 물으니, 철부지 아이들이고 교육수준이 낮아 교양이 없다는 대답 뿐이다. 철부지 아이들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십대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돌에 맞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 번은 티벳족 친구 집에서 기계국수를 뽑으러 밀가루를 가지고 아랫마을 상점에 갔을 때였다. 무슬림 아이가 내게 계속 돌을 던졌다. 처음엔 아이니까 하는 마음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아이는 지붕에 올라가서까지 돌을 던졌다. 손님인 내가 맞는 것에 화가 난 친구가 아이를 꾸짖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아이 부모와 주변의 무슬림 어른들에게 아이를 꾸짖어 달라고 말해봤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내 친구는 자기도 어릴때부터, 티벳족을 업신여기고 때리기까지 하는 그들을 피해 등하교길엔 일부러 멀리 돌아서 다녔다며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 그 후 시원한 여름이 왔다. 고산지역이라 겨울(10~4월)엔 너무 춥고 길마저 얼어붙어 교통이 불편한 반면, 6~8월은 서늘하여 가장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다. 또한 민족 전통축제나 종교행사가 많아 땅밟기와 자료수집도 할 겸 두루 다닌다. 한 지역의 티벳족 민족행사를 3일간 보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느라 무슬림 자치지역에서 차를 갈아타고 갈 때였다. 차를 탈 때의 약속과는 달리 목적지도 아닌 곳에 내리라며 두 기사가 부당한 돈을 요구했다. 목적지에 데려다주면 원래의 돈을 주겠다고 하자 자기들 한패가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더니, 흰 모자를 쓴 무슬림 남자들과 함께 사람들이 지켜보는 대로변에서 여자 둘인 우리를 때리는 것이었다. 지나가던 중년의 무슬림 남자마저 전후상황도 모르면서 무조건적인 민족애에 젖어 저들과 함께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가! 날아든 주먹에 얼굴을 맞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계속되는 주먹질과 발길질에 몸은 여기저기 멍들고, 메고있던 배낭마저 빼앗겼다. 배낭은 찢기고 돈마저 빼앗기고 나니 너무도 억울하여 엉엉 울었다. 설령 경찰서에 가더라도 자치지역의 같은 민족 경찰이기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속수무책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는 허망함에 하늘만 올려다보며 우는데, 내 속사람이 하나님께 계속 호소하고 있었다. “아버지! 내 마음이 아파요.”
원래 그 지역은 우리가 몇 년 전부터 칭전쓰를 중심으로 도시 중보기도와 전도지 배포를 했던 곳이다. ‘작은 메카’라 할 정도로 이슬람의 세력이 강하여, 다른 곳과는 달리 여자인 우리는 칭전쓰 마당도 못 밟게 하는 곳이었다. 그 후 다른 사역자들도 그곳에서 봉변을 당하고 쫒겨나는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곳을 ‘불법이 성행한 도시’, ‘포악의 도시’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일이 있곡부터 나는 무슬림들이 쓰는 흰 모자만 봐도 몸서리쳐지며 고개가 저절로 돌려졌다. 그런데 차를 타도 이미 앉아있는 내 자리를 자기 자리라고 내놓으라며 윽박지느는 무슬림 남자, 길에서 희롱하는 남자 등 공교롭게도 나쁜 무슬림 남자들을 계속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비록 나의 사역 대상은 티벳족이지만 주변의 무슬림들도 품고 기도해왔는데, 이런 일을 자주 겪게되니 사랑하는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마냥 싸늘해져 가는 내 마음이 부끄러웠다. 주님 앞에서 그들을 용서하고 아버지의 심령으로 채워주시도록 구하자 다시금 회복되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원수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그 날은 특별히 티벳불교 사원에서 사역자 연합 기도모임을 가진 날이었다. 그 넓은 사원의 전각마다 돌며 말씀을 선포하며 손을 얹고 대적기도를 했다. 보통 그렇게 한바퀴 돌려면 빨리 걸어도 세 시간 정도 소요된다. 병 낫기나 소원을 빌고자 오체투지(五體投肢: 온 몸을 땅에 던져 엎드리는 기도행위)로 손발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사원을 도는 티벳인들을 만날 때면 안타까움과 더 깨어있어야겠다는 경각심이 든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한 무리의 남자들을 통한 원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괜한 시비를 걸어오더니 급기야 마구잡이로 폭력을 가해왔다. 그들의 사정없는 주먹질과 발길질에 코피가 터지고, 등에까지 남은 선명한 발자국하며 겉옷도 다 뜯어졌다. 폭력의 난무함 속에서 오히려 덤덤하여 “그래,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 뭐…” 스스로에게 중얼거리고 있는 감정을 잃어버린 듯한 나 자신을 보았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처럼 너무도 태연히 구경하는 그들을 보며, 오히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일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또 마치 내가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간신히 집에 돌아와 여느 때와 같이 예배를 드리려고 주님 앞에 엎드렸는데, 그제서야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입을 벌려 기도하려는데 내 속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 42:5)’는 음성이 반복하여 들려왔다. 그 밤엔 주님 앞에서 울며 기도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 가르치셨던 목사님께서 가정교회 지도자 연합집회 강사로 중국에 오는데 나를 만나보고 싶어하시니 꼭 가보라는 것이었다. 집회가 열리는 곳은 두 번 기차를 바꿔 타고 3일, 또 버스 두 번 갈아타고 하루 꼬박 가야하는 곳으로, 그날 바로 출발해야만 집회 시작에 맞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만 주님께서 내 형편과 필요를 아시고 정확한 때에 여러 사람을 동원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이 회복 프로그램을 시작하신 것이었다. 놀랍게도 집회를 시작하자마자 선포된 목사님의 말씀은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말씀이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7~18)”, “하나님 일을 하면서 내게 핍박이 오면 ‘내가 바로 가고 있구나! 하나님이 나를 믿기에 고난을 주신 것이다.’ 라고 생각하라”. 말씀이 시작되자마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그칠 줄 몰랐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4)”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보니 유독 스데반만이 온갖 보석으로 가득한 면류관을 쓰고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들이 던진 돌멩이 하나 하나가 머리에 와서 부딪힐 때마다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여 면류관이 되었다는 예화를 들으며 자연스레 내가 돌에 맞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픔과 함께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또 이 땅에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천국에 가신 할머니를 주님이 기뻐 맞아주시며, 신랑이 신부를 안고 신방에 들 듯 친히 안고 가시더니, 손에 수건을 들고 복음전파로 피곤한 발을 씻겨 주시더라는 말씀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의 물결이 밀려왔다. 말씀은 끝났지만 나는 쉬는 시간, 식사 시간 따로 없이 기도에 몰입했다.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내게 무슨 아픈 상처가 있나 보시는 (시 139:23~24) 주님의 강권하심에 따라, 아픔의 현장으로 돌아가서 당시 나의 감정 하나 하나를 올려드렸다. “연약한 여자일 수밖에 없는 제가 봉변당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한마디 말로 말려주는 사람도, 변호자도 없이 주님 저 혼자였어요.” 주님은 나를 꼭 안아주시며 “바로 내가 너의 변호자요 너와 함께 거기 있었노라” 대답해주셨다. 형통한 삶을 주심도 은혜이겠으나, 내가 감당할 만큼의 고난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하시려는 더욱 큰 은혜를 주신 것에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 날이 속히 오길… 사역현장에서의 경험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처음엔 거절했다. 다른 사역지처럼 교회 개척이나 그에 버금갈만한 많은 열매가 있는 것도 아니요, 단지 부르심 받은대로 내 백성 티벳족을 대신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드리는 예배의 삶을 살기에 힘썼던 것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주 안에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였듯 나도 나의 약함을 자랑하기로 했다. 내가 연약할수록 주님의 강함이 드러남을 보았기 때문이다(고후 12:10). 그래서 나는 이 찬양을 즐겨 부른다. “약할 때 강함 주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어느 날 기도하는데 주님이 내게 물으셨다. “네가 나를 위해 피 흘릴 수 있겠느냐?” 나와 동역자들이 흘린 눈물과 땀, 주님의 피와 사랑이 이 땅을 가득 덮어서 회복의 그 날이 속히 오길 간절히 소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부족한 이 모습 그대로 사용하여 주시는 주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김 룻 | 중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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