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0.20  통권 72호     필자 : 편집부
[특집] - 특집/ 여성선교사
한국 교회 최초의 여성선교사 김순호

 현재 한국 교회가 전세계에 파송한 선교들 가운데 50% 이상이 여성선교사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중 많은 숫자가 중국에 파송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한국 여성으로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된 여성이 바로 김순호이다. 한국인으로 중국에 나가 복음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수많은 여성선교사들의 선배인 김순호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돌아봄으로써,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여성선교사들이 자부심을 얻고 사역의 교훈을 얻길 기대한다.

한국 교회 최초의 여선교사 파송 
한국 교회는 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시작되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 총회에서 선교사 파송 청원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1913년 중화민국 산둥성(山東省)에 3명의 조선선교사(박태로, 김영훈, 사병순)를 파송하여 실질적인 타문화권 선교를 시작하였다. 초기 3인의 선교사에 이어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이대영, 방지일 등이 산둥성으로 파송을 받아 사역을 감당하였다. 

중국에 여성선교사를 파송하자는 내용이 한국 교회에 공식적으로 처음 언급된 것은 1928년 9월 대구에서 개최된 제17회 총회에서였다. 이어 1929년 총회에서 여선교사를 세워 중국 여성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역을 계획에 포함함으로써 파송 의지를 분명히 하게 되었고, 1930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19회 총회에서 여선교사 파송안을 구체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른다. 남성 목회자만을 선교사로 인준하여 파송하던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여선교사 파송을 결의한 것이다. 

여선교사 파송의 실무를 담당하는 기관은 1928년 창립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였다. 1931년 3월에 여전도회는 교계신문인 기독신보에 중화민국 산둥 여선교사 지원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냈다. 모집 규정은 장로교인으로, 만 25세에서 만 30세의 중등 이상의 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원 혹은 동등 이상 과정의 신학을 졸업한 자, 그리고 모집 당시 교역(敎役)에 종사하는 자로 충분한 성경지식과 사역 경험이 있는 여성이라는 기준을 내걸었다. 한국 교회 최초로 중국에 보내는 여성선교사였기에 중국 여성들을 잘 지도할 수 있는 수준높은 일꾼을 선택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김순호가 선발되어 1931년 9월 11일 금강산 수양관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녀는 이미 중국 산둥성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구역 내에서 선교부의 지도를 받아 사역을 하도록 결정되었고, 봉급과 어학학습비 600만원, 교통비 30원이 예산 책정되었다. 이와 같이 김순호 선교사는 여전도회의 인선과 지도, 장로회 총회의 확실한 인준과 파송절차를 거친 후 중국으로 파송되어 중국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였다.

산둥의 ‘김꾸냥’ 
산둥성에 도착한 김순호 선교사는 라이양(萊陽 :래양)에 거주하면서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는데, 어학에 재능이 있던 그녀의 중국어 실력은 비교적 빠르게 향상되었다. 라이양에서 1년 정도 지낸 후 1932년 9월 베이징(北京)에 가서 중국어를 배웠고, 1933년 다시 산둥으로 돌아왔다.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1934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선배 선교사들의 사역지에서 전도하고 심방하고, 각 지역 교회를 돌며 명확한 발음과 유창한 중국어로 말씀을 전하였다. 

당시 산둥 사역에 ‘김꾸냥(金姑娘)’으로 불리웠던 김순호 선교사는 1936년 귀국하기 전까지 선교지 17개 지역을 순회하면서 중국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인 ‘도리반(道理班)’을 맡아 가르치고 사경회와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가는 곳마다 큰 환영을 받았는데 특히 부녀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녀를 통해 낙심한 자들이 통회하고 주께 돌아왔고 불신자들도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주님을 영접하였다. 1934년의 보고에 따르면 그녀가 방문한 교회 중 두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한다. 

김순호 선교사는 현지 조선선교회를 통해 현지에서의 안전을 위한 보호 및 관리를 받았고, 또한 조선선교회 임원으로 참여하여 남성 선교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1934년과 1935년에 산둥 조선선교사회에서 서기의 직무를 맡아 선교사역 진행과 관련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중국 노회인 라이양노회에서 회계로 선임되기도 하였다(1935년 11월 25일).

만 5년 간 산둥에서 어학 학습과 선교활동을 하던 김순호 선교사는 1936년 8월 안식년으로 귀국한다. 총회에서는 1년의 안식년 동안 6개월은 안식하고 6개월은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지모(卽墨: 즉묵)에 성경학교를 건축할 건축비를 모금토록 하였다. 그러나 안식년 1년이 지난 후에도 김 선교사는 선교지로 돌아가지 못했는데, 그것은 1937년 전면적으로 중일전쟁이 전개되면서 산둥성 선교지가 일본의 점령지가 되어 위험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김 선교사는 만주의 무단장(牧丹江 : 목단강) 교회를 돕다가 일본 횡빈여자신학교에 가서 3개월 간 수양하고, 1938년 10월 17일 산둥성 선교지로 돌아왔다. 

그녀는 칭다오(靑島 : 청도)시에 거주하면서 지모를 왕래하며 이전처럼 성경공부 모임을 개최하여 중국 여성들을 지도하였고, 칭다오시 태평촌 교회와 중가와 교회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던 중 여전도연합대회는 시국관계를 이유로 김 선교사를 당분간 소환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하여 1939년 9월 20이 귀국으로 김순호 선교사의 산둥성 선교는 막을 내리게 된다.

만주국 선교사로
 
939년 겨울, 김순호 선교사는 사역지를 변경하여 만주국(滿洲國)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된다. 당시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대소련 전략기지, 철강, 석탄, 농산 자원 공급지,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 농촌 과잉인구의 배출구로서, 수도인 신경(新京 : 지금의 장춘)특별시 외에 19개의 성(省)을 두었으며 4,312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봉천노회의 현의에 의해 만주에 선교하기로 결의하고, 1937년에 최혁주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여 만주선교를 시작한 상황이었다.

김순호 선교사는 신경에서 남쪽으로 120리 떨어진 지린(吉林)성 슈앙양(雙陽)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최혁주 목사와 동역하게 되었다. 이미 산둥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선교한 경험이 있고 유창하게 중국어를 할 수 있는 김 선교사를 통해 쌍양현의 선교는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 선교사는 산둥에서와 마찬가지로 만주국에서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슈앙양현 교회, 슈앙허진(雙河鎭) 교회 등 각 교회에서 1개월 과정의 부녀 도리반을 설립하여 만주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글자를 모르는 여성들에게는 주음자모(主音字母: 중국어 발음표기법의 일종)를 가르쳐 문맹을 깨우쳐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역은 만주 지역사회,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받았으며, 김순호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지 천사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부근 농촌을 순회하며 ‘장막(帳幕)전도’를 하였다. 찾아간 마을에 장막을 치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팔을 불고 찬송을 불러 사람들을 소집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방식의 전도였다. 당시 만주선교에 관련된 기록을 보면 이러한 사역에 대해 김 선교사는 매우 만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순호 씨도 산둥선교 보다는 물론 힘은 드나 재미는 무한(無限)하다고 하며, 이제야 선교의 취미(趣味)를 본다고 한다. 산둥은 타인이 건설하여 놓은 것을 심방이나 하고 도리반이나 할 것뿐이었으나 만주선교는 그야말로 제일선 개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김창덕, ‘만주광야 부르짖는 소리’, 기독교신문, 1942년) 

산둥에 있을 때는 정착한 선배 선교사들로부터 필요한 도움을 제공받았고, 이미 그들이 복음의 씨앗을 뿌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개척에 대한 부담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사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만주에 와서 비로소 활동적이고 개척적인 사역을 통해 선교사로서의 기량을 더욱 발휘하였던 것이다. 

김 선교사와 최 목사의 적극적인 전도를 통해 이전에 복음이 전해진 적이 없던 미전도 지역에 믿는 자가 생겨났고, 이 신자들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는 등 풍성한 열매들이 맺혔다. 인구 4~5천 명이 거주하던 소과가(燒鍋街)라는 농촌 마을의 경우 단 한 명의 신자도 없었으나, 두 선교사의 전도를 통해 10여 명으로 신자가 늘었고 이들 신도들은 스스로 땅을 바치고 헌금을 작정하는 등 자력으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만주 선교 7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던 영국과 스코틀랜드 장로교, 아일랜드 장로교는 당시 신자 2만 5천 명에 280여 개의 예배당, 만주인 목사가 60여 명이 있었지만 완전히 자립하는 교회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김순호 선교사를 포함한 조선 선교사들은 만주선교 착수 3년만에 만주인 스스로 예배당을 세울만큼 자립정신이 철저한 교회를 일으켰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열심히 전도하고 신도들 스스로 예배당을 세우는 가운데 교회들은 크게 부흥하였다. 김순호 선교사는 이곳에서도 부녀자를 위한 도리반을 만들었고 많은 여성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김순호 선교사와 최혁주 목사는 만주인 선교사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회만 있으면 재만(在滿) 각 노회를 찾아가 사역을 보고하였다. 그 결과 남만(南滿) 노회에서는 어떤 형제가 전도인 1인을 돕기로 하였고, 김순호 선교사를 통하여 동만노회에서도 전도인 1인과 자금을 지원하는 후원자가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신경 등지의 여성계에서 김순호 선교사를 통하여 선교후원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사임 후에도 계속되는 사역 
김순호 선교사는 1940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 29회 총회에 참석하여 쌍양현의 전도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194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7년부터 시작된 만주선교를 1942년 2월에 종료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만주기독교총회에 통지하기로 결의한였다. 이에 따라 김순호 선교사는 만주국 선교사직을 사면하게 되는데, 1942년 9월 2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재21회 여전도연합대회에서 사면이 접수되어 허락하기로 결의하였다. 만주 선교사지을 사임한 이후에도 김순호 선교사는 1년 간 사역을 계속하였다. 예산 1천 2백 원 중 1천 원은 김순호 선교사가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저축한 돈으로, 2백 원은 여전도연합대회가 부담하기로 하였다. 즉 선교사를 사임한 이후 1년 간 더 사역하면서 필요한 비용은 대부분 김 선교사 자신이 감당하였던 것이다. 

김순호 선교사가 만주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기간은 1939년 12월부터 1943년 9월 전까지로 추측되는데, 1년 간 더 사역하기로 했다는 기록 외에 또다른 역사적 기록이 발굴되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렵다. 대략 만주국에서 4년 정도 사역한 것으로 여겨지며, 한족과 소수민족(만족) 여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등 성실하고 보람있게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녀는 6․25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51세의 나이로 공산당원들에 의해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순호 선교사의 사역을 되돌아보며 
김순호 선교사는 한국 교회가 최초로 외국에 파송한 여선교사이자, 동양 여성 가운데 교단 총회의 인준과 장로교 여성들의 연합기구인 여전도회 인준을 거친 최초의 중국 선교사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인물이다. 오늘날 중국 교회 성도의 대다수가 여성임을 미루어볼 때, 70여 년 전 중국 여성 선교사역의 개척자로 헌신한 김순호 선교사는 중국의 여성 복음화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둥성에서 6년, 그리고 만주국에서 4년 이상 중국 여성들을 복음으로 해방하여 구세주를 알게 하였던 김순호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통해 발견되는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김순호는 미혼이자 엘리트 여성으로서 기꺼이 중국선교에 헌신하여 선교사로서 당당히 사역했다. 지금까지도 한국 교회 안에 깊게 남아있는 유교적인 남녀차별과 권위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기꺼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타국으로 나아갔던 젊은 독신여성의 헌신적인 선교사역은 당시 한국 교회에 여성의 목회를 인정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김순호가 산둥성에 사역하던 시기, 그리고 만주국으로 사역지를 옮기고 이후 선교사직을 사면하게 된 시기는 우리 나라가 국가정세상 큰 변화에 놓여있던 때이다. 이런 여건 속에서 복음사역에 힘을 쏟는 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순호는 여성이라는 조건이나 시대적인 어려움에도 동요되지 않고 오직 선교지의 영혼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셋째, 김순호 선교사는 중국 여성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사경회와 부흥회를 인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사역에 참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중국의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에 김순호 선교사를 사용하셨다. 오늘날 중국에서도 말씀사역에 은사가 있는 여성선교사들이 신학교 사역, 지도자 훈련 등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김순호 선교사는 산둥에서 이미 정착한 선배 선교사들이 개척해 놓은 터에서 순탄하게 사역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2차 선교지인 만주국에서 최혁주 목사와 함께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농촌지역을 순회하며 장막을 치고 찬송을 불러 사람들을 소집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저인 방식의 사역에 오히려 그녀의 기량이 발휘되었다. 

다섯째, 현지 선교본부의 임원으로 선임되어 남성 선교사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선교사역의 리더십을 감당하였다. 김 선교사는 1934년과 1935년에 산둥 조선선교사회에서 서기의 직무를 맡았을 뿐 아니라, 중국 노회에서 회계로 선임되었다. 조선 여성 선교사로서 중국 교회 노회의 임원으로 선출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여섯째, 파송기관인 여전도회와의 긴밀한 유대관계와 팀사역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1928년 한국 교회 안에 최초로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창립되고 첫 번째 해외선교를 위해 김순호 선교사를 1931년에 파송하였다. 김순호는 여전도회의 전담 재정 지원과 회원들의 중보기도의 뒷받침으로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 후 여전도회가 파송한 다른 3명의 여선교사들과 함께 복음사역의 업적을 이루었다. 

복음을 받은 지 30년 밖에 되지 않았고 일제의 강점으로 주권을 상실한 약소국 조선의 교회가 중국 여성 복음화를 위하여 여성 선교사를 파송하여 사역하게 한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사실이다. 오늘날 중국선교에 큰 관심과 역량을 기울이는 한국 교회는 이러한 선교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앞으로 세계선교의 주역이 될 신실한 여성선교사들을 발굴, 지원, 훈련하는 일에 힘쓸 뿐 아니라, 이들이 역량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사역적 훈련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교철, “한국 여성 최초의 중국 여선교사 김순호와 중국 여성 선교”, 「중국을주께로」통권 45호, 1997년 5/6월호
김교철, “여선교사 김순호의 만주선교 연구”, 「중국선교 및 중국교회 역사연구 소식지」제5호, 중국선교협력회 부설 중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년
이정순, 「하나님을 향해 홀로 선 여인들」, 서울, 조이선교회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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