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3  통권 258호     필자 : 함태경
[선교나침반]
사도 바울에게 길을 묻다

최근 CGN 제작진이 바울전문가 최종상 선교사와 배우 차인표 집사와 함께 이스라엘, 튀르키예, 그리스, 키프로스, 몰타, 이탈리아 등 6개국을 돌며 사도 바울의 삶과 믿음의 여정을 담아낸 다큐 <바울로부터(총 10부작)>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오는 2월 15일부터 순차적으로 한국 기독교 최초의 OTT 플랫폼 <퐁당>의 3주년 특집 다큐로 선보이게 될 <바울로부터> 1, 2부작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이 넘나들며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제대로 살고 있는가? 주님과 첫 만남,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있는가? 바울과 같은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갖고 있다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건만, 지금의 나는? 수많은 결정의 순간에 주님의 마음을 투영해 보았는가? 그러면서 국민일보 기자 재직 시절 신년 특집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바울과 가상인터뷰를 했던 게 떠올랐습니다. <중국을주께로> 독자들이 허락하신다면 졸작이지만 16년 전과 14년 전 가상인터뷰를 나누며 각자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물론 우리의 동역자인 중국교회에게 주는 바울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것은 구원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참된 삶, 복음의 길로 타인을 인도하고 섬기기 위해 겸손, 자기희생으로 고난(고후 11:23∼30)을 영광으로 승화시킨 사도 바울의 심정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초대형 공개 강연을 한 적도, TV에 출연한 적도 없다. 그러나 전 세계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고 감동하고 있다. 그는 막 시작한 사업(복음 전파)을 자본이 전무한 상태에서 국제적 규모로 성장시켰다. 그의 사업은 당시 시장을 지배하던 세력(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유대교 주류 그룹)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었다. 조직(헬라파 유대기독인, 히브리파 유대기독인) 내부에서 큰 반대에 부닥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장애물을 만나야 했다. 그는 2000여 년 전 소아시아(오늘의 튀르키예) 길리기아 지역의 다소에서 태어났다. 전화, 팩스, 컴퓨터는 물론 인쇄기도 없던 시대에 열성 팬을 양산해낸 바울(헬라 이름, 히브리 이름은 사울)이 그 주인공이다. 기독교 교리의 정수이자 삶의 대헌장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 등을 남겼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기독교에서 바울보다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없는 기독교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모든 성도 중 가장 작은 자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던 외유내강의 전형, 바울을 가상 인터뷰를 통해 만나보았다.

사도,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 최고의 선교사 등 닉네임이 많으시네요. 뭐라고 불러드리면 좋을까요. 저는 선생님이 좋겠는데, 벽이 없는 것 같아서요. 그러나 선생님은 아무래도 사도를 더 선호하시겠죠. 이 때문에 생전에 심적으로 힘드신 적도 있으셨잖아요(고전 9:1∼2, 15:9; 딤후 1:11).

많은 사람이 나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의 수제자라고 하네. 유대인으로서 가장 명예로운 호칭이지. 하지만 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이 모두를 배설물처럼 여겼네(빌 3:8). 대신 사도로 불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 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네.

좋은 가문, 최고의 학벌,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 등 남부러울 게 없었는데. 그토록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멸해야 했나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에도 있으셨죠(행 7:58, 60).

질문이 참 고약하군. 그 일만 떠올리면 아찔하네. 그 때만 해도 내가 옳다고 여겼지. 당시 내 행동은 거의 광적이었어(행 26:11). 침략군이 초토화 작전을 벌이는 것 같았지(행 8:3, 9:21; 갈 1:13, 23). 집집마다 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끌어내 옥에 가두었어(행 8:3). 나는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을 부인하고 예수를 모독하는 말을 하게 했지(행 26:10∼11).
나의 좋은 환경은 오히려 편견을 심어줬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편견이었지. 유대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만이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은 나를 놀랍게 변화시키셨네. 이 같은 전인적 변혁은 아무한테나 오지 않을 걸(껄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네. 타락한 영혼을 바꿔놓았지. 그 힘이 많은 고난을 이겨내게 했지. 내 인생을 보게나.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지. 그뿐인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을,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도 경험했지. 또 숱하게 굶고 춥고 헐벗었지만 참을 만했지(고후 11:23∼27). 자랑 같으니 이만 하세.

 2세기 문헌(‘바울과 테클라행전’이라는 외경)을 보면 선생님은 대머리에 다리가 구부러지고 상대적으로 큰 코에 눈썹이 붙어 있는, 다부지고 작은 체구로 묘사돼 있던데요.

하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네(행 10:34; 롬 2:11; 벧전 1:17).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선택한 것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축복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이야(창 12:13; 갈 3:29).

동역자였던 바나바(구브르의 레위인 요셉, 바나바라는 이름은 권위자 ‘위로하는 자’라는 뜻)와 첫 번째 전도여행 이후 헤어지셨잖아요(행 4:36). 바나바의 생질 마가 때문이죠.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었나요.

바나바는 그의 이름 뜻대로 평생을 살았네. 나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이었지. 산소 같은 친구였어. 사실 1차 전도여행은 매우 힘든 여정이었지. 그러나 당시 중도 포기한 마가를 재등용하기란 내 성격이 용납할 수 없었어. 그러다 보니 바나바와 언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지. 결과적으로 보면 바나바의 판단이 옳았어. 사람을 키우는 데는 역시 바나바가 한 수 위인 것 같아. 불미스러운 일이 있은 지 약 12년 후 로마 감옥에 처음 감금됐을 때 난 골로새서 4장 10절을 통해 마가와 함께 있다고 기록했네. 또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 유언과 같은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도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고 했어. 그러면서 마가가 내게 유익하다고 했지(딤후 4:11; 몬 1:24).

사도행전 29장을 써 나가자는Acts29 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났는데요. 간단히 설명하면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복음을 더욱 열심히 전하자는 거죠.

누가는 귀로 듣고 발로 뛰어 그 내용들을 한 자 한 자 기록했네. 그것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지. 예수님 제자들의 사역 동선을 꼼꼼히 기록해두고 수많은 사건을 압축해 단 몇 마디로 사건의 전말을 분명하게 정리해놓았지. 내가 간 동선 굽이굽이에 서려 있던 복음에 대한 뜨거운 마음, 땀과 눈물의 흔적을 진맥하듯 소상히 기록했지. 그런 누가에게 사도행전이 미완성으로 끝났으니 29장을 써 내려가야 한다는 것은 실례 아닐까(하하).
  한국교회의 선교적 열심은 인정하네. 그러나 사도행전 28장 이후 나의 행적은 4권의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과 디모데후서에 충분히 반영돼 있네. 누가는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나와 동행하며 내 건강을 손수 챙겨준 은인이자 동역자지. 내가 유언처럼 마지막 남긴 편지에 보면 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4:11)고 표현돼 있네. 목회자들은 텍스트(성경)와 콘텍스트(상황)를 잘 이해하고 성도들에게 전해야 하네. 성경으로 돌아가자면서 성경적이지 않은 것을 가르친다면 절대 안 되지.

용서는 받기도, 하기도 어렵다고 하는데요. 예수님 안에서 빈부귀천을 초월한 기독교적 용납과 평등이 빌레몬서에 잘 기록돼 있더라고요.

혹시 신학을 전공했나. 이를 알려주시는 이는 성령이지. 빌레몬은 내가 쓴 편지(빌레몬서)를 읽고 오네시모를 용서했네. 이후 오네시모는 초대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어(골 4:9). 오네시모는 태어나 보니 종이었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뀔 수 없는 사실이었지. 그는 고민 끝에 소아시아 골로새에서 탈출, 로마까지 왔지. 로마는 도망친 노예에게는 가장 위험한 곳이면서도 몸을 숨기기엔 좋았지. 불안 속에 살던 오네시모는 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믿음의 사람이 됐지. 그런데 어느 날 대화 중 자기의 원래 주인이 빌레몬이었고 내 제자였음을 알았지. 난 그와 빌레몬이 당시의 제도를 뛰어넘어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도록 돕고 싶었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사상이지. 그래서 노예를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편지 한 통(빌레몬서)과 나의 또 다른 제자 두기고를 함께 보냈지. 당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요구였지. 그리스도의 정신은 인간해방, 휴머니즘, 박애를 모두 포함하네.
  
■ 수많은 저작을 남기셨는데. 선생님의 가르침을 몇 마디로 요약하실 수 있나요.

허허, 매우 어려운 질문이네. 이왕에 물었으니 대답해 보지. 잘 들어보게. 굳이 요약한다면 십자가를 통한 자유네(갈 2:20).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얻네. 곧 모든 얽매인 것으로부터의 자유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고린도전·후서에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복음전파 과정에서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빌레몬서는 시대 상황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언급했지. 여러 색깔의 자유를 말했지. 그러나 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이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초월적 상태에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복음을 좀 더 전했더라면 효과적일 텐데. 왜 직접 하지 않고 성령께, 제자들에게 맡기셨을지 생각해봤나. 이는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을 받을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네(딤후 4:8). 초대교회가 후대에 남겨 놓은 것은 땅끝까지 가는 열정이네.

이것은 성경적인 질문이 아닌데요.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묘한 질문이구만. 내가 21세기에 어울리는 사람이겠나(하하). 다시 태어난다면 또 복음을 전할 걸세. 그러면서 호스피스를 할까 하네. 내 몸에 질병이라는 가시가 있어 하나님께 세 번이나 고쳐 달라고 간구했어(고후 12:17).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지. 질병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게나. 물론 질병은 고통이지. 하지만 이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뢰하고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욕심을 꺾을 수 있어. 우리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르는 자리가 될 수 있네. 그러나 다시 태어나면 결코 하고 싶지 않은 건 있네.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냥 쳐다보지 않겠네.

수많은 목회자가 녹록지 않은 사역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일부 일탈 행위로 인해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기도 한다. 목회자들이 어떻게 하면 교회와 사회 속 희망의 등불로 다시 각인될 수 있을까. AD 1세기 당시 최고의 목회자, 신학자이자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에게 복음, 올바른 목회론, 지도자론 등에 대해서도 들어보았다.
  

예수 믿는 이들을 그렇게 박해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나요.

허허, 처음부터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구먼. 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자가 메시아가 된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와 비참한 삶의 종말을 의미했기 때문이지(신 21:23).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임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세상의 화목이라는 걸 이해하게 됐네(갈 3:13, 고후 5:21).

성공한 목회자를 꿈꾸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자는 ‘3P(권력 Power, 명예 Prestige, 지위 Position)’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목회란 무엇입니까. 

내가 힘써 복음을 전하여 신자를 얻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면 그것으로 복음 사역이 끝난 게 아니었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지. 곳곳의 교회마다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겨났었지. 그때마다 난 직접 교회들을 순방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 내가 못 가면 내 동역자들을 보냈네. 목회란 그런 것이네. 난 오로지 하나님 중심 사역을 하려고 했네. 나보다 하나님과 교회 및 성도들을 먼저 생각했지. 그러다 보니 마음속이 타들어가곤 했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고후 11:23∼27, 13장)를 보면 잘 나타나 있지. 목회자는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해 신앙의 경주자로서 달음질을 잘하도록 격려해야 한다네. 목회자를 평가할 때도 오랜 기간 지켜봐 주고 은사가 아닌 열매로 하기를 바라네.

바울 선생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삶의 통합을 말하고 실천하셨는데요. 목회자들이 각종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해결책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모범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지(딤전 3장). 사역자는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딤전 1:3∼11) 복음과 교회의 일꾼으로서 선한 교훈으로 양육 받고 경건을 연습해야 하네(딤전 4:6∼16). 자족과 경건의 생활도 해야지(딤전 6장). 예수님의 말씀과 경건의 교훈에 전념하지 않으면(딤전 6:3) 마음이 피폐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결국 불필요한 다툼이 일어나게 되지. 목회자는 특히 돈의 유혹도 피하고(딤전 6:10)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해(엡 4:2∼3).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여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건 낮아지는 능력,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지.

한국교회가 덕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인해 내부 갈등이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까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는 자들이야. 하지만 이 같은 부족함 속에도 함께 모여 하나님의 거룩성(거룩함)을 닮아가는 게 교회 아니겠는가. 난 빌립보 성도들에게 안팎의 문제, 특히 교회 내부 갈등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겸손과 자기희생으로 하나 될 것을 주문했었네(빌 4장). 당시 헬라 문명에서 겸손은 노예의 윤리였지. 이 같은 밑바닥의 윤리를 받아들이라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네. 현재 교파 분열과 교단의 험악한 정치로 상처받은 한국 기독인들은 꼭 한번 되짚어보길 바라네.

바울 선생님에게 복음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전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 당연한 것이었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말씀의 숲에서 보면 복음 안에 십자가와 부활이 있고 복음과 고난이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지(살전 2:2, 딤후 1:8, 2:9).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하실 정도로 늘 약한 것들과 능욕, 궁핍과 핍박과 곤란한 삶을 사셨으면서도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고 고백하셨으니까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빌 3:10)을 갈망하길 바라네(딤후 1:8, 2:3). 고난은 믿음의 학교라네.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어(롬 8:17∼18). 예수님을 깊이 알수록 그분을 더 닮고 싶어지지.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 위해 신성의 영광을 버리셨어(빌 2:5∼7, 히 2:5∼18).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엄청나게 값진 것이네. 어떠한 차별도 없지(롬 3:27∼28).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유언과도 같은 편지, 디모데후서를 남겼었지. 그 유언의 핵심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거였네. 즉,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으려 할 때만이고난과 영광’, ‘자발적 비움과 짊어짐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






사진 설명 및 출처 | (아래) 지난달 1월 30일 약 300명이 모인 가운데 서빙고 온누리교회에서 <바울로부터> 제작발표 및 시사회가 열렸다. ©CGN
함태경 | CGN 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