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회의 중국 선교 준비 개신교회가 유럽에서 성립되고 유럽 각지로 신앙공동체가 확산되면서 타지역 선교를 위한 지향도 동반되었다. 영국 형제회(The Society of Frierns)를 조직한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도 이미 중국 선교에 대한 열망을 품었으며, 1661년 마침내 존 스탑스(John Stubbs), 리처드 코스트로프(Richard Costroppe), 헨리 펠(Henry Fell) 등 3명의 자원자를 얻어 중국 선교를 위해 파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3명은 중국을 향해 이집트를 경유하던 중 추방당하여 중국에 이르지 못하여 본격적인 중국 선교의 전개는 미루어지게 되었다.1)
18세기 말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 아래 개신교회에서도 중국 선교를 위한 역량이 결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조의 금교정책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미얀마·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마카오 등지에서 중국 선교의 방향을 모색하고 중국어를 익히면서 본격적인 중국 선교의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로버트 모리슨 개신교회 중국 선교의 선구자는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孫, 1782-1834)이다. 그는 1782년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주 모퍼스(Morpeth)에서 스코틀랜드계 기독교 장로 가정에서 태어났고, 20세가 되던 1803년 런던 고스포트 선교학교(Gosport Missionary Academy)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한 뒤 1807년 1월 8일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2)
1807년 9월 7일 중국 광주에 도착한 모리슨은 중국 선교가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던 상황에다가 미리 진출한 가톨릭과 동인도회사의 견제도 있었기에 본격적인 선교보다는 중국어 사전과 중국어 성경 번역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먼저 중국어 습득에 들어갔다. 경제적 이익 추구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보아 선교 활동에 호의적이지 않던 동인도회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던 그는 열심히 중국어를 익힌 뒤 1909년 동인도회사 통역관에 취임함으로써 중국 선교를 위한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모리슨은 1808년부터 성경 중문 번역을 시작하여 〈사도행전〉(1810), 〈누가복음〉(1811), 〈바울서신〉(1812)을 완성한 데 이어 5년 만에 신약성경 번역을 완수하였다. 1813년 7월 런던선교회에서 추가 파송된 윌리엄 밀른 부부가 마카오로 도착한 1814년 이후에는 구약성경의 중문 번역을 시작하여 5년 만에 완성하였고, 1819년에는 최초의 중국어 성경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출판하였다.
중국에서의 선교 문서 간행이 쉽지 않다고 느낀 모리슨은 밀른과 협력하여 1817년 말라카에 인쇄소를 설립하였고, 1818년 이후 이 인쇄소를 통해 각종 선교 문서를 간행 배포하였다. 1814년에는 중국 및 광동어 방언 사전, 1815년에는 중국어 문법서를 출간하였고, 1821년에는 중국어 사전도 편찬하였다. 아울러 중국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잡지 《Indo-Chinese Gleaner(印支搜聞)》, 《The Canton Repository(廣東記錄報)》, 《Chinese Repository(中國叢報)》 등도 출간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25년간 사역하면서 중문 서적 12종을 출판하였고, 영문 서적 21종을 출간하였다.
로버트 모리슨은 중국의 금교정책의 장벽에 부딪혀 중국에서 문서 선교에 주력하였기에 중국 선교 현장에서 세례를 베푼 중국인은 10명에 불과하였다.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던 채아고(蔡亞高)는 1808년 21세에 모리슨에게서 복음을 듣고 1814년 세례를 받았다. 1834년 7월 16일에 그는 주중 영국상무부 부영사로 임명받아 재임하다가 광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오랜 동인도회사 통역관 생활과 말년의 부영사 재임의 경력이 선교사로서의 그의 명성에 논란의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중국 선교를 위한 노력은 개신교회 중국 선교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그의 동역자 밀른은 모리슨을 “중국어 습득의 청동의 몸, 강철의 목소리, 떡갈나무의 머리, 용수철 같은 손, 독수리 같은 눈, 사도의 마음, 천사의 기억, 므두셀라의 장수를 갖춘 사나이”3)라고 평한 바도 있다.
윌리엄 밀른 윌리엄 밀른(William Milne, 米憐, 1782-1822)은 1813년 7월 4일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10개월 뒤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가톨릭 선교사들의 견제와 마카오를 관리하던 포르투갈 당국의 압박으로 광주로 옮겨 간 밀른은 모리슨과 협의를 거쳐 중국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사역지를 1815년 말라카로 옮겼다.4)
말라카에서 그는 중국 화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진행하였고, 기독교 학교도 설립하였는데 1818년에는 기독교 미션대학 영화서원(英華書院, Alnglo-Chinese College)으로 발전시켰다. 그가 1822년 소천하기까지 원장을 맡은 영화학원에서는 중국어와 영어로 기독교와 영어를 가르쳤고, 중국인이 영어로 학습한 최초의 학교였다. 1818년 7명으로 시작한 영화서원은 1831년 학생의 수가 200여 명에 달하였다. 졸업자로는 중국인 양발(梁發)과 하진선(何進善) 등이 있었고, 영국인 존 모리슨(모리슨의 아들)과 헌트(W. C. Hunter) 등이 있었다. 밀른은 모리슨과 협력 속에 성경의 중국어 번역 작업을 진행하였고, 다양한 중국어 선교 문서를 간행하였다. 1815년에는 모리슨과 함께 중국어 월간지 《찰세속매월통기전(察世俗每月統紀傳, Chinese Monthly Magazine)》을 목판 인쇄로 창간하여 서양의 역사, 지리, 종교 문화를 소개하였다. 그의 신앙 관련 저작 중 가장 저명한 것으로 장(張)과 원(遠) 두 친구의 대화 형식으로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설을 담은 《장원양우상론(張遠兩友相論)》이 있다. 이 책은 중국에도 널리 보급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어판도 간행되어 일본에서도 보급되었다.
밀른의 중국 현지에서의 활동 기간은 아주 짧았지만 말라카에서 화교들과 접촉, 영화학원을 통한 화교들에 대한 교육 활동, 중문 번역과 인쇄 출판을 통한 문서 선교에서 공헌한 바가 컸고, 그의 이러한 활동이 중국에서 개신교회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데 중요한 기반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미주 1) 이하 개신교회의 중국 선교에 대해서는 조훈, 《중국기독교사》 (서울: 도서출판 그리심, 1924); 이관숙, 《중국기독교사》 (서울: 쿰란출판사, 1995); 김수진, 《중국개신교회사》 (서울: 홍성사, 1997); 김화평, 《중국교회사》 (서울: 도서출판 모리슨, 2003) 등 참조하여 정리함. 2) 로버트 모리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훈, 《로버트 모리슨: 중국에 온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서울: 신망애출판사, 2003) 참조. 3) 이관숙, 《중국기독교사》 (서울: 쿰란출판사, 1995), p.258. 4) 밀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훈, 《윌리엄 밀른》 (서울: 도서출판 그리심, 2008) 참조.
사진 설명 및 출처 | (아래) 1815년 모리슨과 함께 발간한 중국어 월간지 《찰세속매월통기전(察世俗每月統紀傳, Chinese Monthly Magazine)》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