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대교안(大敎案) 1783년부터 1784년에 걸쳐 마카오 주교는 포교성성(布敎聖省, Sacra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의 위탁을 받아 비밀리에 중국 내지로 선교단을 파송하였다. 첫 팀 10명은 직예(直隸), 산서(山西) 지역으로, 두 번째 팀 5명은 산동(山東) 지역으로, 세 번째 팀 4명은 호광(湖廣)과 천섬(川陝) 지역으로 진입했다.
이들 중 세 번째로 파송된 선교사 프란치스코(尼嗎·方濟各) 일행 4명이 호북(湖北)성 양양(襄陽)현에서 체포되었고, 이들의 내지행을 도운 천주교도 뱃사공 용(龍) 씨 부자와 선박업자 유종선(劉宗善) 등 3명도 함께 체포되었다. 일행이 조사받는 과정에서 갖고 있던 성물들이 강탈되면서 채베드로 신부가 이대(李大)와 이이(李二) 앞으로 보낸 편지가 발각되었다. 편지에는 광주(廣州)에 거주하는 토레(Francesco Giuseppe della Torre) 신부가 선교를 위해 네 명의 신부를 섬서(陝西)로 보내면서 이들의 이동 행로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천주교 선교를 금하는 청조(淸朝)의 금령을 어긴 사건이므로 호광총독(湖廣總督) 특성액(特成額)은 즉시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은 청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우선 광주 상관에 거주하는 서양인 신부가 청조의 금령을 어기고 섬서성으로 선교사를 몰래 보내려 했다는 것, 내지의 천주교도들이 연계되어 이를 도왔다는 것 그리고 광주에서 출발한 이들이 내륙 깊숙한 호북 양양에 이르기까지 발각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다.
보고를 받은 건륭제(乾隆帝)는 8월 20일 상유(上諭)에서 선교사를 파견한 서양인 토레 신부와 이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과정에 관여된 자들을 체포하여 죄를 묻고, 서양 선교사들이 경유한 경로를 확인하여 관련된 각 지방관의 감찰 소홀의 책임도 묻는 한편, 각지의 반역자들과 연계성 등을 비롯하여 각 지방관 중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 엄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황제의 지시에 따라 호남(湖南)성 상담(湘潭)현 지현(知縣)은 이들의 이동을 도운 유진우(劉振宇) 등 4명을 체포하였고, 무릉(武陵)현 지현은 편지 수신자인 이대와 이이를 비롯한 3명을 체포하였으며, 광동성에서 토레 신부를 비롯하여 중국인 신부들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편지를 발송한 사건의 핵심 인물이기도 한 채베드로에 대해서 행방을 추적하는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체포하지 못했다.
건륭대교안의 처리 전국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단속과 관련자 체포가 해를 넘겨 가며 이어졌다. 조사와 단속은 결국 광동, 복건(福建), 호북, 호남, 섬서, 사천(四川), 산동, 산서, 직예, 감숙(甘肅) 등 10여 개의 성(省)으로 확대되어 신도 수백 명이 연루되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각 성에서 천주교 선교와 관련된 금령 위반 혐의로 체포된 자들은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다. 1785년 1월부터 시작된 재판에서 서양 선교사들은 금령 위반 혐의로 종신형을 내렸고, 중국인 가운데 중죄인으로 분류된 7명의 신부와 11명의 신도는 얼굴에 문신하여 서북변방 이리(伊犁) 지방으로 유배 보내어 오이라트(Oirat, 阿魯得) 부족의 노비가 되게 했다. 혐의가 비교적 가벼운 자들은 장형, 도형 등의 처결을 내렸다.
1년여 기간 동안 단속이 진행되면서 외국인 선교사 18명이 체포되어 종신 금고형을 받았고, 이들 중 옥중에서 사망한 선교사가 6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중국인 신부 4명을 비롯하여 중국인 신도 수백 명이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다.
건륭제는 혐의자 처벌과 별도로 유지를 반포하여 북경의 교회 정문을 병사들이 지키게 하고, 외국 선교사와 만나지 못하도록 중국 신도들의 출입을 저지하게 했으며, 성경 등의 성물을 내놓고 신앙을 포기한 일반 신도들의 죄는 묻지 않도록 했다.
1785년 정월 건륭제 즉위 50주년을 맞아 충군(充軍·범죄자로 구성된 군대)이나 유배형 이하의 처분을 받은 모든 죄인의 형을 경감(輕減)하는 은사(恩賜)를 내릴 때, 건륭대교안 관련자들은 그 대상에서 제외하는 강경한 기조를 유지하였다.
1785년 10월 마침내 건륭제는 외국 선교사를 석방하였다. 이는 당시 북경 조정에서 청조를 위해 여전히 천문과 역법 관련 업무를 하면서 봉사하고 있던 서양인 선교사들이 계속 청원한 결과로 보인다. 건륭제는 사면된 선교사들이 원하는 경우 북경에 남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선교는 여전히 허용하지 않았다. 사면된 선교사 중 4명은 북경에 남았고, 나머지는 귀국 의사를 표하였다.
건륭대교안 이후의 비밀 선교 건륭대교안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선교사들 가운데 적어도 5명은 다시 내지로 잠입해 선교를 이어 나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륭대교안 이후 각지에서 소소한 교안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이후 20여 년 동안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안정을 이어 나갔다.
천주교회가 지역에 따라 발전도 있었는데, 특히 사천, 운남(雲南), 귀주(貴州) 지역은 1786년∼1804년 동안 5,511명이 영세를 받았고, 1801년 사천 지역 교인이 4만 명에 달하였다는 통계가 보고되었다. 1793년 영국 마카트니(马戛尔尼) 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던 견사회(遣使會, The Congregation of the Priests of the Mission)의 로오(Nicolas Joseph Raux, 1754-1801, 羅旋閣 또는 羅廣祥) 신부는 당시 북경에 5천 명의 천주교인이 있고 전국에 15만 명이 있다고 사절단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단속을 겪었기에 건륭대교안 이후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는 더욱 은밀히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선교 성과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겪은 어려운 과정들은 사실대로 외부로 전해지기 어려웠기에 남겨진 기록도 희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교 시기로 알려져 있는 이 기간에도 청조의 금령을 피해 가면서 선교활동을 이어간 노력이 있었기에 해금(解禁) 이후 기독교회가 빠른 성장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사진설명 | 1793년 영국 마카트니(马戛尔尼) 사절단의 중국 방문 모습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