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3  통권 235호     필자 : 레이멍(雷蒙)
[오늘의 중국교회]
중국교회, 메타교회(Meta Church)의 도전-누가 메타버스의 하나님인가

페이스북은 최근 사회적 분열을 초래한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추락하는 회사 이미지의 쇄신을 위한 것은 아닌지 사명을 바꾸고 메타버스(Metaverse)에 본격 진출하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메타버스는 무엇인가?
페이스북의 공식적인 홍보만 보면 대개 일상생활에서 각종 디지털과 인터넷 서비스를 활용하고, 가상세계로 통합하고 확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페이스북은 이 ‘가상세계’가 개방적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회사들도 가입을 환영했다. 심지어 이 가상세계의 개념은 몇 년 전 SF소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은 단지 마블(Marvel) 가상세계나 DC(Detective Comics) 가상세계를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가상세계에서 가상 신분으로 가상활동을 한다는 개념은 이미 1990년에 MOO라는 게임에서 등장하였다(글꼴판일 뿐이다). 2003년에 출시된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 플랫폼 역시 사용자들의 두 번째 가상 신분으로 가상세계 활동에 참여하도록 불러모았다. 그리고 오랜 게임기 마니아들은 모두 들어봤을 것이다. 심지어 2005년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3에서 출시한 홈(Home)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상 신분으로 플랫폼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는 게임이다. 플랫폼에서 아이템 무기(武器)를 사고팔 수도 있고, 심지어 당신 홀로 해변에 앉아 멋진 일몰을 볼 수도 있다. 최근 크게 히트한 ‘동물의 숲’ 게임까지, 사실 수십 년 동안 비슷한 개념의 컴퓨터 게임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메타버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할 수 없다. 물론 현재의 초강력 알고리즘에 맞추어 페이스북 자체의 방대한 사용자 그룹의 자원과 재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와 규모는 이전 기술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기술한 연도는 《위키백과》에 근거한 자료).

Meta Church(메타교회)의 상상
세계 각지에서 온 한 무리의 신자들이 장엄하고 거대한 고딕 양식의 교회에 들어갔다. 감동적이고 웅장한 찬송이 그들의 마음을 진작시킨 후 목사님이 모세가 이집트에서 나와 홍해를 건널 때 우리가 직접 홍해로 가서 홍해가 큰 바람에 의해 갈라지는 위대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고 설교하셨다고 상상해 보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를 말했다가, 또 갑자기 골고다로 돌아가서 영준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부르짖는 것을 직접 보고, 마지막에 교회로 돌아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섬김과 헌신을 완성할 수 있다. 이런 예배는 단순히 회중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새로운 친구들을 교회에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VR(가상현실, Virtual Reality) 장비를 착용하고 메타버스를 연결하면 이러한 환상적인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사실 메타버스 시대가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오늘날 VR 기술만으로 이렇게 예배하기에는 이미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산전수전 다 겪은 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메타처치의 탄생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전반적인 환경의 변화(바이러스 위기, 기후변화), 경영 패러다임의 전환은 부지불식 간에 사람들의 삶을 디지털 가상화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더 나아가 인터넷 원생대(原生代)의 이러한 생태에 대한 추구는 가상세계의 발전이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더욱 완벽한 가상교회를 설계하고, 과학기술의 올바른 활용으로 더욱 뛰어난 예배와 공동체 체험을 제공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새로운 가상 친구들을 교회로 들어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가상세계를 구축할 때 현실 세계의 파편화와 잔혹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메타버스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할 때 세상 사람들의 연약함과 가난과 고통도 모두 이 가상세계로 옮길 수 있을까? 아픔은 또 어떤 형태로 이 가상세계에 나타날까? 일찍이 한국 제작진이 가상현실의 도움을 받아 자녀를 잃고 슬픔에 잠긴 엄마와 죽은 일곱 살배기 딸이 가상세계에서 다시 만나도록 돕는 ‘너를 만났다(Meeting You)’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다큐멘터리는 일종의 감정조작이라는 의견도 있고, 사진이나 영상으로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마당에 VR로 고인과 재회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VR을 이용해서 죽은 자와 재회할 수 없을까? 이 가상 딸은 과연 슬퍼하는 엄마의 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슬퍼하는 엄마는 이 딸을 계속해서 ‘키울’ 수 있을까? 우리는 먼저 이런 윤리적 논란을 한번 내려놓고 생각해보자. 만약 메타교회(Meta Church)가 VR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가 이런 ‘가상 위로’를 가족을 잃은 성도들에게 제공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랑, 형제자매 사이의 세심한 배려로 성도들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도록 도와야 하는가? 우리는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현실을 시뮬레이션하고 감각을 속일 수 있지만 진정으로 영혼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과학기술은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희생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우리가 신앙에 더 몰입하여 사명을 펼칠 수 있게 할까?

누가 메타버스의 하나님인가
지난해 페이스북 전(前) 직원이 회사가 거짓 정보를 자사 플랫폼에 흘리는 처리 수법에 대해 미국 언론에 폭로했다. 그후 그는 미국 상원과 영국 의회 청문회에 나와 증언하고, 전 고용주를 고발했다. 홍콩의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페이스북은 공익과 자사의 이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매번 일관되게 자사 이익을 우선시하는 후자를 선택해 회사 영리 신장을 꾀한다”고 평가했다. 페이스북이 결국 어떤 사명을 가지고 배후에서 메타버스를 추진하든 하나의 회사(또는 많은 회사)로서 영리 추구를 떨쳐 버리기 어렵다면 월가(Wall Street)의 주주들은 바로 이 메타버스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메타버스 하나님’의 관리 아래 메타버스 내의 모든 설계는 불가피하게 영리를 꾀하는 것과 결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가운데 모든 참여자들은 데이터화, 추적, 분류, 분석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진실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처럼 반드시 개별적으로 중시되고 사랑을 받게 될 필요는 없다.

세계가 일단 실제 가상세계에 의해 이 메타버스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해일과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날 것이며, 이는 전통교회의 존재의 의미, 개인의 신앙적 실천, 성경적 진리의 해석에 있어서 전례 없는 충격을 줄 수 있다. 교회가 새로운 세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마치 또 다른 과학기술 열차를 따라잡아야 하는 것과 같다. 이는 교회는 당연히 세속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함부로 말할 것도 아니고, 곧 가볍게 멈춰질 변화도 아닐 것이다.







출처(사진 포함) | 〈시대논단〉(2021/11/11)
번역 | 阿桥·자원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