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3  통권 234호     필자 : 변성래
[책 속의 중국]
《근대 중국의 형성》 - 허드슨 테일러의 삶과 유산(초기∼1831년)
_ A. J. 브룸홀 / OMF Rodem Books

 

중국에 기독교 신앙이 처음 들어간 시기는 AD 635년 당 왕조 때이다. 로마 가톨릭은 원나라와 명·청 왕조(16∼19세기) 때에 선교에 힘썼다. 개신교도들은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중국에 왔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처럼 제국 전체 곳곳에 퍼져서 사역하면 박해를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광대한 내륙지역을 떠나 해안 지대에 집중하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1865년,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가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이하 CIM)를 세우면서 완전히 바뀌게 된다. 테일러가 중국에 간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1853년에 중국복음화협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 소속으로 중국에 간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건강악화로 1860년에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예일대의 유명한 미국 교회역사가인 케네스 스콧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구원의 메시지를 중국 전역으로 들고 가겠다는 테일러의 흔들림 없는 비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주로 허드슨 테일러로 알려진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하나였으며 그의 수고의 결과를 볼 때, 어떠한 목적으로든 19세기에 중국을 찾아간 이들 중 단연코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인 몇 사람 중 하나였다.”

 

두말할 나위 없이 테일러의 선교사역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CIM의 시작에서부터 생을 마감한 1905년까지 그에게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자신의 병약한 몸, 신참 선교사들의 수많은 실패, 선교회 운영상의 복잡한 문제들, 끝없는 여행이 주는 부담, 가족과 사별, 복음에 대한 반대, 폭동 그리고 테일러 자신이 끝까지 고수한 원칙들에 대한 비평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이 모든 장애물도 테일러의 비전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의 선교전략은 적극적인 면을 넘어서 공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끊임없이 본국에 새로운 지원자들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1874년에는 9개 미개척 성(省)을 위해 18명을, 1882년에는 더 멀리 개척하기 위해 70명을, 또 1890년 총회 선교대회에서는 1,000명의 일꾼을 요청했다. 테일러가 사망할 당시에 CIM은 805명의 선교사, 467명의 중국 협력자, 7개 병원, 37개 진료소, 101개 아편 중독자 보호소, 교회와 연계된 300개의 통학/기숙학교, 261개 선교본부와 함께 연간 2,500명의 세례 받는 개종자를 가진 수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선교단체가 되어 있었다.

 

저자인 브룸홀(Broomhall)은 이 책에서 CIM이 기독교 복음을 온 중국 구석구석에 선포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고 강조한다. CIM의 이러한 특징이 근대 중국의 종교와 사회적 발전에 강한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이 없다. 한 지역 안에 여러 봉사 센터를 세웠던 다른 많은 선교단체와 달리 테일러는 이전에는 닿지 못한 지역에까지 복음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순회전도를 강조했다. 테일러의 요청으로 계속 들어오던 CIM 선교사들은 각 지역에 있는 센터로 가도록 임명을 받았다. 뒤이어 일어난 어마어마한 중국 내 그리스도인의 성장은(어떤 이들은 오늘날 그 수를 5천 만까지도 보고 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CIM 일꾼들과 그들이 심은 ‘씨앗’의 효과를 증명해준 것이었다.

 

테일러는 고집스럽게 선교사들이 중국인들과 함께하기 쉽도록 중국 전통복장을 입게 했는데 그렇게 하여 선교사들이 중국 문화에 더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중국인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살아야 했다. 정규 교육을 적게 받은 선교사들을 많이 모집한 것이 이러한 현장 상황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의학이나 교육 방면으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인 선교사들 역시(특히 1870년대와 80년대에) 많이 있었다. F. W. 볼러(Baller)나 R. H. 매튜스(Mathews)와 같은 몇몇 이들은 중국 어학과 문학 연구에 중요한 학문적 공헌을 하기도 했다.

 

웨슬리 형제

이 책에는 테일러 외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소개되나 특히 웨슬리 형제를 주목한다. 그 이유는 존 웨슬리(John Wesley)가 테일러에게도 영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1720∼1729년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자신의 죄 된 본성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양심의 아우성을 잠재우는 대신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모여 잡히지 않는 거룩함을 찾으려 했다. 존보다 다섯 살 아래였던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이미 홀리 클럽(Holy Club)이라 불리는 동아리의 일원이었고, 그 멤버들은 그들이 지키는 헌신 때문에 ‘감리교도(Methodist)’, ‘새로운 방법(method)을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불렸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후에 동참했다.

 

웨슬리 형제는 ‘선교사’로서 함께 조지아로 항해했다. 그들은 맨발로 가서 맨바닥에서 자며 생활했지만, 식민지 주민들과 인디언들 전도에 실패하고, 각기 시간을 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도 평안이 없었고 다른 이들을 위한 메시지도 없었다. 웨슬리 형제가 미국으로 갈 때 탄 배에는 루터교회의 경건주의 그룹인 모라비아(또는 모라비안) 교도들 몇이 있었다. 그들은 양지바른 알프스 목초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다. 조지아에서 돌아온 존 웨슬리는 계속해서 그 모라비아 교도들의 쾌활하고 정다운 기질과 유용한 일에 몰두하고 있는 비결을 알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그들을 런던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각자 며칠 만에 찰스와 존은 자신들에게 있던 신앙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선교지에 갈 때마다 ‘자기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보내졌다’고 고백했다. 존 웨슬리는 1739년에 설교를 시작한 후 1791년 3월 2일 소천할 때까지 설교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존이 1742년 요크셔의 웨스트 라이딩(West Riding)에서 설교하면서 감리교는 뿌리를 내렸다. 1776년 존에게는 순회 설교자가 155명이 있었고, 별도로 지역을 섬기는 작은 설교자 부대도 있었다. 이들과 함께 1763년에 가진 총회에서 ‘돕는 자의 열두 가지 규칙(Twelve Rules of a Helper)’을 작성하여 허드슨 테일러의 선배들과 후에는 테일러 자신도 이 규칙에 따라 살았다.

 

그 규칙들을 간단히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근면하라. 절대 실직하거나 적은 시간만 고용되지 말라.

2. 진지하라: 기억하라, ‘주께 거룩함을.’

3. 여성, 특히 젊은 여성들과의 모든 교제에 신중하라.

4. 형제들과 상의 없이 결혼에 대한 그 어떤 수순도 밟지 마라.

5. 누구도 악하다 여기지 말라. 모든 일에 있어 선의로 해석하라.

6. 누구에 대해서도 악한 말을 하지 말라: 관계되는 사람을 만나기를 기다리라.

7. 가슴 속에 있는 불을 쏟아 내어라: 상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고백하라.

8. 모두의 종이 되어라: ‘신사인 체’하지 말라.

9. 육체노동을 부끄러워 말고, 오직 죄를 부끄러워하라.

10. 시간을 잘 지키고 정확하라.

11. 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을 회개하게 하고, 그들을 거룩하게 단련하라.

12. 지도자들의 지시에 순종하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복음의 아들로서’ 그리하라.

 

 

-1865년 허드슨 테일러가 창설한 중국내지선교회는 이 책을 출간한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의 전신이다. 중국공산화 이후 사역지는 중국 내지에서 동아시아로 옮기게 되었고, 단체 이름도 OMF로 바뀌었다. OMF는 초교파 국제 선교단체로 불교, 이슬람, 애니미즘, 샤머니즘 등이 강력한 동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사역하고 있다.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