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3  통권 222호     필자 : 김한중
[선교사의 삶과 사역]
고신 선교 1호 선교사 김영진(3)
-김영진의 파송과 선교사역-

4기(1976-82년), 5기(1983-1990년) 선교사역

기독교개혁종장로회신학원
‘장로교개혁종선교공의회(The Presbyterian Reformed Council)’가 1966년 설립 운영하던 ‘칼빈연합신학교’가 68년 제1회 졸업생(4명)을 배출한 뒤 학생모집의 어려움과 미국선교사들의 철수 등으로 휴교가 장기화하였다. 1975년 9월 8일 제2노회는 노회 직영 신학교를 설립해서 새로운 일꾼들을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사장에 앤드류 목사, 교무처장에 김영진 목사를 임명하여 교수진을 준비하고, 1976년 2월에 타이베이(臺北) 쑹산(松山)교회당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1979년에는 학생이 16명이나 되었고, 한국의 합동, 합신, 개혁교단 소속선교사들(6인)도 합세하였다. 특히 대만의 현지목사들이 강의를 맡아 참여함으로 다시 신학 교육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고신 대만선교부는 현지교역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귀한 현지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칼빈신학교를 졸업한 쥐중친(䕮中琴)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개혁종신학원의 교수로 봉사하였다. 짜이이쉰(載疑勳)은 초기 김영진에게 하카어(객가어)를 가르치며 조사의 역할을 해주었는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현지인목사가 되어 섬기고 있다. 린위잉(林宇英)은 개혁신학연구반을 수료하고 미국 칼빈신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 신주(新竹)교회 제2대 교역자가 되었다. 그는 개혁종신학원에서 교수사역을 열심히 감당하고 8년 뒤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신주교회의 제3대 교역자가 된 천정홍(陳正弘)은 중싱대학교(中興大學)를 졸업하고 노회 직영 개혁종신학원을 졸업한 뒤 1981년 노회의 결정으로 한국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유학하였다. 그는 석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1985년 목사 장립을 받고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35년째 성실히 섬기고 있다. 

대만개혁종장로회의 헌법 초안
현지교회 토착화의 기초는 교회의 행정을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교회헌법을 잘 만드는 일이다. 1976년부터 ‘헌법기초위원회’를 만들고 힘을 쏟았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 작업은 굉장히 고된 일이었다. 총노회 조직이 끝나고 복잡한 일이 정비되어 여러 차례 논의와 협력을 거듭하였으나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결론을 보류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지도하는 역할로서 핵심적인 초안을 만들고 현지지도자들에게 이 일의 완성을 위임하기로 하였다.1) 이후 현지지도자들은 더 신중하게 연구하고 토의하면서 ‘성경에 부합하고 현지에 상황화한’ 좋은 헌법을 만들어 사용하며 계속 수정 보완해 가고 있다. 

이병길 선교사 파송과 타이베이용신(臺北永信)교회 설립
1984년 9월 고신 총회(제34회, 삼일교회당)는 선교부가 청원한 선교사 증파 건의를 심의하여 경기노회 소속 이병길 목사를 대만의 세 번째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1985년 4월 24일 파송되어 대만에 도착한 이병길은 타이베이에서 언어훈련을 시작하였고, 1986년 11월 23일 대만선교부의 주선으로 용신(永信)교회를 개척해서 설립하였다. 4년 뒤인 1990년 8월에 건물을 매입(臺北縣 中和市 自立路)하여 교회당을 이전하였다. 이후 이병길은 1996년부터 총회선교 본부 총무로 6년간 일하고, 2002년 사임하였다.

선교사역의 이양과 선교부 총무로 섬김
1986년 11월 고신 총회선교부는 김영진을 선교부 총무로 임명하였다.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86년 11월 17일부로 김영진 목사(대만선교사)를 선교국 총무로 선임하였기에 통보합니다. (1) 대만 선교사와 선교국 총무를 겸임한다. (2) 연중 절반씩 한국과 대만에서 봉사한다. <1986. 11. 17. 총회선교부 부장 박창환 서기 정순행>” 그러나 두 가지 직분을 겸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택과 비자 문제, 과도한 직무와 건강 문제, 선교지에 있었던 30여 년 동안 변화한 한국교회와 사회에 적응하기 등등. 그러나 총회선교부를 조속히 건실하게 꾸려가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되어 1987년 2월 9일 귀국하여 1990년 9월 21일 정년은퇴까지 4년간 선교지와 본국을 오가며 섬겼다. 선교사역의 현지 이양은 은퇴를 앞둔 시점이어서 자연스럽게 현지교회와 동역하던 선교사들에게 이양하게 되었다.

총회선교부 선교국 총무 사역의 중점사항을 몇 가지 요약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회계제도를 쇄신한 일이다. 선교부의 업무 중 재정의 투명성과 공신력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전국교회가 헌금한 선교비의 효율적인 관리뿐 아니라 선교지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이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내부에 여러 규정을 만들어 회계관리를 체계화하고 전산화하여 재정운영에 있어서 착오가 발생하지 않게 힘썼다. 오래전 본인이 은행에서 근무한 경험과 지식이 유용하게 사용되어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드렸다. 

둘째는 교단 산하 모든 교회가 선교에 참여하도록 ‘협력후원제도’를 만든 것이다. 개 교회가 선교사를 단독으로 파송하는 장점도 있지만 선교는 장기간의 사역이기에 선교에 협력하는 교회가 여럿이 힘을 합하여 공동의 책임을 갖도록 하면 선교사역의 안정성과 연속성이 확보되어 건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후원교회와 파송받는 선교사, 총회선교부가 ‘거룩한 삼각 관계’를 가지고 선교하면 효과적이고 안정적인 선교가 활성화하고, 더 많은 교회들이 총회선교부를 통하여 선교에 참여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셋째는 선교훈련에 힘쓴 일이다. “선교의 성패는 선교사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건강한 선교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했다. 아직은 한국교회가 선교훈련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를 실천하는 교단이나 단체가 많지 않았다. 1988년 사직동교회 교육관을 빌려서 집중계절학기 형태로 제1기 ‘고신선교훈련원’을 개원하였다. 

 

이후 미국장로교(PCA)의 도움을 받아 1년 2차례씩 합숙훈련을 8기까지 진행하고 9기부터는 자체적인 힘으로 선교사훈련과 선교사 선발을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소수인원을 선발하여 경험 많은 싱가포르와 영국의 선교훈련 기관에서 전문훈련을 받게 배려하였다. 1983년부터 총회선교부가 주관하고 고려신학대학원 선교학회가 주최하여 ‘선교지도자 훈련세미나’가 수년간 해마다 진행되었다. 안식년 중인 김영진도 이 일에 헌신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지식과 실제훈련을 받게 된 일은 고신선교를 견고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일에 귀한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도표: 김북경 선교사가 정리한 ‘KPM 대만선교 55년’(2012년)2)


은퇴 이후의 삶과 소천(2001. 1. 19)
김영진 선교사는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최후까지 살며 봉사해야 한다”라고 늘 생각하였다. 그의 청원은 총회선교부에서 받아들여졌고, 감사하게도 대만의 교회들이 주택을 준비하고 함께 있어 주기를 간청하였다. 은퇴 뒤 3년간 아직 어린 교회들을 돌보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던 중 몸에 이상이 생겨났다. 급히 귀국하여 복음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신장암 4기였다. 투병은 장기화하였고 대만으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3) 기적같이 잠시 병세가 호전되어 마지막 고별예배를 드리고 짐을 정리하러 대만으로 갔었다. 


 

1994년 3월 6일 주일 오후에 대만의 신주지구에 있는 6개 교회 중심으로 ‘고별환송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6개 교회 대표가 차례로 고별사를 하고 특별헌금 봉투를 강단에 올려놓았다.4) 김영진 선교사는 고별사를 하며 눈물로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를 영적 후배들에게 부탁하였다. 또다시 기적이 일어나 병세가 호전되어 그해 말 호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호주 시드니에 정착하여 손녀(김혜정)와 손자(김상원)를 돌보면서 개척교회인 시드니한인교회에 출석하였다. 미국 벧엘교회의 초청으로 선교특별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사위와 딸이 안심하고 대륙에서 선교사역을 잘할 수 있게 자신의 건강을 지켜 주셔서 손녀, 손자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 졸업할 때까지 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해 주셨다. 2001년 1월 19일 아침 김영진 선교사는 기력이 다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손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5)시한부 생명으로 병원에서 퇴원하였지만 그후 6년 동안 이 땅에서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그의 묘지는 신주교회와 주동교회가 마련한 대만의 ‘야곱산 공원묘지’ 한가운데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묘비명은 “충복양목(忠僕良牧)”-충성된 종, 어질고 착한 목자-이다. 평생 동역자로서 삶을 살았던 사모 임옥희도 2008년 그의 곁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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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선교사의 유언은
“가장 소중한 주님을 목표로 하고 살아라”이다.6)
일생의 좌우명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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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를 모르는 선교사’라고 자신을 칭하며 대만에서의 36년(1958-1994년) 동안 ‘충성된 하나님의 종으로 양 떼의 선한 목자’로 귀한 삶을 살았던 김영진 선교사는 평소 자신을 드러내기를 몹시 꺼려하였으며, 성품이 어질고 겸손하신 분이셨다. 그리고 남의 허물과 약점을 가지고 공격하거나 싸우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의 올곧은 성격이 나름 고집스러움으로 나타나기도 했겠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를 잘하신 분이기도 하셨다. 그는 손톱깎이 하나를 가지고 근 20년간 사용할 만큼 자신의 삶에는 절제와 근검절약으로 일관했지만,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는 통이 큰 헌금도 서슴지 않았다. 매일 아침 늦게까지 서재에서 성경연구와 기도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생활하였으며, 매일 일기를 쓰는 것도 습관화이 규칙적인 삶이었다. 

그의 아침식사 규칙은 아주 특별하였다. 토스트 하나를 네 조각으로 잘라서, 한 조각에는 버터를, 또 한 조각에는 땅콩버터를, 그리고 또 다른 한 조각에는 과일잼을 바르고, 나머지 한 조각에는 계란을 올려서 먹는 식습관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특히 땅콩버터는 신주의 유명한 ‘海福源 花生醬’ 한 가지만을 고집하였다. 또 대만인들 모두가 즐겨 먹는 채소인 ‘콩신차이(空心菜)’는 먹지 않았는데, 이유가 속이 비어 있어 남을 속이는 채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속이는 것이라고 싫어하였다. 취미활동으로는 우표수집을 하였는데 세계 각국의 크리스마스 우표를 많이 수집하였다. 그것은 그의 일기장과 함께 ‘고신선교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운동이나 여행보다는 화초 가꾸기를 좋아하였다. 

외동딸 난나는 국립 대만대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며 중국어를 전공한 언어학자가 되었으며, 현재 남편과 함께 30년째 중국교회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 딸은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한다. “돌아가시기 전 1세대 선교사인 나의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나는 너 때문에 많은 위로를 받는다. 너를 중국선교사로 준비시켰던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시다. 나는 아무것도 못했지만 딸 하나 키워서 하나님께 바쳐 쓰임을 받고 있으니 너무 좋구나.’ 아버지는 내게 아버지 이전에 위대한 선배 선교사님이며, 나의 롤 모델입니다. 오늘의 내가 성공한 삶을 살았다면 전적으로 아버지의 공로입니다. 그분은 정말 잘사셨습니다. 나에게 선교를 가르쳐 주셨고, 몸소 선교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7) 김영진 선교사는 세 살배기 대만 손자 팡웨이쉰(方偉勳)을 입양했다. 호주에서 유학하여 성경학교를 마치고 대만산지교회를 맡아 5년간 목회하다가 ‘대만개혁종신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신주교회에서 강도사로 청년부를 맡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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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라는 질문을 하였을 때,
“한 가지만 말하라면 그것은 현지인 동역자를 잘 만나는 것”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제일 아쉬운 것 한 가지는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자
“좋은 인재들을 더 많이 기르지 못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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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NP는 58달러이었고, 검정 고무신이 유행할 때였는데 그때 대만은 소학교 학생들이 가죽 신발을 신고 다녔다. 3년 동안 선교비가 한 푼도 송금되지 않았어도 한 번도 현지인이나 동료선교사들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다. 부르시고 보내신 분이 공급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었고, 공급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고 돌보셨다. 오직 믿음으로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믿음선교의 산증인이 된 것이다. 

Soli Deo Gloria! 归荣耀与神!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미주  
1) 오윤표, 위의 책, p.138.
2) 《4차 고신선교포럼 자료집》(2019), 김한중, “선교사역의 이양과 철수”, p.384.
3) 당시 복음병원장 박영훈 장로는 가족들을 불러 3-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 같으니 준비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1974년도에 수술을 했을 때, 암이었는데 본인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30년 이상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다. 하나로 버텨온 신장이 이제 1/4도 안 남았다고 일러주었다. 박영훈 원장은 외과의사로서 김영진의 수술을 4차례 집도해 그의 건강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4) 이는 대만의 교회들이 영적 아비인 김 선교사가 이국에서 저희들을 위한 거룩한 희생으로 몸이 망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이제 대만을 정리하고 손자, 손녀가 있는 호주로 가서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호주에 작은 주택이라도 마련해서 좋아하는 정원 가꾸기를 하며 여생을 잘 보내도록 하시라는 전별금이었다. 이에 참여한 교회는 신주, 주동, 민쭈루, 화원, 중리, 타오위안교회였다.
5) 손자 김상원(Hudson S W, Kim)은 동갑내기 목사의 딸 주혜림과 결혼하고, 자신이 출생했던 부산신흥교회의 파송을 받아, 3대째 선교사가 되었다. 지금은 YWAM 싱가포르지부 대표로 사역하면서 수마트라섬의 7개 미전도종족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6) 그의 유언은 자서전 《선교지 대만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페이지에 마지막 말로 기록되어 있다.
7) 김란나, ‘KPM여성사역자수련회’ 강의원고 《다른 세대 같은 사명》2010, 홍콩.







김한중 선교사 | KPM 전 본부장, JMTI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