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3  통권 221호     필자 : 이광열
[특집] - 2021, 다시 품는 선교중국 소망의 메시지
이 몸의 소망 무언가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living hope)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2019년 겨울 중국 우한(武漢)시에서 처음 보고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지구촌’이라는 말이 생긴 이후로 그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첫 지구적 대유행으로 회자되며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 피해 역시 전지구적 규모이기에 현재 추세로 가면 2020년도 180만 명의 사망자를 넘어서, 백신 접종이 효과를 내고 치료제가 개발되어 감소한다 해도, 올 한 해 전체 사망자 수는 2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난해 지구촌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주요 이슈도 블랙홀처럼 코로나19라는 단일 사건에 빨려들어가 경제·문화·사회·교육 및 교계와 선교상황까지도 넓고 어두운 부정적 그늘을 드리우며, 변화와 창의적 대응의 빛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코로나19의 상황과 피해 속에서 이것이 흑암을 뚫을 빛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2천년 전 주후 64-66년경에 베드로 사도는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있는 성도들을 향해 흩어진 나그네라 부르며 한 통의 편지를 씁니다. 그렇게 각지에 퍼져 있던 성도들 중에는 로마에서 순교를 면해 가까스로 살아서 나온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 편지를 받고 있던 로마 성도들에게 있어 주후 64년은 잊지 못할 해입니다. 바로 그해 로마에서는 시 전체의 상당한 가옥들을 불태워버린 대화재가 발생하여, 인적·물적 피해를 본 로마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가 극에 달한 한 해였기 때문입니다.   

열흘 이상 타들어가던 불길이 잡혀 화재는 진화되었지만 재산과 가족을 잃은 로마 시민들의 분노와 슬픔은 정부와 황제를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고, 이에 놀란 네로황제는 화급히 그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의 방화로 거짓 선전하며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당시 3천여 명으로 추산되던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추적과 체포의 대상이 되었고, 잡힌 성도들은 들개의 먹이나 초로 만든 옷을 입혀 검투장을 밝히는 횃불로 태워지는 형벌을 당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각지로 흩여진 성도들을 향해 베드로 사도는 어떻게 위로를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소망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나그네와 같이 불안정한 환경과 불편한 생활모습이지만,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그들이 소유한 불변의 산소망을 일깨워 줌으로 그들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더욱 견고히 세워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삶의 기반을 대화재로 빼앗긴 로마 사람들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냄과 동시에 흩어진 낯선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할 힘겨움을 앞둔 흩어진 성도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진실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시며”(3절)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와 같이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 산소망을 외치고 있습니다. 생활이 흩어지고, 예배가 흩어졌으며, 삶의 일상과 일터가 흩어진 상황에서, 심지어 박해로 인해 육신의 몸마저 찢기어 흩어진 성도들을 향해 산소망을 외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생활도 흩어졌습니다. 한국교회의 위상도 흩어졌고,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사역과 자리도 흩어졌습니다. 가계부의 재정과 한 해의 매출도 흩어진 가정과 일터도 있을 것이며, 믿음과 예배가 흩어진 자리도 있겠지만 여전히 흩어지지 않고 흩어질 수 없는 산소망은 건재합니다. 

소망이면 소망이지 산소망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헬라어 원어나 영어성경을 보아도 소망 앞에 ‘산’이라는 뜻은 살아 있는(Living)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럼 무엇이 살아 있는 소망이라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남이 산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산소망이라는 말은 죽은 소망, 또는 죽을 소망도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성도가 가진 소망은 죽을 수 없고, 사라질 수 없는 그 무엇도 이 소망의 빛을 가리울 수 없는 것을 소유했는데 그것이 주님의 부활에 동참한 성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우리를 부활하게 하심은 우리의 몸에만 해당하는 진리가 아니라 그 몸이 살아왔던 말씀의 헌신과 진리의 가치도 결국 부활하게 됨으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이 결코 무익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도 그냥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해 주는 유업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산소망을 말한 베드로 사도는 이어지는 4절의 말씀에서 바로 하늘의 유업을 꺼내놓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로마대화재와 코로나19의 대습격은 결국 썩고, 더럽고, 쇠할 것들인 땅의 유업을 거두어 갈 수는 있어도,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벧전 1:7) 얻게 할 하늘의 유업에 대해서는 털끝 하나, 한 평의 공간도 범할 수 없는 이 땅에 속한 일시적인 위기에 불과합니다. 땅의 위기는 하늘의 유업을 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썩고, 때로는 더럽고, 쇠하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유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잃을 것을 잃게 됨으로 영원토록 잃지 않을 것을 더욱 사모함으로 누릴 수 있게 됨은 또 다른 위기의 역설로 다가옵니다.  

흑인의 인권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증언인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길지만, 그 방향은 정의 쪽으로 굽어 있다”는 말도, 역사와 우주를 관통하는 윤리적 포물선은 아득할 정도로 너무 길어 그 끝이 보이지 않지만 그 방향은 결국 정의의 방향으로 굽어 있기에, 이 땅의 불의함에 맞서 끝까지 견디며 싸울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소망적 포물선 역시 길지만, 그 방향은 그리스도 쪽으로 굽어 있다.”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주를 포함한 만물을 관통하는 소망의 포물선 역시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고 멀게 느껴지지만, 그 방향은 결국 그리스도 쪽으로 모아지기에 그리스도를 닮아감과 증거함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 그 위에 내가 서리라(*2) 

2020년 한 해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은 ‘이 몸의 소망 무언가’였습니다. 이 찬송시를 작사한 침례교 목사 에드워드 모트(Edward Mote)는 한때 가구업으로 번성했던 시절의 물질과 명예를 뒤로하고, 우연히 오른 뒷산의 바위가 자기 발아래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게 안전한 자리를 보장한 것처럼 내 인생의 보장은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묵상하며 시를 남깁니다. 

코로나19가 우리의 생활과 사역을 흩어 놓았을지라도, 우리의 산소망마저 거두어 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능히 살아 있는 산소망되신 부활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때를 바라보고 인내하면 결국 땅의 위협과 땅의 유업은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더욱 사모하게 하는 디딤돌로만 끝나게 됨을 볼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거두어 갈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땅의 유산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주님은 하늘의 유업을 우리에게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그것을 먼저 경험한 사도 바울도, 로마서의 편지를 마치면서 이렇게 축복합니다. 저도 글을 마치며 같은 마음으로 축복하고 싶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이광열 | 동인교회 담임, 전 중국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