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  통권 220호     필자 : 김한중
[선교사의 삶과 사역]
고신 선교 1호 선교사 김영진
-김영진의 파송과 선교사역-
김영진의 사역자로서의 준비

출생과 성장 그리고 사역자로의 헌신
김영진은 1920년 2월 16일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김근실 장로, 모친 이효애 권사(제1영도교회)의 5남 1녀 중 장남이었다.1) 일제하에서 부산 제2공립학교(현 부산상고)를 졸업하였고, 중소기업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하였다. 1941년 동년배인 임옥희와 결혼하였다.2) 젊은 나이에 집사로 임명받고 회계집사로서 교회의 재정을 맡아 교역자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지켜보았고, 주일학교 부장을 맡아 봉사하면서, 신약성경주석(히다까 목사, 일문세계사 출판)을 구해 읽으며 성경공부에도 열중하였다. 1946년 1월 1일부터 11일까지 영도 태종대에서 ‘전국교역자 수양회’가 열려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한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부식을 나르는 일을 돕다가 철야기도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장래 자신과 민족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1946년 6월 23일부터 8월 23일까지 진해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개최된 ‘제1회 하기신학강좌’에 어머니의 권유로 참석하게 되고, 이 시절 한명동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일생에 붙들게 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사나 죽어나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리고 빌립보서 1:20-21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자로 헌신을 결심하게 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하노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선교사로서 부르심을 받게 됨
1949년 9월 새롭게 시작된 고려신학교에 1회 입학생이 되어 남영환,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최익우 등과 함께 신학수업을 하게 되었고 1955년 정규 신학 과정의 첫 졸업생(총 25명)이 되었다. 이 시기 신학도로서 울산 방어진교회에서 처음으로 교역자로 봉사하고 집집마다 전도하여 교회가 성장하는 경험을 하였고, 6·25전쟁 때 교회를 군사용 목적으로 사용하겠다는 군대에 결사 저항하다가 권총으로 맞아 앞니가 부러지기도 하였다. 1951년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제2영도교회의 초빙으로 1957년까지 5년 10개월 동안 개척된 신생교회를 섬겼다. 예배당도 증축하고 피난민들을 돌보며 어려운 이웃들을 전도하고 섬기는 훈련도 하였다. 이즈음 부흥사경회 강사로 온 이인제 목사(당시 총회선교 부장)로부터 대만선교사로 가도록 권면을 받았다. 그러나 세 가지 이유로 거절을 하였다. 

첫째는, 가정형편이었다. 세 동생이 학교공부를 하고 있었고, 장남으로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큰 부담이 있었다. 둘째는, 아직 어린 제2영도교회 교인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제일문창교회의 청빙을 노회가 허락하자 교인들이 강하게 반발하여 전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결국 청빙을 취하하였던 것이었다. 셋째는, 개인의 자격이 미달인 자신의 부족함이었다. 그러나 고심하며 기도하던 중에 이 세 가지가 순조롭게 모두 해결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어 마음을 확정하게 되었다.3)

첫 선교사 김영진의 파송과 출국
교단 제7회 총회 회기 중, 1957년 9월 20일 부산남교회당에서 최초의 ‘선교사 파송예배’가 거행되었다. 총회장 한상동 목사의 사회, 박손혁 목사의 기도, 남영환 목사의 설교는 사도행전 11:19-26, 13:1-5을 본문으로 ‘보내시는 성령님’이라는 제목이었다. 이어 한상동 목사의 권면과 김영진 선교사의 답사, 황철도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출국을 위한 준비는 순조롭지 않았다. 그 당시는 해외여행이 거의 없던 시기라 여권발급과 비자업무, 건강검진 절차 등등 모든 것을 문의하고 배워가며 본인이 직접 발로 뛰며, 또 한참을 기다린 뒤 다음 절차가 진행되어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서울에서 출국 수속을 하는 한편 중국어학원을 다니며 언어학습을 시작하였고, 서울 서문교회에서 설교목사로 봉사하며 긴 준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드디어 이듬해 1958년 5월 13일 부인 임옥희 여사와 딸 난나 세 명의 가족은 부산항 제3부두에서 미국 에베레트 기선회사 소속의 1만 톤 급 상선 존 워터맨호(John B. Waterman)를 타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많은 성도들의 환송을 받으며 미지의 땅 대만으로 향했다. 전국의 교회는 김영진 선교사 가족을 위해 그가 부탁한 기도 제목으로 새벽마다, 주일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김영진의 1기 선교사역과 삶(1958 - 63년)

대만 정착
김영진 선교사 가족은 3일 후, 5월 16일 지롱(基隆)항에 도착하여 존 스톤과 앤드류 선교사, 몇몇 대만 현지인들의 영접을 받고 수일간 타이베이(臺北) 역 앞의 허름한 임시 숙소에서 지냈다. 며칠 후 타이베이에 거주하던 앤드류 선교사의 안내로 신주(新竹)시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아무 설비도 없는 시멘트 바닥에 보자기를 풀고 첫 밤을 보내야 했다. 수도꼭지 외에 아무 취사도구도 없어 여러 날 밖에서 파는 국수로 끼니를 때웠다. 약 한 달 뒤 도시의 서쪽 끝 농촌지역에 첫 셋집을 구해 이사할 수 있었다. 이곳저곳 문의하며 필요한 세간을 장만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4)

일본어 사용과 언어연수 
언어의 불통은 제일 큰 고통이었다. 도착한 다음 날 타이베이 한 교회에서 선교사 환영회가 열려 대만인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첫 인사는 일본어로 하게 되었다. 다음 날 주일에는 일본어로 두 곳 전도소에서 설교를 하였다. 10년 이상 전혀 사용하지 않던 일본어로 설교하는 자신이 너무 신기하고 놀라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신주지역에는 대만인, 대륙인, 객가인(客家人), 산지인 네 종족이 어울려 살고 있었는데 언어가 서로 달라서 소통을 잘 할 수가 없었다.5) 그러나 다행히 일본어로는 교회에서도 통역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 소년 시절부터 일본어로 공부하며 해방 전까지 일본어를 사용했던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사용될 줄이야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였다. 며칠 뒤 신주에 와서 존 스톤 목사가 지도하는 동문교회에서 기도회와 선교사 환영회가 있었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어 얼마나 답답했던지 자신도 모르게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주여, 나는 이 같은 암흑 속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십수 년 사용하지 않던 일본어라도 설교하고 봉사해야 내 영혼이 살겠습니다.”6)

중소도시 신주에서 언어훈련을 위한 전문 기관은 아예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소학교 국어교사를 알게 되어 저녁에 집으로 초대하여 온 가족이 중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신주에 정착하고 수개월 만에 남문교회가 개척되었는데, 교회 청년 중 두 사람이 자원하여 김영진 주위에 머물며 틈틈이 중국어 연수를 도와주었다. 김영진은 선교지에 도착한 지 1년 9개월 만에 중국어로 첫 설교를 하였다.7) 한국선교사의 대만 정착과 교회개척 등이 알려지면서 전국 각지 각 단체들의 초청 설교와 집회 요청이 쇄도하였다. 1년간 전국의 40여 교회의 초청을 받아 예배 설교, 부흥사경회, 전도강연, 여전도연합회, 청년연합회, 교도소 전도집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등 초교파적으로 순회 설교와 강연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김영진은 그러한 활동을 1959년 본국 교회에 보고하면서 기도를 요청하였다.8) 이러한 기회로 전국을 살피며 대만교회들과 교제를 통해 선교지를 속히 알게 되는 축복을 누렸다.

교회개척 사역: 신주 남문교회, 솽시(雙溪)전도소
동문교회에 출석하던 좡성마오(壯聲茂)의 제안으로 존 스톤 목사와 협의하에 교회가 없는 남문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1958년 6월 22일 개인 집의 축사를 개조해 예배를 드리다가 8월 10일에 정식으로 ‘基督敎 南門敎會’ 간판을 걸고 20여 명이 회집하는 첫 교회가 시작되었다. 1959년 7월 26일, 영접 후 1년간 신앙교육을 한 팡수전(方淑眞)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대만선교의 1호 세례자가 생긴 것이다. 이후 1963년 첫 안식년 시작까지 입교 3명, 세례 2명을 비롯 10가정 30여 명이 모이게 되고, 주일 오후 시작한 주일학교도 5개 반으로 조직하여 성경공부를 하고 부장도 임명하였으며, 학생회도 조직하여 교회는 점차 성장하였다.

1961년 10월에는 신주에서 2km 거리의 농촌 솽시(雙溪)지역에 청년들과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결신자가 생겨나 가정집회를 시작하고, 몇 주 지나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솽시전도소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만장로교 성경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받다가 쩌우파롱(鄒發隆) 형제를 사역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한국 고신선교부는 그의 생활비를 계속 지원할 수가 없는 형편이어서9) 그는 ‘개혁신학연구반’을 졸업한 후 목사로 안수받고 1964년 주동(竹東)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다. 수년간 5명의 세례자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1964년 첫 안식년을 떠나면서 잠정적으로 교회를 폐쇄하였다. 중국 농촌은 취락구조가 한국과 달라서 집이 띄엄띄엄 흩어져 살고 있고, 객가인들의 부족제도가 견고하여 복음전도가 매우 어려운 것도 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혼자서 많은 일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이후 김영진은 교통과 상업, 교육의 중심지인 도시를 전략적으로 먼저 선교해야 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10)

시각 장애인들의 예배 시작과 객가어 지역방송선교
한국선교사 김영진의 능력 있는 설교와 선교활동의 소문이 퍼지자 대만 각계에서 초청이 쇄도하였다. 대만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목마름을 알 수 있었다. 1959년 10월 어느 날 시각장애인 몇 분이 찾아와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김영진은 그해 성탄절에 자신의 집에 그들을 초청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예배를 시작하였다. 1960년 새해 첫 주일부터 예배 후 점자교실을 시작하고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부인 임옥희는 오르간을 연주하며 찬송을 가르쳤다. 집회 후에는 풍성한 식사를 준비하여 함께 나누었다. 9월에 점자교실 수료식이 있었다. 그 후 그들은 안마시술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에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가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연락해 왔다.

방송선교는 주로 대륙에서 사역하던 서양선교사들이 대륙으로 복음방송을 송출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중 신주에 기지를 둔 ‘세계복음전도단(WWEC)’ 소속 윌리엄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국 철수하면서 그의 사역을 김영진에게 인계하였다. 1961년 11월 7일 처음으로 ‘복음의 소리(福音之聲)’ 첫 방송을 송출하였다. 전도 설교는 일본어와 그 지역민 객가인을 위해 객가어로 진행되었다. 선교관에 녹음 시설을 갖춘 스튜디오를 설치하고 매일 한 시간 분량을 방송국에 전달하여 복음방송을 송출하였다.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고 또 재정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협력하는 두 객가인 동료들과 3년여 동안 전력을 다하였다. 안식년이 되고 재정난으로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 다른 선교 기관에 이양하게 되어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동안의 방송으로 지역에 많은 동역자들이 생겨나고 언어 향상에도 적잖은 도움을 얻게 되어 후일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훗날 김영진은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11)

방송선교의 중요성과 어려움이 그렇게 큰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교사를 파송한 국가의 국력이 선교사역에 큰 영향을 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선교사 자신의 역량뿐 아니라 무엇보다 본국 선교부의 지원과 역할이 크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육 시작: 기독교 개혁종신학연구반(基督敎改革神學硏究班)


1962년 솽시전도소를 개척하면서 객가인 쩌우파롱 형제와 함께 동역하면서 이 형제가 신학공부를 하여 앞으로 교역자가 되면좋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미국 정통장로교(OPC) 선교사들과 의논하고 1962년 9월 9일에 운영을 위한 합의서를 작성하였다. 네 사람이 각각 과목을 나누어 맡아 한 주에 하루를 내어 3년 과정의 신학연구반을 시작하기로 하고, 신주 시내에 2층 방을 임대하여 학생 3명으로 10월 8일 개학을 하였다. 이후 1963년 4명, 1964년 3명의 입학생이 더해졌다. 이후 1966년 1회 졸업생 2명(趨發隆, 李疑), 1967년 2회 졸업생 2명(任福來, 葉信一)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목사안수를 받은 뒤 대만교회의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12)

선교관 건립
파송 당시 김영진에게는 삶의 기본인 주택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곳이기에 두터운 옷은 필요가 없다는 정도만 알고 가능한 짐을 최소화하였다. 한국을 떠날 때 주택마련을 위한 약간의 돈을 준비하였지만 그것은 1년치 월세를 감당하기도 부족한 금액이었다. 도착한 뒤 6개월 동안 거주지를 세 번이나 옮겨 다니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제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으며 인내해야 했다. 대만에서 전셋집은 찾을 수 없고 몇 번 집을 속히 비워 주어야 하는 사정을 본국 선교부에 알렸다. 1958년 제8회 총회에서는 선교지 주택 확보를 위해 전국교회가 한 주일 헌금하기로 결정하고 1959년 1월 셋째 주에 이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주택비는 마련되지 못하였다. 12월 29일 미국의 익명의 성도가 1,000달러를 헌금해 주었고, 그 후 1960년 7월 UN사무국에 근무하는 Mr. During 씨로부터 2,000달러의 헌금을 받았다. 드디어 한국으로부터도 2,000달러가 송금되어 왔다. 1960년 8월 26일 이 돈으로 신주시 변두리 공동묘지 근교에 720m2의 대지를 마련하여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고, 1961년 7월 21일 26평의 집이 완성되어 준공 입주하게 되었다. 당시 시멘트가 귀해 한국대사관을 통해 시멘트구입 인허서를 받아 200톤을 배급을 받는 일도 있었다. 가난한 한국선교사가 언제까지 선교를 할까 하고 지켜보던 대만인들이 대만에 도착한 지 3년 만에 선교관이 완성되자 입주감사예배 당시 86명의 교인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다. 경과 보고를 하며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간증하며 감격하였다.13)

    
미주   
1) 김영진은 3대째 신앙가문이다. 조부 김경서(金敬瑞)가 1890년 기장에서 영도로 이주해 왔다. 당시 영선정교회(1896년 11월 22일 현 제일영도교회)의 초대교인으로 후에 장로로 봉사했고, 부친 김근실(金根實)은 1936년부터 장로로 봉사하였다. 집이 교회당 바로 앞에 있어서 김영진은 교회당 마당이 놀이터였고, 지극정성으로 크고 작은 교회 일과 교역자를 섬기는 부모의 헌신과 충성의 모습을 보며 성장하였다. 당시 목회자는 박손혁 목사(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이었다.
2) 임옥희(林玉熙)는 1920년 충주에서 출생하여 1932년 보이열(Boyer E. T)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전주기전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장수군수인 아버지(임상학)가 별세하자 전주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보이열 선교사의 권면으로 평양조선여자신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산정현교회의 반주자로 봉사하다가 신사참배로 학교가 폐교되자 어머니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결혼 당시 항서교회의 주일학교 유치부 교사와 성가대 반주자였다. 결혼 후에는 부산여고와 남성여고의 음악교사로 재직하였다. 후에 고려신학교 8회 졸업생이 되어 평생 선교동지로 남편과 함께 많은 봉사의 일을 감당하였다.
3) 김영진, 《선교지 대만에서 역사하신 하나님》, (총회선교부. 1992), “선교를 모르는 선교사”, pp.26-29.
4) 김영진, 위의 책, pp. 36~38.
5) 대만의 종족별 인구분포와 언어는 대만인(75%, 중서부 남부평지, 푸젠성 민난어), 대륙인(13%, 북부대도시, 베이징 만다린), 객가인(10%, 북부중서부, 하카어[객가어]), 산지인(2%, 30개 산지향, 9개 부족어)이다.
6) 위의 책, p.43.
7) 오윤표, 《선교사 김영진》 (총회출판국. 2002), p.101 김영진이 처음부터 친구로 지내던 원야수(溫雅樹)의 아들인 원(溫) 형제와 짜이이쉰(載義勳) 형제이었다. 짜이(載) 형제는 후에 부름을 받고 목사가 되었다. 
8) <파수군>, (1959년 10월호) ; “그동안 활동사항을 보고드리면, 부흥사경회 3차, 전도강연회 6차, 여전도연합회 강연 4차, 청년연합집회설교 2차, 교회 예배설교 131차였으며, 교회 별로는 장로교 22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기타 각 1교회이었습니다.”
9) 김영수, “한국교회의 대만선교에 대한 연구” , p.58 당시 한국교회는 외환을 직접 국외로 송금할 수 없어서 미국을 경유하여 송금하였는데, 선교헌금 관리에 사고가 생겨 근 1년간 선교송금이 한 푼도 오지 않았다.
10) 오윤표, 위의 책, pp.106-107.
11) 오윤표, 위의 책, PP.105-106.
12) 김영진, 위의 책, PP.91-96.
13) 김영진, 위의 책, p.71-76.


*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사진 설명 | (왼쪽) 새롭게 지어진 선교관 전경 (오른쪽) 20년 후 모습
김한중 선교사 | KPM 전 본부장, JMTI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