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티 문 캡처.png) I. 들어가는 말 역사적으로 여성선교사들은 세계선교의 동력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한국인들의 해외여행자유화정책이 맞물려 1990년대 초부터 해외선교 열풍이 불어왔고, 한국교회 여성선교사들도 세계선교 대열에 합류하였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이하 KWMA)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9년 12월 말 현재 43개 교단 선교부와 230개 선교단체에서 파송한 한국선교사는 171개국에 28,039명이다. 그러나 개별 교회나 노회에서 파송하거나 개인이 자발적으로 간 독립선교사들의 수까지 합하면 한국교회 해외선교사는 3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번 조사에서 KWMA는 여성선교사의 숫자에 대해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에 발표한 자료들을 참고해 보면 여성선교사 숫자는 전체 선교사의 55% 정도이다. 대부분의 남성선교사들이 기혼인 것을 감안하여 여성선교사 중에서 사모선교사를 제외하면, 독신 여성선교사는 전체 선교사의 약 4.7∼5% 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장로교 합동측 총회세계선교회(GMS)는 2020년 4월 현재 1,436가정 2,579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중 독신 여성선교사(남편 사별자 포함)는 120명으로 전체 선교사의 약 4.7% 정도에 이른다.
본고에서는 중국에서 사역하는 여성선교사들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특별히 여성선교사 중에서 남편선교사를 보조하는 사모선교사보다는 독자적으로 사역을 하는 독신 여성선교사에 한해서 다루고자 한다. 독신 여성선교사의 비율이 전체 선교사에 비하면 적은 듯 보이지만 그들의 역할과 하고 있는 사역을 보면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Ⅱ. 선교 초기의 중국 여성선교사들 중국선교는 1807년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선교사들이 중국 내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1842년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난징(南京)조약’을 맺고 광저우(广州), 샤먼(厦门), 푸저우(福州), 닝보(宁波), 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를 개항하자 서양선교사들은 제한적으로나마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1858년의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톈진(天津)조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으로 서양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중국 내지로 들어가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49년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기 전까지 약 6,000여 명의 서양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사역을 했으며, 한국선교사도 10여 명이 산둥(山東)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당시 독신 여성선교사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중국선교 초기에 중국에서 사역한 몇 명의 한국과 서양의 독신 여성선교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1. 서양교회의 여성선교사 로티 문(Lottie Moon, 1840-1912; 중국명, 慕拉第)은 미국 남침례교회가 중국 산둥성에 파송한 독신 여선교사이다.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석사학위까지 받은 재원으로 1873년부터 1912년까지 약 40년 동안 산둥성 덩저우(登州)에서 선교하였다. 미남침례회가 1873년부터 여성도 해외선교사로 나가는 것을 인정하자 로티 문은 초대 여성선교사가 되었다. 처음 10여 년간은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에서 남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사역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중국에 온 이유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자각하였다. 또한 여성선교사의 임무는 단순히 남성선교사의 보조자나 그 역할이 여성적인 일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여성선교사도 남성선교사와 동등하게 전도사역과 교회개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5년 12월에 로티 문은 교사직을 사임하고 여러 촌락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1889년 지역 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침례 받은 사람이 1,000여 명에 달했다. 그녀는 중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중국어로 사역을 하였고, 철저히 중국인과 동화된 삶을 살았다. 1912년 중국에 기근이 들어 가난한 중국인들이 먹지 못하자 그들을 도와주다가 정작 자신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말았다. 1912년 12월 24일, 그녀는 의료진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로티 문은 남성 위주의 선교현장에서 여성선교사로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며, 중국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선교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었다.
마가렛 바버(Margaret E. Barber, 1866-1930; 중국명, 和受恩)는 영국인 독신 여성선교사이다. 1895년 영국 성공회는 허드슨 테일러의 영향을 받은 그녀를 중국 푸저우에 파송했다. 그녀는 성공회가 설립한 푸저우여자중학교에서 교사로 7년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동료 선교사가 학생들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을 질투하자 바버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1909년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돌아갔다. 바버는 영국 노르위치에 있는 서리채플(Surrey Chapel)에서 팬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영향을 받아 성공회에서 탈퇴하고 다시 침례를 받았다. 그러다가 1911년에 그녀는 후원 교회 없이 독립선교사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오직 하나님만을 공급의 근원으로 의지하면서 1911년부터 1930년까지 약 20년간 푸젠(福建)성 시골 마을 산등성이에 있는 바이야탄(白牙潭)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그녀는 유명해지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내면서 중국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다가 중국 청년들을 전도자가 키워야겠다는 비전을 품게 되었다.
1921년에 바버는 당시 18살인 워치만 니(Watchman Nee, 倪柝声, 1903-1972)와 23살인 왕짜이(王载, 1898-1975)를 만나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왕짜이와 워치만 니는 후에 중국교회를 대표하는 유명한 전도자가 되었다. 그녀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은 워치만 니라고 할 수 있다. 바버는 1921년 위치만 니에게 침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성경 교사와 조언자가 되었다. 또 워치만 니에게 펨버(G. H. Pember)와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 등이 쓴 책들을 소개해 주었다. 1930년 2월 말 바버가 장염으로 죽게 되었을 때 그녀의 전 재산이었던 성경을 워치만 니에게 남겨 주었다. 워치만 니는 후에 “바버는 영성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으며, 그녀와 비교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라고 회고했다. 여기는 워치만 니의 신학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한 여성선교사가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만 집중하고자 한다. 바버에게 양육을 받았던 위치만 니가 후에 중국교회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현재까지도 그의 신학사상이 남아 있다.
2. 한국교회의 여성선교사 김순호(1902-1951)는 한국교회가 파송한 최초의 타문화권 독신 여성선교사로 10여 년간 중국에서 사역하였다. 1912년 한국장로교 총회에서 산둥선교를 결의한 후에 목사선교사만 파송하다가 1931년 9월 제20회 총회에서 김순호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인준을 받았다. 그녀는 교단 총회와 여전도회의 인준을 받고 여전도회의 재정지원으로 산둥으로 파송되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성품도 좋았으며, 신앙의 열정과 선교에 대한 사명감도 가지고 있었다. 김순호는 도착해서 3년 동안 언어연수를 한 뒤에 1934년 8월부터 사역을 본격 시작하였다. 1936년에 5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선교지역 17곳을 순회하면서 부녀 교리반을 맡아 말씀을 가르쳤고, 사경회와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불신자들을 감화시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였다. 김순호는 안식년을 맞아 1936년 8월에 귀국하였다가 산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38년 10월, 그녀는 칭다오(青岛)로 들어가 그곳에 거주하면서 산둥지역 순회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1939년 12월에 여전도회에서 김순호를 만주선교사로 다시 파송하였다. 그녀는 만주에서 최혁주 목사와 동역하면서 유창한 중국어로 만주 부녀자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쳤고, 글을 모르는 부인들에게는 중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러다가 1942년 9월 여전도회에서 그녀의 만주선교사직을 사면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임하고도 1943년까지 1년간 자비량으로 계속 선교를 하였다. 그 후 김순호는 귀국하여 신의주제2교회 전도사와 평양신학교의 강사로 열심히 사역하다가 1951년 몰려든 공산당에 체포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50세의 나이에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다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윤정희(?-?)는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약 10년간 남만주 펑톈(奉天, 지금의 션양[沈阳])지역 재외 동포들을 위해 파송된 독신 여성선교사이다. 장로교 총회와 여전도회가 연합하여 김순호를 파송한 선교적 열정은 1933년에 윤정희를 남만주에 파송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윤정희 선교사는 남만주 일대를 순회하면서 전도하거나 사경회를 인도하는 사역을 하였다. 그녀는 한 지방에서 1주일 혹은 2주일씩 머물면서 주로 한인 여성들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그녀는 부인 사경회, 부인 전도회, 야학, 개인 전도, 전도 강연회 등을 통해 성경과 통신과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집회뿐 아니라 문서 전도도 윤정희 선교사의 중요한 선교전략 중 하나였다. 매일 전도지를 열 장씩 나누어 주면서 전도했고, 성탄절에는 성경과 찬미책 등을 전달해 주기도 하였다.
1938년 5월 10일 자 ‘기독교보’에 윤정희 선교사의 활동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1933년부터 1938년까지 5년간 그녀는 매우 활발하게 사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사역 결과로 한인 노회가 탄생되었고, 집회를 통해 배출한 여성사역자들은 만주지역 각 교회의 여전도사로 채용되었다. 1940년에 일시 귀국하여 안식년을 보내고, 1941년에 선교지로 돌아갔으나 병을 얻어 다시 귀국하여 평양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1942년 김순호 선교사가 사면될 때 윤정희 선교사도 같이 사면되었다. 장로회 여전도회는 그동안 밀린 사택비와 치료비의 잔금을 지불해 주긴 했지만 결국 윤정희 선교사는 병든 몸으로 선교사직을 사임하게 된 것이다.
Ⅲ. 현재의 중국 여성선교사들 KWMA의 조사에 따르면 2019년 12월 현재 중국선교사는 약 3,000여 명이다. 그러나 최근 2년에 걸쳐 많은 중국선교사들이 중국 정부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선교사는 극소수이다. 또 여선교사들은 파송 선교단체 없이 개별 교회의 파송이나 혹은 독립 선교사로 사역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여선교사의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본고에서는 한국교회가 파송한 여성선교사들 중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사역을 하는 ‘독신 여성선교사(이하 ‘여선교사’로 칭함)’들의 사역에 한해서 다루고자 하며, 보안상의 이유로 선교사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익명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중국 여선교사들의 사역 중국에서 비자발적으로 철수한 여선교사들 중 일부는 이미 다른 나라로 재배치되어 떠났고, 일부는 여전히 한국에 남아서 선교지를 찾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서술한 여선교사들의 사역은 현재 진행형일 수도 있고, 이미 과거의 사역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 이 사역들은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부터 2020년 4월 현재까지 이루어졌던 사역이기 때문에 본고에서 현재형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그럼 중국 여선교사들이 무슨 사역을 했는지 살펴보자.
첫째, 가정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보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서 삼자교회에도 여성목회자가 많이 있다. 따라서 중국 신도들은 여선교사들이 목회하고, 설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어떤 여선교사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떤 여선교사들은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젊은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가정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고 있다. 보안 문제 때문에 모이는 인원의 규모는 20-30명 정도로 그다지 크지 않다.
둘째, 캠퍼스에서 대학생사역을 하고 있다. 대학생 선교단체 출신의 여선교사들은 학생 신분으로 대학에 다니면서 중국 대학생들을 전도하거나 혹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학생들을 양육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대학생사역은 비교적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하고 있기에 훈련받은 좋은 일꾼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직장을 찾아서 다른 도시로 떠나기도 한다. 학생들을 다시 전도해서 훈련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너무나 귀하고 효과적인 사역이다.
셋째,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 신학교육을 하거나 제자훈련을 하고 있다. 어떤 여선교사들은 중국인들과 같이 합숙하면서 신학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교육사역은 거기에 합당한 실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에 이 사역을 하는 여선교사는 많지 않다. 어떤 여선교사들은 ‘예수님의 생애(Shepherd Life)’나 ‘쉽게 읽는 성경학교(어, 성경이 읽어지네)’의 중문 교재로 성경교육을 하고 있다. 또 어떤 여선교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서 귀납법적 성경 연구 방법으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제자훈련을 하고 있다.
넷째,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현재 많은 중국교회가 주일학교 운영 방법을 잘 모르고, 주일학교 교재가 부족하다. 따라서 어린이 선교전문단체 출신의 여성선교사들은 주일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사역하고 있다. 주일학교 교사 훈련은 여러 단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료하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이 사역을 하는 여선교사들은 주일학교에 필요한 교육 교재, 도구, 기기 등을 중국교회에 공급하는 사역도 함께하고 있다.
다섯째, 중국교회 찬양사역자를 양성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현재 중국교회에 찬양사역자가 많이 부족하다. 따라서 음악에 은사가 있는 여선교사들은 찬양사역을 담당할 일꾼들을 양성하고 있다. 이 사역을 하는 여선교사들은 성가대 지휘법, 찬양 인도법, 피아노나 전자 오르간 반주법, 기타 연주법 등을 교육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오선지로 되어 있지 않고 아라비아 숫자 12345로 표시하고 있기에 오선지 악보 읽는 법도 교육하고 있다.
여섯째, 전문인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어떤 여선교사들은 중국 대학교나 전문 학원에서 한국어 교수나 영어 선생, 행정 요원 등으로 전문인사역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전문 학원의 교사(유치원, 피아노, 컴퓨터 등)나 병원의 의료인(간호사, 물리 치료사 등)으로 전문인사역을 하고 있다. 또 어떤 여선교사들은 한중 합자 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물심양면으로 선교에 협력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교회가 파송한 중국 여선교사들은 남성선교사에 못지않게 여러 분야에 걸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적지 않은 여선교사들이 적은 후원금으로 생활하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지금 그들은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역사에한 획을 긋고 있는 중이다.
2. 여성선교사들이 겪는 어려움 선교사들 중 안타깝게도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중도 탈락자들 중에서 독신 여선교사의 탈락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이것은 독신 여성선교사가 선교지에서 겪는 어려움이 매우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는 중국에서 사역하는 독신 여선교사들이 겪는 어려움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중국에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비자 해결을 위해서 또 다른 직업이 필요하다. 중국은 해외선교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선교사 비자가 없다. 따라서 중국선교사는 비자 해결을 위해서 학교에 계속 다니거나 직장에 다녀야 한다. 그러나 외국인이 중국에서 직장을 찾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택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중국 여성들은 결혼한 뒤에도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여선교사가 온종일 집에 있으면 중국인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부득불 학교에 다녀야 하는 여선교사들은 재정과 시간 사용에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둘째, 중국 여선교사들은 다른 지역의 여선교사들에 비해 재정 후원을 받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예배당을 건축하거나 선교 센터 건축, 우물 파는 사역 등을 하면 쉽게 감동을 받고 아낌없이 후원금을 내놓는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그런 사역을 할 수가 없다. 오직 조심스럽게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하거나 제자훈련 혹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보안상 제한된 내용의 기도편지를 쓸 수밖에 없다. 한국 성도들이 중국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후원자들은 사람을 키우는 사역에 그다지 감동하지 않는다.
셋째, 중국 여선교사들은 긴장된 생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중국에서는 보안상 타인에게 자신의 선교사 신분을 쉽게 밝힐 수 없다. 또 언제 공안에게 신분이 발각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긴장하면서 살아야 한다. 게다가 사역하거나 공부하는 시간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외롭다. 이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격이 괴팍스럽게 변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보면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는데 정작 여선교사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넷째, 여성 리더십에 대한 이해가 낮기 때문에 팀사역에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비단 중국 여성선교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어느 지역에서나 대부분의 남성선교사들은 자신과 동일한 학력과 경력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상대가 여선교사라면 동등하게 대우하기보다는 자신의 보조자나 들러리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여선교사들에게는 재정 담당이나 잡다한 허드렛일을 맡긴다. 가부장적인 생각을 지닌 남성선교사들의 의식이 변화되지 않는 한 여선교사들은 대등한 위치에서 남성선교사들과 팀사역을 하기가 어렵다.
다섯째, 여선교사에게 중국선교사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지 않았다. 파송한 교단에 따라서 어떤 여선교사는 이미 목사안수를 받았기에 중국에서 직접 세례와 성찬을 집행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여선교사는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세례와 성찬을 집례할 수 없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목사안수를 받은 대부분의 여선교사들은 군소신학교에서 공부한 군소교단 소속이다. 정작 정규 교단 신대원에서 공부한 여선교사들은 교단정책에 의해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다. 문제는 중국에서도 3, 4년제 신학교를 졸업하면 여성도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중국교회 신도들은 목사가 아닌 여선교사는 중국교회 여목사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특별히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중국에서 비자발적으로 철수한 여선교사가 대만으로 선교지를 변경하려고 할 때도 목사가 아니면 선교사 비자를 받을 수 없다. 대만측에서도 목사가 아닌 사람은 선교사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교단 선교부나 선교단체에는 여선교사들을 위한 선교정책이 사실상 부재하다고 본다. 이것은 비단 중국 여선교사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체 여선교사들의 문제이다. 선교 기관들은 대부분 남성선교사 위주의 시스템과 가정을 가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사정책에 있어서도 여선교사를 지도자로 세워 주지 않고 그녀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여선교사들의 재교육과 정신 건강을 위해서 재정을 투자해 주지도 않는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문제의 근본적인 이유는 여선교사 본인의 문제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교단 선교부나 선교단체들의 여선교사를 위한 선교정책의 부재하기 때문이다.
Ⅳ. 독신 여성선교사들을 위한 제안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든 선교사는 성별이나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평등한 존재이다. 중국에서 여전히 사역하고 있는 여선교사들이나 재배치되어 다른 나라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여선교사들, 아직도 여전히 선교지를 찾고 있는 여선교사들을 위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비자발적으로 철수한 여선교사들 중 아직까지도 선교지를 찾지 못한 여선교사가 있다면 한국 내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을 하라고 제안하고 싶다. 물론 후원 교회와 파송 기관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2020년 4월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100만 명에 달하며, 그중 중국 유학생은 7만 명에 이른다. 이제 중국으로 중국인들을 찾아가서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찾아온 중국인들을 선교하는 시대가 왔다. 아직까지 선교사를 후원하는 한국교회가 이런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파송 기관이 적극 나서서 패러다임 변화를 위해 힘써 주어야 한다. 이제 한국은 중국선교의 황금어장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중국선교하는 여선교사들이 갈수록 많아져야 한다.
또한 선교단체와 선교 기관은 여청년들이나 젊은이들을 중국선교 헌신자로 일으켜야 한다. 최근 한국교회의 선교 열기가 식으면서 선교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현재 여선교사들의 연령은 대부분 중년 이상이고 젊은 여선교사들은 극소수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여선교사가 중국에서 비자발적으로 철수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젊은 여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전 방식에서 탈피하여 파송 단체를 드러내지 않고 파송 기관 없이 전문 직업인으로 가서 직접 일하면서 사역하거나 학생으로 공부하면서 사역해야 한다. 그리고 젊은 여선교사들 가운데 은사가 있는 사람을 발굴해서 중국선교 전문가로, 선교 리더십으로 양성해야 한다. 이번 21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에서 여성 국회의원이 57명(19%)이나 되고, 20∼40대가 약 17%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한국교회와 보수적인 교단 선교부만 변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안식년으로 들어온 여선교사들이 디브리핑이나 심리 상담 받는 것을 의무화해야 한다. 중국같은 공산권이나 이슬람권에서 보안 문제로 늘 긴장된 상태로 지내거나 아프리카같이 낙후된 지역에서 오랜 기간 혼자 고립되어 지냈기에 심리적 불안감에 힘들어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변화된 사회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안식년에 육체의 건강을 위해 건강 진단을 받듯이 정신 건강을 위한 다양한 진단을 받고 회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충분한 휴식을 통해 영적으로 재충전할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 여선교사들이 신학적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남성선교사들은 대부분 신대원을 졸업한 목사선교사들이다. 어떤 여선교사들은 여성이 굳이 신대원까지가서 공부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면서, 학부에서 공부한 것만으로도 중국선교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이상 공부하지 않은 채 20, 30년 전에 배운 것으로 선교지에서 우려먹고 있다. 중국인들의 경우 사회적 발전과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학력과 생활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반면 여성선교사의 실력은 발전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AI(인공지능)까지 출현하는 시대에 선교사가 계속해서 공부하지 않고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도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단 선교부나 선교단체들은 안식년으로 들어온 여선교사들에게 재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하고, 여선교사 자신도 실력 향상과 영성, 은사계발을 위해 적극 분발해야 한다.
끝으로 여선교사가 은퇴한 뒤에 장기적으로 거주할 은퇴관 마련이 시급하다. 안식년으로 들어온 여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예전에 비해 많이 늘어난 상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단체나 교단 선교부가 아직까지 여선교사 은퇴관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 선교역사가 30년을 넘어서면서 은퇴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KWMA의 조사에 따르면 2018년 은퇴자는 829명이고, 2019년 은퇴자는 824명이다. 게다가 2019년 12월 현재 60대 이상인 선교사는 4,446명(16%)으로 이들도 머지않아 은퇴하게 될 것이다. 은퇴한 여선교사의 숫자는 별도로 밝히지 않았지만 여성 은퇴자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평생을 선교에 헌신한 여선교사들을 위해서 한국교회와 선교 기관이 힘을 합해서 은퇴관 설립을 서둘러 주어야 하고, 이들이 노후에 생활할 수 있게 의료시설과 복지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Ⅴ. 나가는 말 위에서 필자는 먼저 중국선교 초기에 선교사역을 했던 서양 여선교사들과 한국 여선교사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들은 당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중국에 가서 최선을 다해 교회를 개척하고, 설교와 전도를 하고, 사람을 키우는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현재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국교회 여선교사들도 남성선교사들이 하는 여러 가지 사역을 동일하게 잘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선교사들은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사역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어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신 여선교사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한국교회와 교단 선교부, 선교단체에 몇 가지 제안을 했다.
1992년 8월 한중수교를 기점으로 한국교회의 중국선교가 다시 시작되었다. 2020년 4월 현재까지 다시 시작된 중국선교는 28주년을 바라보고 있다. 되돌아보면 중국선교 과정에서 한국 선교사들이 실수한 것도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모두 몸을 낮추고 충성스럽게 사역을 감당하였다. 모든 남녀 선교사들의 수고로 중국교회는 부흥했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비록 여선교사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선교현장에서 다양한 사역에 동참했고 공헌을 세웠다. 비록 비자발적으로 철수했지만 중국선교 역사를 기록으로 남길 때 중국에서 선교한 여선교사들의 눈물과 헌신, 그들의 사역활동과 공헌한 내용들도 일일이 기록으로 남게 되길 기대한다.
과거 노동력이 경제 성장률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사회에서는 여성보다는 비교적 힘이 센 남성들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로 변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꼼꼼하고 섬세한 여성들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많은 곳에서 여성들을 필요로 한다. 변화된 사회와 마찬가지로 지금 중국선교에서는 섬세하고 온유한 성품을 지닌, 그러면서도 활기차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여선교사들을 필요로 한다. 이제 중국선교는 중국인이 있는 곳이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가능하며,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젊은 여선교사들이 더 많이 중국선교에 헌신해서 세계 곳곳에서 중국인을 양육하는 일에 동역하게 되길 기도한다. 문자적 성경 해석을 고집했던 근본주의 신학은 개혁되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평등함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 말씀대로 여선교사들을 제도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여선교사들을 지도자로 양성하며, 여성선교사들이 중국선교를 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참고자료 주선애, 《장로교 여성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1979. 김교철, “한국 여성 최초의 중국 여선교사 김순호와 중국 여성선교”, 〈중국을주께로〉 5/6월호, 1997. 편집부, “한국교회 최초의 여성선교사 김순호”, 〈중국을주께로〉 11/12월호, 2001. 이정순, 《세계선교와 한국여성선교사들》,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09. 장예진, “주님 앞에 홀로 선 여성선교사들”, 〈중국을주께로〉 3/4월호, 2011. 박보경, “한국 장로교회 초기 여성선교사의 사역과 선교학적 의의(1908-1942)”, 《세계선교연구원》 19집, 2011.4. https://baike.baidu.com/item/慕拉第/3289419?fr=aladdin https://baike.baidu.com/item/和受恩/5657038?fr=aladdin
※이 글은 <한국선교 KMQ> 2020년 여름호(통권 74호)에 실린 바 있다.
사진설명 | 로티 문 선교사 / 출처 | 바이두 석은혜 | 본지 전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