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중국교회-사부아-바이두-최종.JPG) 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Ⅱ.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3. 신학적 평가
III. 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문제 1. 본색화를 위한 노력을 촉진했던 힘들 2. 오사운동 시기 지식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들 3. 본색신학의 건설을 향해 4. 신학적인 공통 기반, 공통된 원칙
IV. 민족주의: 반(反)기독교 운동에 미친 영향 1. 반(反)기독교운동: 초기의 발전, 1922년과 1924년의 반기독교 활동들 2.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공격 3. 오삼십참안(五卅慘案, 5월 30일 사건) 4. 기독교 교육 - 민족주의의 걸림돌인가? 5.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아래의 기독교
V. 민족주의: 중국교회의 대응 1.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 1)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 2) 선교와 제국주의 3) 공존의 가능성 2. 민족주의에 대한 대응 1) 정치적인 참여 2) 정치에서의 도덕성 문제
3) 기독교 교육과 도덕적 덕성의 함양 기독교가 정치의 도덕성을 강조한 것은 ‘인격구국(人格救國: 인격을 통한 민족의 구원)’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 ‘인격구국’의 기초 위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당시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던 반(反)기독교교육운동에 맞서서 기독교를 옹호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반기독교 인사들은 국가의 교육제도 속에 기독교 교육이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중국 교육가들 중 많은 이들이 학생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호하고 교육의 원칙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교육과 종교의 분리를 견지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은 기독교 학교들 가운데 외국인이 소유한 관리 권한은 반드시 중국인들에게 반환되어야 하고, 교내의 모든 교육 과정에서 어떠한 ‘종교의 악취’도 깨끗하게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들도 또한 기독교 교육은 국가와 민족에 해를 끼치는 일종의 문화적 침략이라고 비판했다. 가장 많이 받은 공격은 기독교 교육이 국가 교육의 목적을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국가 교육 체제 속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기독교 교육가들은 모두 기독교 교육을 변호하며, 기독교 교육이 중국에서 유용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줄곧 견지하였다. 1922년 《중국기독교교육사업(中國基督敎敎育事業)》 보고서에서는 기독교 교육이 중국의 기독교운동에 필요불가결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기독교 공동체를 건립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의 존재 이유이다. 교육과 선교는 그 과정에서 양방향으로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또한 보고서는 기독교가 인격 형성에 있어서 ‘교육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월리스(E. W. Wallace)가 말한 대로 “우리의 교육이 중국 혹은 기독교 사회(공동체)에 불후의 가치를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이 장차 강조해야 할 바는 바로 이 점에 있다.”1) 정상범(程湘帆)의 관찰에 따르면 현재의 사회적인 혼란과 무질서는 인민들에 대한 종교적·교육적인 훈련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기독교 학교에서 시행하는 그러한 훈련들은 장차 학생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은 희생, 정직, 충심(忠心)의 정신을 배양하도록 할 것이며, 그러한 정신은 민족(국가)의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종교를 필수적으로 가르치는 이유는 공립학교의 도덕 훈련이 윤리에 근거해 있다면 우리의 도덕 훈련은 종교에 근거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세(救世)의 열심과 그의 즐겨 희생하고 용감하게 봉사한 정신이야말로 아동들을 감화시킬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정신에 뿌리를 박고 점차 성장하고 변화하여 마침내 고상하고 탁월한, 그리스도화 된 한 인격체로 완성되어 갈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2)
중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중국에서 기독교 교육이 담당하는 특수한 기능에 대해 깊이 확신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그것이 공립학교의 교육 사업을 효과적으로 보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중국 기독교 교육의 독자적 지위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한 것이 바로 《중화기독교교육계선언(中華基督敎敎育界宣言)》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기독교 학교의 교육 형식은 공립학교와 같지 않지만) 기본적인 목적은 그것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인격과 도덕적 품행(品行)을 양성하는 데 있다.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국가의 미래에 특별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 또한 바로 이 점에 있다.3)
선언문에 따르면 중국 내 사립학교의 존재는 민주주의의 정신과 일치하며, 그것은 국가 교육제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성하고 다원화한 교육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중화기독교교육회(中華基督敎敎育會)는 자신이 정부에 등록을 요청하고 학원의 감독을 받아들임으로써 기꺼이 기독교 학교들을 정부 기구들 속으로 통합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표명하였다. 이는 기독교 교육이 독립적이고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반기독교 인사들의 비난에 대한 답변이었다. 선언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선언은 학교 행정의 본색화(本色化)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 학교가 비록 외국교회와 서양선교사들이 설립한 것이며 현재 또한 그들이 운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은 곧 중국 인민의 최대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있으며, 정신에서 내용에서 그리고 유지와 관리에서 마땅히 중국화하여야 한다는 것이 본래부터 중국 기독교 교육가들이 항상 표명해온 소원이다. 이것은 중국과 서구의 기독교 교육가들뿐만 아니라 과거에 중국 학교들을 지원하였던 선교단체들과 또한 점차적으로 그들의 지원과 관리를 양도받은 기독교 공동체의 공공연한 이상이었다. 다행스럽게 이러한 이상은 이미 점차 실현되고 있으니, 본국의 신도들은 점진적으로 기독교 학교를 맡아 유지하고 관리하게 될 것이다.4)
중국인들의 손에 지도력을 양도하여야 한다는 요구는 현재 완전히 충족되었다. 선언문은 국가 헌법상 종교자유에 대한 해석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다. 그들은 교내의 선전활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다만 기독교 학교는 “한편으로는 교회단체 구성원의 자녀들을 위해 일종의 그리스도화 교육을 실시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유형의 교육을 제공하는 사립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5) 기독교 교육가들은 그것이 기독교 학교의 ‘특별한 기능’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그들이 등록을 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조건이었다. 선언의 논점은 본색화와 민주화 원칙에 대한 강조를 주로 삼았으며, 당시 거세지고 있던 반기독교운동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즉, 자발적인 종교적 활동들을 권장하는 문제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 있어 그것은 지방 혹은 중앙 정부의 인정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 속에 이미 흡수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선언문의 입장은 기독교 교육이 민주화하고 본색화하여야 한다는 원리들을 천명한 《중화기독교교육계간(中華基督敎敎育季刊)》의 선언과 유사하였다.6)
국민당 통치 기간 동안의 기독교 교육의 일반적인 경향은 학교의 조직을 공고하게 하면서 학교의 행정 관리권을 외국인으로부터 중국인에게로 교체해 가는 것이었다. 국민당의 교육정책은 교육을 당의 노선 위에 두기 위해 민족주의적 방향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이 국가를 지배한다(以黨治國).”라는 국민당의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이 시기 일부 기독교 교육가들은 기독교 교육이 시대의 압박 아래에서 당의 변덕스러움에 종속되거나 자신의 독자성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때까지 등록 문제는 대체로 해결된 상태였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이 담당하여야 할 역할 문제는 여전히 계속해서 토론되었다.
어떤 이들은 국민당 또한 교회의 선교책임의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은 마땅히 당 교육을 포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취하는 이들은 여전히 종교의 우선성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교육을 종교의 도구로 여기고 있었다. 반면 그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종교적이든 아니든, 기독교 교육의 어떠한 독립적 혹은 초연(超然)한 목적도 부정하고, 기독교 교육이 당 교육에 대항해서 다른 깃발을 올리거나 당 교육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교육은 마땅히 당에 충성하여야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독자성을 보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교육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각 방면의 의론(議論)이 분분하였고 관점도 다양하였지만 교회 지도자들이 일관되게 견지하였던 하나의 논점은, 기독교 교육이 국민당이 추진하고 있었던 인격 배양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남대학(嶺南大學) 교수 사부아(謝扶雅)7)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 교육은 우리 당을 위해 인애(仁愛)하고 용감하며 순정(純正)하고 무사(無私)한 인간들을 양성해 낼 것이다. 그들은 당의 사무를 담당할 것이며, 당의 명령을 수행할 것이다. (……) 국민당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기독교 신자인 당원들은 마땅히 최선을 다해 당을 지지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당을 확장하고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기독교 교육은 마땅히 당의 계획들 속에서 영속적이고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8)
기독교 학교들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행하였다. 예를 들어 참된 기독교 인격을 갖춘 교사들을 채용하였으며, 캠퍼스에 기독교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기독교 학생들의 숫자를 늘렸고, 학생과 교사들 사이 그리고 교회와 학교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였다.9)
인격 수양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교육과 당 교육 사이의 공통 접점이었다. 기독교는 민족주의가 성행하는 가운데 자신이 중국에 무용(無用)하다고 하는 비난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유행한 구호인 인격구국이 중국 청년들에게 국가의 재건이라는 과업에서 담당해야 할 책임을 각성시키고자 한 것이었다면, 이제 그것을 특별히 당의 부흥에 적용한 ‘인격구당(人格救黨)’이 계속해서 그 뒤를 이었다. 그것은 또한 기독교 교육이 중국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건립하고 일단의 조롱하는 성격의 비판을 물리칠 수 있는 견고한 기초가 되었다. 이는 어떤 교육가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만약 우리가 중국에 다수의 절대적으로 정직하고 진실 무사한 청춘 남녀들을 공급할 수 있다면, (……) 우리 기독교 학교들의 지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10) 이러한 신념은 당시 적지 않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적 입장, 곧 변화된 개인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모범이 중국 인민들의 도덕 수양을 위한 본보기를 제공해 주며, 예수의 정신이 그들의 추동력이 된다고 믿었다. 선교사들과 중국인 교육가들은 이러한 신념을 견지하였기 때문에 비록 정치·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해서 자신들의 사역지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임무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당(黨)과 기독교 중국교회가 국민당 정부 통치하에서 직면했던 주요한 문제는 곧 교회와 당의 관계 문제였다. 교회와 국가(정부) 분리의 원칙은 당시 중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실행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실행될 수 없다면, 둘은 어느 정도까지 협력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협력은 기독교 신앙의 원칙과 부합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떤 중국 기독교인들은 국민당의 그 교조(敎條)와 의식(儀式)으로 볼 때 이미 하나의 종교적 조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11) 예를 들어 손중산(孫中山) 선생의 추도식 등에서 농후한 종교적인 색채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초상 앞에 절하는 것, 3분간의 묵념, 그의 유지(遺志)를 공개적으로 읽는 것, 그의 생일에 대한 축하, 그의 명패 앞에서 맹세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그의 《건국방략(建國方略)》과 《건국대강(建國大綱)》, 제1차 국민당 전국대회의 선언문, 무엇보다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이미 당 ‘종교’의 정전(正典)이 되었다. 인민들의 마음속에 이 위대한 지도자의 정신은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으니 이는 선교사 휴즈(E. R. Hughes)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국민당 자체의 특징이 이 시기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손중산(孫中山; 孫逸山, 孫文)과 그의 교훈에 복종한다는 것을 구호로 삼았다. 그는 비록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그들 속에 살아 있어 당 조직이 활력을 갖게 하였으며 동시에 각 지역 인민들의 가슴속에서 생명의 소망을 불러일으켰다.”12)
1923년 국민당 재건 이래 손중산의 정치전략에는 혁명 기간 동안 당을 국가의 위에 두려고 하는 강한 경향이 있어 왔다. 1924년 초, 손중산이 소비에트의 원칙을 받아들여 당의 통치(일당 지배)를 실행했을 때 그의 입장은 더욱 명확해졌다.13) 장개석(蔣介石)이 집권했을 때 그는 손중산의 조치(독트린)를 계승하여 일당 지배를 견지했다. 많은 중국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신정부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일종의 정치적인 편의에 따른 것이었지만 신정부가 제창한 ‘종교성’을 띤 활동들은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국민당 내부의 일부 반기독교 성향의 당원들은 종교와 당 사이를 실제적인 이익상의 충돌이 있는 상호 경쟁적인 관계로 보았고 그래서 계속적으로 비판하였다. 하지만 당시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종교와 당정(黨政) 사이에 상호 협조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한 협력의 기초(협력의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장사장(張仕章)은 종교와 당은 마땅히 자신들의 고유한 성질에 따라서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국가와 인민을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합작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당은 종교의 정신으로부터 감화를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의 종교 의식(儀式)들을 채택해서는 안 되며, 또한 종교는 당의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헌법상 보장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14) 이러한 정황 속에서 그는 당과 종교(기독교) 사이의 합작에 찬동하였으며, 또한 당의 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당과 종교의 통합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차 당으로 하여금 종교에 대해 진압 수단을 시행하게 할 것이며, 이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는 곧 당에 의해 종교가 삼켜지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국민당 당원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종교 교리들이 당의 정치이론(이데올로기)의 일부분이 된다면 종교의 독자성은 신속하게 상실될 것이며, 국민당은 오직 국가주의를 무상(無上)의 권위로 삼는 하나의 ‘종교’ 정부(국가)가 되고 말 것이다. 역사상에는 유연성을 잃고 부패로 타락한 국가 종교의 예가 많이 있다. 심지어 종교전쟁이 중국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중국 기독교인들은 국민당과 기독교 사이의 합작(협력)의 가능성을 믿었을 뿐 아니라 또한 기독교는 당 정부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부아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국민당은 결코 충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를 기반으로 국민당이 성공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15) 그의 분석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일종의 도덕적인 개혁 역량으로서 당원들을 부패와 경쟁 행위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각각의 당원이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인애와 용감한 정신을 흡수할 수 있다면, 그때 당은 즉시 한정 없는 희망의 빛으로 비추이게 될 것이다. 또한 국민 혁명도 즉시 성공하게 되어서 중국 민족(국가)은 자유와 평등을 얻게 될 것이다.16)
사부아의 관점은 정치적 낙관주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당시 신정부를 극도로 신뢰하였던 일군의 기독교 교육가들의 의견을 대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경(南京) 금릉신학원(金陵神學院) 교수 프라이스(Frank W. Price, 畢範宇)는 다음과 같이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기독교는 민족(民族)주의, 민권(民權)주의, 민생(民生)주의라는 세 원칙에 대해 완전히 찬동한다. 기독교는 그것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교정하고 사용 방법을 개선하도록 도와서 그것들(三民主義)이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한다.”17)
그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당과 종교 사이의 합작의 주장은 손중산이 제창한 《삼민주의(三民主義)》와 매우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였다. 《삼민주의》는 1924년 광동(廣東)에서 강연된 일련의 강의들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서 새로운 중국의 재건을 위해 손중산이 제시한 이론과 절차가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다. 주경농(朱經農)18)의 분석에 의하면 손중산 정치사상의 중심은 평등(平等)이다. 삼민주의의 기본 원칙은 곧 중국이 국제관계에서의 평등과 국내 통치(정치)에서의 평등, 인민생활에서의 경제적 평등을 얻을 수 있도록 설정된 하나의 건설적 제의(提議)였다. 주경농은 손중산이 어떻게 절충주의적 방법을 채용하여 서방의 정치이론 중에 본국(중국)의 결핍을 보충할 요소를 선택하였는지를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손중산은 중국의 전통적 가치들의 윤리적 기초 위에 자신의 혁명 계획을 수립하고자 하였으며, 고대의 윤리적 생활 원칙과 가치 관념의 부흥을 강조함으로써 인민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민족주의적 열정)을 배양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전통 미덕에는 충성과 효도[忠孝], 인간다움과 사랑[仁愛], 성실과 바름[信義], 평화와 겸손[和平]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9) 이와 유사하게 왕치심(王治心)도 손중산의 이론에서 전통 중국 철학과의 연속성을 변별하였다. 예를 들어 민권의 원칙은 유가(儒家)의 교훈 중에서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니, 맹자가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 국가)이 그 다음이며, 군주가 가장 가볍다.’라고 가르친 것은 곧 그것과 같은 도리(道理)인 것이다.20) 손문주의(孫文主義)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대계도(戴季陶)가 1925년 5월에 출간한 《손문주의의 철학적 기초(孫文主義之哲學的基礎)》에서 평론했던 것과 또한 동일하다.
왕치심은 그러한 전통적인 해석의 노선에 덧붙여서 예수주의와 삼민주의 이론 사이의 비교를 시도하면서 손중산의 정치사상이 기독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심지어 손중산이 중국혁명운동의 기독교 영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삼민주의는 손중산 정치 학설의 핵심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자유(自由), 평등(平等), 박애(博愛)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원칙들을 처음으로 주창한 이가 예수이며 그래서 손중산의 원칙들은 또한 예수의 원칙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각자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나름대로 이들 도덕적 이상을 운용하여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구원 사업에 적용시켰다.”라고 말했다.21) 그는 손중산의 40여 년에 걸친 혁명 생애가, 예수가 새로운 질서[新紀元]를 세우기 위해 감내하였던 희생(犧牲)과 그 정신에서 동일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예수가 인류의 영적인 자유를 위해 생명을 바쳤다면 손중산은 중국인들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예수의 가르침, 곧 상제는 한 하늘 아버지이시며 인류는 한 형제라고 하는 인류의 형제애의 이상은 인류의 평등 정신을 충분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모든 민족 사이의 연대와 화해, 공동체성의 기초를 형성한다. 손문주의 중의 민권 지상의 원칙은 바로 예수가 설파한 인류는 서로 형제라는 관점을 응용하여 국가와 인민의 관계를 건립한 것이다.22) 왕치심은 또한 민생주의는 곧 국내의 재부(財富)의 분배에 관한 경제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동기는 박애(博愛)의 정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은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손중산은 두 번째 마르틴 루터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여겨질 자격이 있다. 왕치심은 심지어 성찬(聖餐)의 상징을 가져와 그것으로 민생주의의 종지(宗旨)에 비유하였다.
삼민주의는 중국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인 해결 방법을 찾았던, 손중산의 예민하고 탁월한 사상을 반영한다. 중국의 전통 관념이 손중산에게 미친 영향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노선에 따르는 해석가(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만큼은 아니다. 손중산이 받은 교육과 서구와의 오랜 접촉이 그로 하여금 서구에서 지침을 찾게끔 유도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삼민주의는 다양한 사회학자들의 이론들을 흡수하였으며, 근대 스웨덴과 미국의 민주적인 정부 모델들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서구적 방식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디어들을 통합하는데서 그리고 중국의 문제들에 대한 중국적 해결책을 찾는데서 손중산이 발휘하였던 탁월성과 독자성(개인적 이상)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그의 경력과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민국(民國)의 건립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교회의 공헌 또한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존경은 바로 그 점에 있기도 하였다. 그는 1912년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수년 전에 나는 혁명을 지지했으며 계속해서 그것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내가 혁명의 진리를 배웠던 것은 대부분 교회로부터이다. 오늘날 민국(民國)의 건립은 나의 노력들이 아니라 교회의 헌신 덕분이다.23)
그러나 손중산이 기독교 특별히 역사적 예수로부터 왕치심이 주장했던 것처럼 그렇게 많은 영감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손중산은 기독교의 선교 사업을 중국에 서양 문명을 전해주는 효과적인 매개자로 여겼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적인 저작들로부터 판단해 볼 때, 우리는 몇몇 주석(註釋)에서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기독교에 기원을 둔 재료들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삼민주의》 전반에 걸쳐 종교에 대한 언급은 그다지 많지 않다. 손중산은 예수가 종교 혁명가라고 말하며, ‘박애’에 관한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은 묵자(墨子)의 ‘겸애(兼愛: 차별 없는 사랑)’와 비견될 수 있다고 하면서 한 차례 언급하였을 뿐이다.24) 그 외에도 책 속에서 종교와 국사(國事)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다는 사실은 손중산의 사상이 기독교의 훈도를 받은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 대한 중국 기독교인들의 열성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만약 손중산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독교 운동에 한 사람의 강력한 지지자를 확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손중산도 일찍이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한 적이 있으며, 《삼민주의》에는 어떠한 반종교적인 진술들도 없다. 그러나 그의 정치 생애에서 가장 주요한 임무는 중국의 지위를 새롭게 건립하고 국가의 존엄을 호위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종교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명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정치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당에 대한 충성과 기독교를 신봉하는 것이 결코 서로 충돌하지 않으며, 또한 기독교와 애국주의 사이에 어떠한 상위(相違: 어긋남)도 있지 않다고 믿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손중산은 중국에서의 기독교의 공헌을 인정하였으며 동시에 그것이 중국 사회를 개혁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삼민주의는 “단지 인민들의 물질생활의 개선을 추구할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의 영적 생명을 배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목표를 달성하는데 종교가 도움을 줄 수 있다.”25) 1930년 10월에는 장개석 장군이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그의 이 행동은 당과 종교 사이의 합작이 더욱 발전하여 갈 것임을 예표(豫表)하는 것이었다. 국민당(國民黨)의 유일한 지도자로서 장개석은 삼민주의의 정통(正統) 해석을 대표하였으며, 기독교 개종자로서 그는 앞으로 임할 동란(動亂)의 세월 중에 기독교운동이 계속 발전하여 갈 것을 암시(暗示)하고 있었다.
미주 1) E. W. Wallace, “The Educational Commission—and After”, China Mission Year Book (1923년), p.159. 당시 기독교 교육계에서 쟁점이 되었던 문제는 ‘교육 사업에서 이러한 종교적인 힘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수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배경을 가진 양 진영의 선교사들 모두를 뜨거운 논쟁에로 이끌었으며, 그들의 중국인 동료들도 그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한쪽에서는 기독교 교육가들이 학교의 커리큘럼에 종교 과목(과정)들과 채플(예배)을 의무 과목으로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그러한 활동들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적합한 방법이라 생각하여 자발성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G. Poteats, “Shall We Surrender the Christian Character of our School?” The Chinese Recorder 56 (1925년 5월), pp. 333-334; E. D. Burton, “The Purpose of Christian Education in China”, The Chinese Recorder 56 (1925년 7월), pp.457-458; Chester S. Miao and Frank W. Price, Religion and Character in Christian Middle Schools (Shanghai: China Christian Educational Association, 1929), pp.37-43 등을 참고하라. 2) 程湘帆, 〈十年來之基督敎敎育〉, 《靑年進步》 100 (1927년 2월), p.153. 3) 〈中華基督敎敎育界宣言〉, 《宗敎思潮》, p.368에 수록. <부록 1> 참조. 4) Ibid., p.369. 5) Ibid., pp.366-367. 이것은 또한 1925년 3월 上海에서 열렸던 中小學敎育會議의 첫 번째 회의에서의 결정이었다. 회의는 “자신들의 자녀들에 대한 종교 교육과 관련해서 기독교 공동체의 권리의 포기를 포함하게 될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말 것”을 권유하였다. The Chinese Recorder 56 (1925년 5월), p.340에 실려 있는 관련 논의를 참조하라. 6) Cf. 《敎育季刊》 제1권 제1기 (1925년 3월). 7) 謝扶雅(N. Z. Zia, 1892-1991)는 1892년에 浙江省 紹興에서 태어났다. 중국 당대의 저명한 철학자이며 문학가이자 기독교 사상가이다. 어린 시절 중국 전통 경전을 공부하였으며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청년 시절 일본에 유학을 가서 도쿄의 高等師範學校, 立敎大學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중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YMCA 전국위원회의 간사로 일했다. 그는 또한 嶺南大學, 中山大學, 金陵大學의 교수를 역임했다. 1949년 홍콩으로 옮겨가 崇基學院, 香港浸會學院 등에서 가르쳤다. 그는 《人格教育論》, 《個人福音》, 《人生哲學》, 《道德哲學》, 《中國倫理思想述要》, 《中國政治思想史綱》, 《經學講義綱領》, 《中國文學述評》, 《修辭學講義》, 《宗教哲學》, 《基督教綱要》, 《基督教與現代思想》, 《基督教與中國》, 《基督教與中國思想》, 등 많은 저작과 수백편의 학술논문을 남겼다. 이외에도 근 80세의 고령에도 친히 《康德的道德哲學》, 《祁克果人生哲學》, 《聖多默神學》, 《東方教父神學》, 《許革勒宗教的神秘要素》, 《安立甘宗思想家文選》 등 다수의 편역서를 펴냈다. 8) N. Z. Zia(謝扶雅), “Are Party Education and Christian Education Conflicting?” Educational Review 20 (1928), pp.185-186. 9) Cf. Chao Tzu-ch’en, “The Future of Religious Education”, Educational Review 20 (1928), pp.162-171. 10) Miao and Price, Religion and Character, p.58.에서 재인용. 11) 張仕章, 〈國民黨的宗敎化〉, 《文社月刊》 제3권 제4책 (1928년 2월), pp.2-4. 12) E. R. Hughes, “Will Sanminism Survive?”, The Chinese Recorder 59 (1928년 10월), p.631. Cf. Lyon Sharman, Sun Yat-sen: His Life and Its Meaning (New York, 1934), p.292f에서의 이른바 ‘cult of Sun Yat-sen’. 13) 孫中山, 〈建國大綱〉, 《孫中山選集》 2冊 (香港中華書局, 1974版), 下卷, pp.569-571. Sun Yat-sen, Fundamentals of National Reconstruction (Taipei: China Cultural Service, 1953), pp.160-161. 14) 張仕章, 〈黨敎合作論之根據〉, 《文社月刊》 제3권 제5책 (1928); cf. 袁業裕, 〈對於張鈕提案之商榷〉. 15) N. Z. Zia(謝扶雅), “Are Christian Education and Party Education Conflicting?”, p.186. 16) Ibid. 17) F. W. Price, “The Teaching of San Min Chu I in Christian Schools”, Educational Review 20 (1928), p.23. 18) 朱經農(1887-1951)은 1887년 浙江省 浦江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에 유학했으며, 孫中山의 지도 아래에 있던 同盟會에 가입하여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中華民國이 수립된 뒤 그는 北京의 《民主報》, 《亞東新聞》 등의 主編으로 일했다. 그는 1916년 미국에 갔으며,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B. A. 와 M. A. 학위를 받았다. 그는 콜롬비아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였다. 1920년에 중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1922년 北京大學 교수, 1923년 上海 商務印書館의 편집인(1928년 이후 總經理), 1925년에서 1926년까지 上海의 光華大學의 校長, 1928년에서 1930년까지 國民黨政府 敎育部의 小學敎育部部長, 그리고 1931년에서 1932년까지 齊魯大學의 校長 등 다수의 중책을 맡았다. 1948년 이후에는 미국에 체류하였으며, 1950년 이후로는 미국 哈德國福神學院에 임직하였다. 저서로 《近代教育思潮》 등이 있다. 19) 朱經農, 〈孫中山先生學說的硏究〉, 《東方雜誌》 (1925년 4월); trans. by F. R. Millican in The Chinese Recorder 57 (1926년 11월), pp.774-784. 20) 王治心, 〈孫文主義與耶穌主義〉, 《文社月刊》 제2권 제3책 (1927년 1월), pp.1-25. 21) Ibid., pp.24-25. 22) Ibid., p.22. 23) 孫中山, 《總理全書》(臺北: 國民黨中央委員會, 1956), 제7권 제1부, p.144. 또한 Chester C. Tan, Chinese Political Thought in the Twentieth Century (Newton Abbot: David & Charles, 1971), p.150f.에 번역되어 있다. 중국어본에서는 이 부분이 간접 인용의 형태를 취하여 “민국의 건립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들 외에도 교회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 정도로 인용되어 있다. 24) un Yat-sen, San Min Chu I, trans. Frank W. Price (Shanghai: Commercial Press, 1928), p.65. 25) 王治心, 〈對於取消打倒宗敎口號的一點意見〉, 《文社月刊》 제3권 제5책 (1928년 3월); 張仕章, 〈我也來談談‘取消打倒宗敎口號’問題〉, 《文社月刊》 제3권 제4책 (1928년 2월).
사진 | 바이두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