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8.4  통권 216호     필자 : 김종건
[중국기독교회사]
마테오 리치의 북경 정착
예물을 통해 만력제의 마음을 얻다
북경에 도착한 마테오 리치는 만력 28년 12월 27일(1601년 1월 30일) 만력제에게 상주문과 예물을 진상하였다. 만력 28년 12월 24일자로 올린 그의 상주문에서는 첫째, 북경에 도착하기까지 20년의 과정과 중국의 언어와 문자를 배워 중국 옛 성인들의 학문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는 사실, 둘째, ‘천주상’, ‘성모상’, 성경, 십자가, 자명종, 지도, 악기 등 황제에게 바치는 서양 문물의 목록, 셋째, 황제에게 바치는 예물은 먼 곳에서 은혜를 사모하여 찾아온 정성이므로 기쁘게 받아 달라는 간청, 넷째, 자신이 배워서 알고 있는 천문학과 수학 지식이 조정을 위하여 쓰일 곳이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마테오 리치가 줄곧 북경으로 들어가려고 애쓴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황제의 신임과 허락을 받아 자유롭게 전국에 선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소문에서는 이런 속마음이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 황제에게 바친 천주상, 성모상과 십자가 등의 물품을 통해 부분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었을 뿐이었고, 자신이 중국 명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옛 성현의 학문에 대한 존중과 배우고자 하는 열정과 서방 과학기술이 중국에 수용되기를 바란다는 점을 더 부각시켰다. 이는 학술성 선교와 유학에 적응하는 기존 방침의 연속이었다. 그를 도와준 태감들에게도 “자신은 북경에 살다가 북경에서 죽는 것 외에는 어떠한 희망 사항도 없음을 황제께 전해 달라”1)고 부탁하기까지 하였다.

만력제는 서방에서 온 이 선교사들의 특이한 외모에도 호기심을 가졌지만 신기한 유럽의 물건과 문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서양 문물 중에서도 단연 황제의 관심을 압도한 것은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자명종(自鳴鐘)이었다. 만력제는 천문을 관측하는 네 명의 태감들에게 3일 내에 선교사들에게 자명종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였고, 이어 선교사들의 자문을 받아 이 거대한 자명종을 안치할 종루(鐘樓)를 지을 것을 지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황제는 사람을 선교사들에게 보내어서 유럽의 풍토, 건축, 복장, 보석, 혼상례, 황제들의 생활 등 궁금한 점에 대해서도 물었다. 또 예물에 포함된 건반악기 서익금(西翼琴)에 흥미를 느껴 측근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태감들이 선교사들에게 서익금 연주법을 배우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서양에서 가져온 예물에 대한 황제의 호기심은 선교사들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황제의 환심을 얻고 태감과 우의를 증진할 수 있었다. 마테오 리치가 태감들에게 시계를 조작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으나 환관들은 처음 보는 기계를 관리하는 데 미숙하여 자명종은 늘 선교사들의 손을 빌어 수리를 해야만 했다. 황제는 이 귀중한 자명종을 궁궐 밖으로 들고나갔다가 훼손될까 염려하여 선교사들이 황궁으로 들어와서 시계를 수리하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은 어렵잖게 황궁 출입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또 유럽의 궁전과 황제의 생활에 대한 만력제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마테오 리치는 자신이 갖고 온 스페인 왕궁, 베니스 교회당과 깃발이 그려져 있는 서양화를 바쳤는데, 여기에 간략한 설명을 곁들여서 표시나지 않게 서양 문화를 전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 신앙을 담은 가사를 중국 궁중 악곡에 붙여 서양 악기 연주 시연을 하기도 하였다. 서양 악기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이 악곡은 황제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 학자들의 관심도 크게 끌게 되어 높이 평가되었다. 나아가 노래 가사의 초록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고, 노래 가사의 복사본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신부들은 다른 몇 곡을 더하여 유럽 문자와 한자를 병기한 가곡집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2)

이와 같이 자명종과 서양 악기 등에 매료됨으로써 황제는 마테오 리치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선교사들과 황제 주위의 태감들 사이의 우의도 더욱 두터워졌다. 이러한 우의는 당시 마테오 리치 일행이 북경에 거류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중국선교 사업을 전개해 나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예부 관료들의 제동도 해소하다
한편 마테오 리치 일행이 황제로부터 호감가는 존재로 대접을 받고 있던 이 순간이 선교사들의 북경 거주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시기였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중국 조정의 관료 조직과 환관들 사이의 첨예한 모순과 갈등은 이를 어렵게 만들었다.

원래 명나라의 제도에서는 외국에서 오는 사절단과 관련되는 일은 예부(禮部) 관할 업무였다. 마테오 리치 일행의 북경 진입과 황제에 대한 예물 진상 등의 모든 일은 명나라 제도로서는 예부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당시 태감 마당을 비롯한 환관들은 예부를 경유하지 않고 마테오 리치에게 전달받은 예물을 황제에게 바침으로써 황제의 총애를 독점하려 하였고, 이것은 예부를 비롯한 관료 조직의 자존심을 건드려 노골적인 저항을 야기하였다.

예부의 관원들은 예법을 내세우며 선교사들을 조공사절단이 머무는 회동관(會同館)으로 옮기게 하고 감금하였다. 태감과 환관들이 찾아가서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예부 관원들은 예법을 내세우며 거부하였다. 회동관에 갇혀 있던 마테오 리치 일행은 조공사절단을 대하는 관례에 따라 예우하였지만, 불쾌함을 거두지 않고 선교사들의 조기 추방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예부는 만력 29년 2월 1일(1601년 3월 5일)에 상소하여, 마테오 리치의 나라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 그가 바친 흉한 물건(성상을 유해로 간주함)들을 궁안에 둘 수 없다는 점, 마테오 리치가 예부의 확인을 받지 않고 직접 조공을 바친 것은 불법에 속한다는 점 등을 거론하면서 이들에게 바친 물건의 값을 주고 궁에서 물러나게 할 것을 주장했다.3) 예부에서는 이후 다섯 달 동안 여러 차례 상주문을 올려 비준해 줄 것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만력황제는 여전히 예부에서 올리는 상소에 동의하지 않고 버티었다. 

이러한 대치 국면은 황제가 비공식적으로 선교사들의 북경 체류를 허락하는 과정을 거쳐 마무리되었다. 자명종 수리를 위해 선교사들이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환관들의 비호도 이러한 결정 과정에 역할을 했다. 예부에서도 자신들의 명예를 잃지 않은 처리 방식을 찾고자 하였다. 마침내 마테오 리치 일행은 북경에서 원하는 곳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정한 보조금도 받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상적인 과정을 무시한 비법제적인 역량 동원과 통치 집단 내부의 모순의 존재가 오히려 마테오 리치로 하여금 중국 전통 주류 사회의 타협과 용인을 도출하여 그의 숙원인 북경 진입 체류라는 성과를 거머쥐게 하였다.


미주   
1) 何高濟 等譯, 《利瑪竇中國札記》 下冊, pp. 403〜405.
2) 何高濟 等譯, 《利瑪竇中國札記》 下冊, p. 410. 
3) 《明神宗實錄》 권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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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