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3  통권 215호     필자 : 문석윤
[오늘의 중국교회]
중국 신학의 건설: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아래의 기독교
-1920년대 반(反)기독교운동에 대한 중국교회의 대응-
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1) 감정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2) 초월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3) 구원의 길로서의 과학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1) 신문화운동과 기독교
  2) 중국 기독교인들은 신문화운동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3) 새로운 종교(新宗敎)의 건설
   <‘종교 문제’에 대한 당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논점>
   <신종교 건립의 배경>
   <신종교와 과학 사조의 관계>
   <신종교와 민주 정신의 관계>

Ⅱ.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1) 예수의 인성(人性)과 그의 인격
  2) 예수의 신성(神性)과 그 행한 초자연적인 기적들
  3) 예수의 사역
  4) 예수의 가르침의 현실적 합성
3. 신학적 평가

III. 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문제 
1. 본색화를 위한 노력을 촉진했던 힘들
2. 오사운동 시기 지식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들
3. 본색신학의 건설을 향해
  1) 중국 문화 속에 기독교 신앙이 선재하여 있다는 입장: 진리의 동일성
  2) 문화들의 조화와 융합을 모색하는 입장 
  3) 기독교가 중국 문화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해 준다는 입장
  4) 어떤 방식으로 기독교는 중국 문화를 온전하게 할 것인가? 어째서 중국 문화는 온전하게 될 필요가 있는가?
  5) 문화이원론(文化二元論): 네 번째 입장
  6) 기독교가 문화를 심판한다: 다섯 번째 입장 
4. 신학적인 공통 기반, 공통된 원칙

IV. 민족주의: 반(反)기독교 운동에 미친 영향
1. 반(反)기독교운동: 초기의 발전, 1922년과 1924년의 반기독교 활동들
2. 제국주의의 도구라는 공격
3. 오삼십참안(五卅慘案, 5월 30일 사건)
4. 기독교 교육 - 민족주의의 걸림돌인가?


5.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아래의 기독교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국민당(國民黨)의 북벌(北伐)이 마침내 1926년 7월 시작되어 민중들을 흥분시켰다. 이번 혁명운동의 목표는 이미 몇 해 전에 손중산(孫中山)이 명확하게 선고하였던 대로 불평등조약들을 폐지하고 국민 정부의 영도 아래 중국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장개석(蔣介石) 장군 휘하의 국민군(國民軍)은 소비에트의 지원과 중국공산당의 합작을 얻어 광주(廣州)에서 화중(華中)까지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도시들이 차례차례 점령되었다. 이해 9월에는 무한(武漢), 11월에는 남창(南昌), 12월에는 복주(福州)가 그리고 상해(上海)와 남경(南京)은 1927년 3월에 점령되었다. 그때에 이르러 양자강(楊子江) 이남 영토의 거의 전부가 국민군의 통제 아래 있게 되었다.1)

국민혁명의 놀랄 만한 성공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들이 있었다. 첫째, 황포군교(黃埔軍校)의 훈련은 매우 효율적인 작전 대오(隊伍)를 건립해 주었다. 둘째, 혁명 선전 공작이 매우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민간에 깊이 침투하였다. 셋째, 각처의 군벌들의 부대 중 국민군에 투항하는 이들이 많아서 그들 내부의 역량이 약화되었다. 넷째, 더욱 중요했던 것은 곧 당시 민의(民意, 공적 여론)의 힘이었다.2) 수년간 인민들은 군벌들이 할거(割據)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압박하는 상황 속에서 이제 더 이상 인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이 통일되고 또한 열강 중에서 평등한 지위를 얻을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국민당의 혁명은 그들의 꿈을 곧 실현시켜 줄 것처럼 여겨졌다. 청년 학생들은 공부는 잠시 접어 두고 이 영광스러운 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선전공작을 도와 국민군이 아직 이르기 전에 일찌감치 민심(民心)이 신 정부에 귀부하도록 예비시켰다. 노동자와 농민들도 공회(工會)들을 조직하였다. 그것들은 주로 공산당 간부들의 지도 아래 국민 정부의 통치를 지지하는 데 동원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혁명운동은 곧 인민해방의 운동이며, 허공에 나부끼는 국민당의 깃발, 곧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는 나라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구원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한 교회 지도자의 말과 같이 “그것은 중화민국이 마침내 명실상부하게 건립되었다는 것, 군벌 통치가 이미 그 말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처럼 보였다.”3)

혁명의 혼란은 반기독교운동에 기름을 부어준 격이었다. 외국 열강에 항거한다는 구실 아래 국민군이 점령한 지역들은 매우 신속하게 폭란(暴亂)과 파괴활동의 장소로 변질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절도와 강도 행위를 자행하였으며 사회는 일시에 무질서한 상태에 빠져 들었다. 군인들,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농부들은 이런저런 경우로 광포한 무질서에 연관되었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들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으며, 일부 선교사들의 가옥과 재물이 군대 중 불법한 자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비록 국민당 당규(黨規)가 이러한 폭력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국면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4) 이 시기의 외국인 혐오정서는 1900년 의화단(義和團)의 난 때보다 더 광범위하고 더 격렬하였다.

사람들을 가장 경악케 한 사건이 남경(南京)에서 발생하였다. 1927년 3월에 국민군은 벌떼처럼 한꺼번에 성(城)에 들어가 유린하였는데, 성내의 많은 외국인들이 잔인한 공격을 받았으며 심지어 남경 주재의 서양 영사관들도 세 군데가 공격을 받았다. 당시 남경대학교의 부총장이었던 John Williams(约翰·威廉斯)는 금시계를 숨기려고 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당시의 형세가 매우 위급하여 외국인들은 총기의 힘에 의지해서 겨우 남경을 탈출할 수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시를 떠나 상해에 피난처를 구했다.5) 이 남경 사건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그들과 중국 사이의 관계를 반성하게 하였다. 이 시점에서 잠시 중국의 선교현장을 철수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얼마의 시일이 흐른 뒤 다시 돌아와야 하는가? 그때 통계에 의하면 8,000여 명의 개신교선교사들 중 오직 500여 명 정도만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했다.6) 전국기독교협진회(全國基督敎協進會) 간사 H.T. Hodgkin(何建)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줄곧 구미 각지의 인사들은 국민 정부의 사명에 대해 공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 남경 사건은 그들로 하여금 매우 실망감을 느끼게 하였다.”7)

국민군의 북벌 기간 동안 수많은 학생 운동[學潮]이 일어났다. 어떤 중국 역사학자(Jessi Lutz)의 관찰에 의하면 “교회학교에서 일어난 학조(學潮)의 시기와 장소는 혁명군의 활동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또한 좌익분자들의 영향을 받았다.”8) 예일대학교(雅禮大學, Yale-in-China)에서 학생들은 등록금 인하, 3분의 2 이상의 투표에 의한 교수 요원의 해고 권리, 학교 이사회에 학생 대표를 참여시킬 것 등의 요구를 포함한 청원을 학교 당국에 제시하였다. 그들은 항의와 시위의 방법을 사용하여 교내의 행정제도를 재정비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학교는 휴교할 수밖에 없었으며 학교장은 사임하였다. 영남(嶺南)대학교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시켰고 심지어는 학교 내의 직원들을 공개적으로 훼방하였다. 11월 노동자들이 파업하자 학교 내 식량과 물 공급이 중단되었으며 일체의 업무가 마비되었다. 강도 면에서는 다르지만 유사한 사건들이 무창(武昌)의 화중대학교(華中大學), 복주(福州)의 복건대학교(福建大學), 상해의 성요한대학교(聖約翰大學), 항주(杭州)의 항주기독교대학교(杭州基督敎大學) 등지에서 일어났다. 한구(漢口)의 미국 주화(駐華) 대사 Frank P. Lockhart(洛克)는 국무부 장관에게 보고서를 보내어 51건의 선교사 관련 분규 사건[敎案]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군의 침략 계획은 매우 조직적이었으며 범위도 광활하였다. 막후의 국민 정부가 의심할 여지없이 볼셰비키파의 영향을 받아서, 만약 형세상 필요하다면 곧 외국 선교사의 재산을 점거하여 사용한다는 정책을 제정하였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또한 정부 내의 과격분자들이, 한편으로는 그러한 재산을 이용하여 군사적 목적에 충당하고, 또한 동시에 그러한 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선교사를 현장에서 영구히 추방하며, 혹은 적어도 그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고 하는 이중의 목적을 가지고 그 정책을 추진한 것이라고 정당하게 추론할 수 있다.9)

선교사들의 지역 단위의 철수는 1926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는 마침 국민군이 북상하던 시기였다. 1927년 초에 광동(廣東), 복건(福建), 호남(湖南) 등지에서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사업을 멈추고 현장에서 철수하였다.10) F. Rawlinson(樂靈生)의 관찰에 의하면 “선교사들의 대단위의 철수는 주로 공산주의자들이 남경에서 외국인들을 공격한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또한 임시적인 방편, 외교적인 압력에 의한 것이었고 또한 중국인 기독교도들의 충고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들에 대한 중국인 신도들의 적대감이나 그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전국 인사들의 희망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11) 연이어 계속 터지는 동란(動亂) 속에서 서양선교사들이 항상 고통스럽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자신에게 되물었던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즉, 만약 중국인들이 우리를 좋아하지(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오늘날 선교사의 역할은 또한 무엇인가?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중국 내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어떤 공식적인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국민군이 승리하기를 희망했다. 왜냐하면 공산당에 비한다면 아마도 국민당은 중국 내의 기독교 활동을 비교적 더 용인해 줄 것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더 적은 악’이었기 때문이다.12) 더욱이 국민당 내의 일부 요직(要職)에 기독교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도 선교사들과 지역 기독교인들이 국민당 정부의 선의에 대한 모종의 확신을 갖게 하였다. 동시에 교회 인사들은 국민 정부에 외부의 반기독교 세력의 악의에 찬 처사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자주 호소하였으며 간간이 만족스러운 공식 반응을 얻어 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남경에 있을 때 장개석(蔣介石) 장군은 한 번 명령을 내려, 1927년 6월 16일까지 모든 군대는 점령하고 있는 교육기관들로부터 떠나도록 하였으며, 그리고 기독교의 재산들을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13) 어떤 선교사들은 심지어 장개석을 기독교의 보호자로 여겼다.14) 그렇지만 국민당 내부의 취약성은 이제 막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들을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좁은 정치기반, 지역 군벌 세력들의 농단, 행정적 비효율성, 소비에트에의 의존, 내부 응집력의 부족 등이었다.

사실상 국민혁명은 중국교회로 하여금 위기의 시기에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다. 위탁민(韋卓民)은 “기독교운동의 흥기 혹은 쇠망이 혁명운동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15)라고 경고했다. 비록 혁명군이 교회에 적지 않은 어려움과 소란을 가져 왔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럼에도 국민군의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의 대의에 동참하였다. 한 교회 지도자는 “강 북부와 남부의 신도들은 비록 어떤 특정한 정치 당파의 입장에 서기를 원할 수는 없었지만 보편적으로 모두 국민혁명운동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16)라고 하였다. 나서서 혁명운동에 대해 언급한 대부분의 기독교 대변인들은 친(親)혁명적이었다. 그들의 분석에 의하면 기독교가 부당하게도 반(反)혁명적이라고 하는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제국주의 서구와 연합해 있다는 혐의를 아직 벗어버리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며, 또한 교회 인사들이 자주 정교분리의 원칙을 주장함으로써 외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한 데 원인이 있다. 혁명운동에 찬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오히려 이러한 시점에서 만약 기독교 신앙이 중국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자 한다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형세상 피하기가 어렵다고 믿었다. 물론 어떤 식으로 정치에 참여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국공분열, 곧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의 분열은 정치의 새로운 국면을 가져 왔다. 1927년 4월, 장개석 장군은 혁명군의 정치부를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당내의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면서 그들을 ‘혁명의 반역자’이며 ‘소비에트의 앞잡이(走狗)’라고 비판하였다. 국민당은 나아가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제지하였으며, 군법과 기율을 엄격히 집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학생연합들은 정치적 기능을 박탈당했으며 학생들이 개인적인 자격으로 입당 신청을 하는 것만이 허용되었다.17) 정부도 법례(法例)를 반포하여, 사회 치안을 유지하고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아울러 점거한 교회당과 학교, 병원들을 돌려주게 하였다. 1927년 5월 13일, 중앙정치부 상해 분국(分局)은 정부에 즉시 “인민들이 ‘제국주의 타도’라고 하는 슬로건을 잘못 이해하지 않게 그리고 외국인 혐오나 반종교적 의도 때문에 중국인과 외국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종교적 자유를 파괴하려 하지 않게 그들을 교육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18) 같은 해 7월, 중앙교육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교육주권회수’라는 이름 아래 파괴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앙교육부는 최근에 교회학교와 외국의 자본으로 설립된 학교들을 포함하여 국내의 모든 사립학교들에게 이미 공적 규정에 의거하여 등록하고 계속하여 존속할 것을 비준하였다. 시민이든 학생이든 어떤 사람도 어떤 이유에서도 교육주권회수를 구실로 삼아 사립 교육기관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19)

이후로부터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동북(東北) 삼성(三省)을 점령하기까지 국면은 대체로 안정되었다. 절정에 달했던 1920년대의 반기독교운동의 물결도 일시적으로 나마 가라앉은 것으로 보였다.

비록 그러했지만 국민당 내에서 종교 자유의 문제는 다시 한 번 몇몇 지도자들에 의해 거론되어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28년 2월 중앙정치부의 128차 회의에서 장지강(張之江) 장군과 유영건(鈕永健) 장군은 ‘타도 종교’라고 하는 구호를 취소하기를 청원하는 제의를 하였다.20)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 자유는 임시 헌법에 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정부들이 공통적으로 공인하는 것으로서 중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또한 타도 종교라는 구호는 실제로는 고의로 정부 내부에 혼란과 분쟁을 만들어 내려고 한 공산당 당원들의 책략이므로 반드시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그 두 사람은 기독교 신앙 안에는 지금의 혁명운동에 매우 도움이 되는 혁명적인 교훈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동시에 자신들이 당을 위해 헌신하고 국가의 복리를 도모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에 힘입은 바 크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가 제국주의라고 하는 비판은 어떤 근거도 없는 것이 된다.

중앙정치부는 두 사람의 제의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은 보였다. 또한 지난해(1927년) 5월 반외세와 반종교 책동에 대응하여 국내에서의 종교활동을 보장한다고 하였던 중앙정치부의 결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21) 중앙정치부는 또한 동시에 타도 종교의 구호를 취소하는 것은 종교 자유를 허락하는 조례에 한 부분으로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제의는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국민일보(民國日報)》, 《각오(覺悟)》 그리고 《문사월간(文史月刊)》 등의 지면에서 논쟁이 이루어졌다. 비록 이번의 논쟁은 1923년의 ‘과학과 인생관 논쟁’과 같이 대규모의 것은 아니었지만 논의된 주제의 중요성에서는 결코 그에 뒤지는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국민당의 통치 아래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논쟁 중에 제기되었던 많은 기독교 비판 논리들은 이미 20년대 초반부터 제시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도구이며, 낙후된 종교이고, 반민족적이며, 비생산적이라는 것 등등이 그것이다. 그중 주요한 하나의 문제는 ‘기독교와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유(鈕)-장(張) 두 사람의 제안이 1928년 2월에 나온 이후 《각오》에 실린 일련의 몇 편의 글들은 그들의 입장을 공격하였다. 엽성(葉聲)은 〈종교 문제: 장·유(張鈕) 두 선생과의 대화(宗敎問題: 和張鈕兩先生作一個商榷)〉라는 제목의 글에서 정부는 국내에 있는 모든 종교 재산들을 몰수하고, 또한 승려들과 목사, 신부들을 사회 내의 생산적인 노동현장에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22) 그는 심지어 기독교를 공격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기독교는 이지(理智)의 검토와 사회적인 진보의 시험을 견뎌낼 수 없어서 필연적으로 쇠락하여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의 작가 원업유(袁業裕)는 〈‘타도 종교’라는 구호를 취소하는 문제를 논함(論取消打倒宗敎口號)〉23)이라는 글에서 모든 국민당 당원들은 마땅히 ‘삼민주의(三民主義)’로 종교를 대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엽성과 원업유 두 사람은 모두 중국에서 기독교가 항상 제국주의자들에게 이용되었다는 것은 무수한 역사적 사례로 실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종교는 국가에 대해 유익은 작고 해악은 많으므로 타도해서 마땅하다는 것이다.24)

기독교와 국민당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떤 당원들은 오직 당의 이익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장진진(張振振)은 〈나의 종교관(我的宗敎觀)〉이라는 글에서 종교에 의해 산출되는 모든 유익들은 당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오늘날 당원들은 나라를 위해 힘쓰는 데 바빠서 종교를 신앙할 시간이 조금도 없으며, 더욱이 당 내에 종교 조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종교를 포함해 모든 형태의 당의 활동들은 반드시 당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25) 그는 국민당의 유일한 지도자는 손중산이며, 손중산은 그 위대함과 학식에서 예수와 모세를 능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삼민주의가 기독교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적절하다고 보았다. 당시 국민당 내의 보편적인 추세는 손중산의 지위를 높여 당 내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적 인물로 만들고 더욱이 당규를 일체 행위를 심판하는 표준으로 삼아 당의 지배를 절대화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과 표현은 기독교 인사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국민당 일당 지배가 공고해져 감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국민당은 인민들이 당에 대해 충성심을 가질 수 있게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당화교육(黨化敎育)이 곧 이 시기에 탄생하였다. 1928년 5월, 당시 대학원 원장이었던 채원배는 남경에서 첫 번째 전국교육회의를 소집하여, 사립과 공립을 포함한 국내의 모든 학교들이 당화교육을 정규 과정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일부 국민당 지도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교육정책은 손중산이 《삼민주의》의 서문에서 말한 교훈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동지들이 이 책의 기초 위에, 내용을 확충하고 보완하며 또한 편집 체제를 바로 잡아 완전한 책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선전(宣傳)을 위한 교재로 삼아 주기 바란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를 복되게 함이 한량없을 것이다.26)

1928년 2월 대학원(the University Council)과 정치교육부(the Political Educational Commission)의 회합에서 통과된 교육재건에 관한 결의에서 이미 분명하게 언급된 대로 당의 사명은 “인민을 지도하여 국가를 재건하고, 동시에 그들이 《삼민주의》에 따르도록 교육하는 것”이다.27) 새로운 체제 아래에서 교육자들은 반드시 그들이 함께 중국에 근대화한 국민 정부를 수립하는 데 노력할 수 있게 학생들 사이에 민족의식과 협력의 정신을 배양해야 한다. 같은 결의안에서는 이전에 쓰이던 당화교육이라는 말이 잘 확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내력도 분명하지 않다고 하여 ‘삼민주의교육(三民主義敎育)’이라는 말로 대체하였다.28) 그전에 교육주권회수운동에서 주장되었던 ‘교육 사업이 전적으로 국가 정부의 관할에 속한 것인가?’라는 쟁점은 이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치교육은 학교생활의 정상적인(정규) 과정이 되었다.

1920년대에 발생한 반(反)기독교운동을 회고해 볼 때 우리는 민족주의가 실로 다양한 형태의 반기독교 표현들의 저변에 놓여 있던 지속적인 이념적 요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은 내부의 분열과 외부로부터의 침략이라고 하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으며 백성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인민들의 최고의 희망은 곧 나라가 하나가 되어 외부 열강에 맞서는 것이었다. 1922년 초 반기독교운동이 폭발했을 때 기독교는 서방 자본주의의 노복(奴僕)으로 비판받았다.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일부 진보적인 중국 청년들 중에 극도로 환영을 받고 있었다. 그중 어떤 이들은 곧 반기독교운동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시도하였다. 그 운동이 종교 일반을 공격하는 데로 확장되어 보편적인 반종교운동이 되었을 때, 기독교는 반과학적이며 반사회적인 것으로서 사회 진보를 방해하고 국가 중건 사업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매도되었다. 그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변호하고 아울러 기독교가 중국에 꼭 필요한 종교이며 그것이 국가의 발전 계획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오히려 종교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더 나아가 기독교는 서양 종교이며 중국 전통 문화와 무관하기 때문에 신중국(新中國)을 건설하는 데 그리고 그 형성을 위해서는 과거의 공동의 요소가 꼭 필요한 중국의 민족적 주체성을 정립하는 데 어떠한 공헌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서방의 선교 사업은 줄곧 정치 침략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대 기독교를 공격하는 문자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곧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맹우(盟友)’라는 것이었다. 불평등조약의 존재는 눈 속의 가시와 같이 항상 중국 민중들에게 중국이 받고 있는 치욕과 기독교의 전파는 선교조약의 보호 아래 진행되었으며 복음과 총칼은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중국인들의 서양 세력에 대한 적대감은 ‘오삼십참안’이 촉발시킨 연쇄 시위 행동 중에 남김없이 표출되었다. 당시 그 조약들의 폐지에 대한 요구는 필사적이었으며 정당한 것이었다. 일부 애국분자들은 더욱 일체를 고려하지 않고 폭력으로 외국인을 대하여 마치 의화단의 난 때의 한 장면을 재연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중국 각지에 퍼져 있던 여러 교회 학교들은 종교 교육은 다만 중국 청년들의 민족의식과 애국적 열성을 약화시킬 뿐이라는 매도 아래 많은 공격을 받았다. 민족주의 인사들의 마음속에서 기독교 교육은 국가 교육제도 안에 어떠한 지위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총괄적으로 말해 1920년대의 중국 사회는 강렬한 민족주의의 제약을 받고 있었으며, 민족주의는 당시 가치 판단의 표준이 되어 있었다. 모든 이론과 실천에 대한 평가 기준은 그것이 국가(민족)의 중건(재생)이라는 사명에 어떠한 공헌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었다. 정치적인 각도에서 볼 때 반기독교운동은 민족주의라는 정치적 ‘종교’로 기독교를 대체하고자 시도한 일군의 민족주의자들의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족주의운동의 종교적 측면은 국민당 정부의 통치 아래에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났다. 당시 당원들은 ‘손중산 선생’을 숭배하였으며 또한 《삼민주의》를 당의 경전(經典)으로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종교적 경쟁자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응전하였을까? 


미주  
1) 국민당의 북벌에 대한 종합적 서술로서, Immanuel. C. Y. Hsu, The Rise of Modern China, pp. 629-639.를 참조하라.
2) 王治心, 〈靑天白日旗下的基督敎〉, 《文史月刊》 제2권 제6책 (1927년 4월), p.1. 또한 招觀海, 〈國民政府下之基督敎〉, 《文史月刊》 제2권 제7책 (1927년 5월), pp.13-27.
3) H.T. Hodgkin, "Political Events of 1927 and their Effects on the Christian Church", China Christian Year Book (1928), p. 6.을 참조하라.
4) 7월에, 上海의 외무부 국장 郭泰祺는 南京의 미국 영사 John K. Davis에게 많은 군인들이 단순히 장개석 장군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Yip Ka-che, "The Anti-Christian Movement", p. 237.
5) Pearl Buck, My Several Worlds (New York, 1954), p.206., 그리고 M. Searle Bates, "The Ordeal of Nanking", World Call (1927년 5월), pp. 2-4.을 참조하라.
6) Latourette,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p. 820.을 참조하라.
7) H. T. Hodgkin, "Political Events of 1927 and their Effects on the Christian Church", p. 10.
8) Lutz, China and the Christian Colleges, p. 255.
9) F. P. Lockhart to the Secretary of State, December 5, 1925 (Department of State Archives) 참조. 여기에서는 Paul A. Varg, Missionaries, Chinese, and Diplomat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8), pp. 191-192.에서 轉引하였다.
10) C. L. Boynton, "The Evacuation and Return of Missionaries", China Christian Year Book (1928), p. 158.
11) F. Rawlinson, "Introduction: Reconstruction crises", China Christian Year Book (1928), p. 2.
12) 공산당과 국민당에 대한 선교사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Paul A. Verg, "Response to the Nationalist Revolution", in The Missionary Enterprise in China and America, ed., John K. Fairbank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p. 317-326.을 참조하라.
13) "Government Proclamations Affecting Christian Institutions", The Chinese Recorder  58 (1927년 7월), p.465.를 보라.
14) Shirley Stone Garrett, "Why They Stayed: American Church Politics and Chinese Nationalism in the Twenties", in The Missionary Enterprise in China and America, p. 292.을 보라.
15) Francis C. M. Wei, "Viewpoints on the Present Situation: Some Aspects of the Relation of the 'People Revolution' to the Christian Movement", The Chinese Recorder 58 (1927년 3월), p.219-220.을 보라. 
16) H. T. Hodgkin, "Political Events of 1927 and their Effects on the Christian Church", p. 13.
17) 1928년 2월에 있었던 제4차 국민당전인회의의 선언문을 보라. H. C. Tsao, "Nationalist Movement and Christian Education", p. 184. 또한 "Order of The Nationalist Government Regarding Discipline of Student", Educational Review 21 (1929):197-198; 그리고 "To Provincial and Municipal Educational Presidents of Government Universities", Educational Review 20 (1928): 394-395.를 보라.
18) H. C. Tsao, "Nationalist Movement and Christian Education", pp. 183-184.에 인용되어 있다.
19) Ibid. 
20) 〈鈕-張提議實行信敎(仰?)自由〉, 《郇報》 (1928년 2월 18일). 
21) Educational Review 20 (1928), p.196.에 실려 있는 중앙정치부 답변의 전문을 보라. 
22) 葉聲, 〈宗敎問題: 和張鈕兩先生作一個商榷〉, 《文史月刊》 제3권 제5책 (1928년 3월), pp.49-52.
23) 袁業裕, 〈論取消打倒宗敎口號〉, 《文史月刊》 제3권 제5책 (1928년 3월).
24) 袁業裕, 〈對於張鈕提案之商榷〉, 《文史月刊》 제3권 제5책 (1928년 3월).
25) 張振振, 〈我的宗敎觀〉, 《文史月刊》 제3권 제5책 (1928년 3월), pp. 56-60.
26) 孫中山, 《三民主義》 (初版 1924, 台灣 正中書局 ; 1976, 台十九版), 〈自序〉. trans. Frank W. Price (Shanghai: Commercial Press, 1928), p. xii.
27) H. C. Tsao, "Nationalist Movement and Christian Education", p. 188.을 참조하라. 
28) 삼민주의 교육의 내용에 대한 분석과 연합에 의해 승인된 자세한 도서 목록은 Cyrus H. Peake, Nationalism and Education in Modern Chin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32), pp. 176-180.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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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