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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번 호는 ‘중국사역자가 읽어 주는 인생책’이라는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발행인 통신’ 코너에서 언급된 것처럼 코로나19로 인해 일선에서 활동을 하기 어려운 때 책을 읽으며 성찰과 다짐과 나갈 길을 조망하자는 뜻으로 마련된 특집입니다. 특집을 준비하면서 중국사역에 도움이 되는 양서들이 많다는 생각과 앞으로 더 좋은 책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울러 중국사역자가 읽어 주는 인생책을 통해 중국사역자들의 중국 영혼을 향한 여전한 마음이 우리 웹진 독자들에게도 따뜻하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2019년 12월 12일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강타하는 시기에 다시 이 책을 들었다. 고통받는 수많은 영혼들이 성경 욥기 말씀을 읽는다. 욥기가 고통의 궁극적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읽어도 고난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욥이 고난을 통해 온전해졌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논점을 흐리게 만든다. 그 이유는 욥은 고난을 당하기 전에 이미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 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그런데 이 온전한 욥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당했다. 자신의 고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그런 적도 없었고 그럴 리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욥도 당신이 복을 주고 형통하게 해 주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가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라도 건든다면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인간도 당신 자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소유에 대해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인간의 소유와 관련된 재앙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 같지만 이는 사탄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사탄의 마지막 내기는 인간의 육체였다.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고 건강마저 잃었다. 욥의 인생은 아무 경고 없이 갑자기 엄청난 대혼란에 빠졌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때 욥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나타내지 않으셨고, 그 어떠한 약속도 주지 않으셨다. 그가 겪은 고난은 절망스러울 정도로 하나님과 모순되어 보였고, 자신의 신조와도 어긋났으며, 사탄의 조소가 옳은 것으로 증명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의 신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분을 온전히 믿는 자들에게 복을 베푸시고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온전치 않은 사람은 형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자신에게 재앙이 계속 닥쳐올 때 혼란에 빠졌고 그의 신조는 물거품이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실 때를 보면 당장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기도 하시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도 하신다. 사실 인생의 근원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욥기에서 우리를 위해 조명되고 있다. 욥기 13장 15절은 욥이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포기한 것 같아 보인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기 13:15). 이것이 욥의 믿음의 한계선이었다. 욥이 하나님에 대해 믿었던 모든 것, 즉 그의 신조는 고난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또한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만의 신조로 욥을 몰아붙였다. 욥은 그가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끝없는 의문 우리는 욥과 같은 문제에 빠질 때 마치 그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안다는 듯이 말하는 욥의 친구 소발과 빌닷과 엘리바스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네.” 그러나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깊은 문제를 겪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조용히 입 다물고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많은 말이 아니라 말없이 전달되는 마음이다. 위로자가 있어야 하는 자리는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라 말없이 벗이 되어 주는 자리이다. 고난당한 자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 자리이다. 그리고 기다리며 지켜봐 주는 것이다. ‘위대한 일들’은 언제나 기도를 통해 성취된다. 공평한 저울을 가진 판결자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을 받아들인 후에 물리적인 우주의 질서를 본다면, ‘하나님의 우주적인 굴절’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을 보면 굴절되어 보인다.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을 왜곡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으로는 하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온전한 실제를 보길 원한다면 만사의 근원에는 뭔가 잘못된 것, 즉 굴절이 있다는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궤도에서 벗어나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롬 8:19)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를 정상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람의 이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틀렸음을 깨닫게 될 때 큰 고통을 느낀다.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욥 9:14-15). 그리고 여기서 욥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2-33).
“내 신조와 관점, 지식, 어떤 경험으로도 이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욥을 이 고백 앞에 내몬 것은 다름 아닌 ‘비통’이었다. 기쁨이나 형통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오직 비통만이 이러한 일을 해낸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요소는 바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신”(사 53:10) 부분이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욥 10:20-21). 욥은 “자신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 주셔서 잠시나마 평안하게 해 주지 않으시면 죽음 외에는 피할 길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집요한 추적 욥은 친구들이 하나님의 영예를 위한다면서 거짓을 말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신학을 앞세우는 사람은 자신의 관점을 일관되게 지켜 나가기 위해 거짓을 말하게 된다.
이사야서에서 예수님을 묘사한 말씀을 보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욥은 자신에게 최악의 일들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느꼈고 자신 역시 진실했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지금 나는 뭔가를 잘못해서 벌을 받고 있어”라거나 “지금 나는 더 완벽해지려고 고난을 받고 있는 거야”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이러한 고통의 순간에 구약 전체에서 믿음에 대한 가장 고상한 발언을 한다. “주님이 저를 죽이시더라도 저는 여전히 주님을 신뢰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이것을 붙들 것이며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자물쇠와 열쇠 우리는 삶과 인격으로 진리에 가 닿는 것이지 논리나 과학적인 서술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때 그 상황을 논리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면 길이 열린다. 우리는 생각을 깊게 함으로써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일을 행함으로써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했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했나이다”(욥 42:3). 만일 우리의 철학을 이성 위에 세운다면 우리는 잘못된 철학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철학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 위에 세운다면 삶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죄는 인간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푸실 수 있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친히 담당하여 풀어내셨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죄로 끊어졌던 하나님과 관계를 이어 주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묵상하며 날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은 회개를 통해서만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고난의 선물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향해 통렬하게 책망하셨다. 종교적인 교사는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이 왜 고난을 당하는지 말해 줄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한 실체를 만날 때, “너는 나에 대해 옳게 말하지 않았다”라는 질타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책망받을 때, 욥의 친구들은 바른 태도를 취함으로써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님에 대해 옳게 말하려면 반드시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이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유가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살다 보면 무책임해 보이는 큰 실수들과 말과 그로 인한 재난이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에 대해 다 책임져 준다고 계시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서 말이다.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하셨다. 일터에서 기도하라. 하나님이 동료들의 삶에 간섭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구속을 우리의 삶의 기반으로 삼으셨다. 우리가 그 기반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예는 기도의 응답과 맞물리게 될 것이다. 전 세계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두려운 이때, 기도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기를 소망한다. 부르신 그곳에서….
권서인 |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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