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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韶州)를 떠나 남경으로 1595년 4월 18일 마테오 리치 일행은 시랑(侍郞) 석씨가 타고 북경으로 가는 관선에 편승하여 소주(韶州)를 출발하여 감주(贛州)로 향했다. 도중에 공수(貢水)와 장수(章水)가 만나는 십팔탄(十八灘)의 강한 물살과 암초로 인해서 배가 조난을 당했다. 마테오 리치는 물에 빠졌다가 구조되었으나, 수사 바라다스(若望, Barradas)가 익사했으며 석시랑(侍郞)의 짐도 물에 젖어 손실이 매우 컸다. 석시랑 일행은 길안(吉安)에서 수로를 포기하고 육로로 북경까지 가기로 하면서 마테오 리치는 소주로 돌아가도록 권유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인들이 너무나 귀하게 여기는 프리즘을 선물로 제공하면서 가까스로 석씨의 동의를 얻어 남경까지 동행 허락을 받았고, 5월 31일 마테오 리치는 남경에 도착했다.
마테오 리치는 이후 보름가량 남경에 머무는 동안 거류 허가를 받기 위해 애썼다. 마테오 리치는 광동(廣東)에서 교분이 있었던 남경공부시랑(南京工部侍郞) 서대임(徐大任)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으나 성내 체류에 대한 도움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빨리 떠나라는 답만 들었다. 당시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 명나라 원군이 조선으로 파견되어 있는 상황에서 외국인인 마테오 리치의 남경 체류를 지원할 수 없었다.
남경을 떠나 남창(南昌)으로 마테오 리치는 부득이 남경을 떠나 뱃길로 6월 28일 남창에 도착했고, 지역 상류층과 자연스럽게 교제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 배경으로는 우선 남창이 마테오 리치와 친분이 깊었던 구태소(瞿太素, 이름: 여기[汝夔])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구태소는 남창에 분봉된 건안왕(建安王)의 아들과 자신의 딸이 혼인한 관계였고, 아울러 자신과 가문의 명망이 알려져 있어서 이 지역 문인, 고관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있었다. 그의 추천으로 지역 인사들과 교제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로는 마테오 리치가 강서성으로 옮겨간 후 사람들이 싫어하는 승려의 칭호와 승복 대신 유학자 복장과 용어로 사교계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는 석시랑 일행과 함께 남경으로 가던 도중 강서성 장수진(樟樹鎭)에서 소주지부(韶州知府)를 만날 때 처음 유가 복식을 입었다. 종전에 승복을 입고 있을 때에는 냉담하고 차가운 대접을 받았지만 그들과 유사한 의복을 입은 후 환대를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복식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마테오 리치는 선교사였지만 일단 외면적으로는 유학자의 모습으로 중국 상층 사회와 보다 자유롭게 교유할 수 있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남창 거류와 선교활동의 전개가 가능하게 된 데에는 구여기와 친분이 깊은 두 사람의 도움이 대단히 컸다. 백록서원(白鹿書院)의 원장으로 지역에서 학덕이 높던 장황(章潢, 자는 本淸)이 구태소와 교분이 깊어 마테오 리치에 대해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테오 리치가 남창에 도착하자 순무 관아 관료들의 조사도 중재하여 쉽게 마무리하고 마테오 리치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직접 새 거주지 구매에도 나서 주었다.
강서순무 육만해(陸萬陔)도 구태소와 친분이 깊어 마테오 리치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고, 장황 등의 추천으로 그는 친히 마테오 리치를 접견한 후 남창에 거주하고 싶다는 마테오 리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육만해 순무의 마테오 리치에 대한 우의적 태도와 칭찬이 널리 전해지자, 성안의 이름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앞 다투어 마테오 리치 신부를 호의적 감정을 갖고 방문했다. 남창의 분봉 황족인 건안왕과 악안왕(樂安王)도 연회 자리를 마련하고 마테오 리치를 여러 번 초청하였다.
이를 통해 마테오 리치는 강서 지방의 상류층과 진귀한 선물을 교환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호적 상황 속에서 마테오 리치는 1596년 6월 28일 주택을 구입하여 이사함으로써 강서성의 정치 문화 중심지인 남창에 새로운 선교 거점을 열었다.
북경행 시도 순찰원 발리냐노는 이 소식을 접한 후 마테오 리치를 중국 선교단 감독에 임명하여 선교단활동 지휘의 책임을 맡겼다. 발리냐노는 동시에 선교단의 보다 발전적인 선교활동을 위해 북경에 선교 거점을 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발리냐노는 유화, 자명종 등 서양의 진귀한 것들을 모두 남창으로 보내어 마테오 리치로 하여금 북경 진입을 위해 사용하도록 지원했다.
이때 해직되어 해남도(海南島)에 있던 남경예부상서 왕충명(王忠銘)이 소주 남창을 거쳐 도성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해직되어 남으로 내려가던 중 마테오 리치와 만나 깊이 대화를 나눈 바 있었던 왕충명은 장차 마테오 리치와 북경으로 가서 중국 역법의 오류를 고치게 하겠다고 답한 적이 있었다. 남창에서 다시 만나 그에게 마테오 리치가 북경으로 가서 황제에게 예물을 바치고 싶다고 제안하자 왕충명은 기꺼이 자신과 함께 남경은 물론 북경까지 가자고 했다.
왕충명과 마테오 리치 일행은 1598년 6월 25일에 남창을 출발했고 남경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왕충명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황궁태감을 통해 황제를 알현하고 외국 예물을 드리겠다는 선교사의 요청을 전하여 올릴 수 있는지를 탐문했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왜란 정황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기에 위험을 감수하며 나서기 곤란하였다. 결국 마테오 리치와 곽거정은 북경에서 머문 지 2개월 만에 운하를 타고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되어 물길이 얼어붙었기 때문에, 배가 임청(臨淸)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마테오 리치는 곽거정을 남겨두어 짐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육로로 소주(蘇州)로 가서 구태소를 찾았다.
다시 남경으로 마테오 리치는 구여기의 도움으로 여독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한 뒤 구태소를 따라 1599년 2월 6일 남경에 도착했다. 마침 조선에서의 왜란이 끝나고 남경 사회 또한 안정을 되찾았다. 남경예부상서 왕충명은 마테오 리치를 극진히 대우하였고 그에 따라 남경의 고급 관원들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남경형부상서 조참로(趙參魯), 형부시랑 왕초(王樵), 호부상서 장맹남(張孟男) 그리고 이후 북경의 내각대학사로 승임한 예부시랑 엽향고(葉向高) 등이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성안에서 자유롭게 왕래하고 또 관아를 방문할 수 있었다.
마테오 리치는 구여기의 소개로 남경 학술계의 명망가들 즉 이심재(李心齋), 축세록(祝世祿), 왕긍당(王肯堂), 장양묵(張養黙) 등과도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남경에 파견한 군정 사무의 최고 장관인 위국공(魏國公) 서홍기(徐弘基), 풍성후(豊城侯) 이환(李環) 그리고 태감총관 풍보(馮保) 등과도 연회나 모임에 초청을 받아 교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마테오 리치는 여러 상류층 인사들의 비호 속에서 어려움 없이 남경에서 선교 근거지를 찾아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소주(韶州)를 떠난 후 복장을 갈아 입은 일과 구태소의 도움 덕택에 강서성의 수도 남창에서 그리고 당시 명나라 문화의 중심이기도 한 배도(陪都) 남경에서 상층 주류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을 얻을 수 있었다.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