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3  통권 211호     필자 : 문석윤
[오늘의 중국교회]
중국 신학의 건설: 문화이원론(文化二元論)-네 번째 입장 외
-1920년대 반(反)기독교운동에 대한 중국교회의 대응-

지난 목차


서론

Ⅰ. 종교 문제
1. 종교에 대한 물음: 중국에 종교가 필요한가?
  1) 감정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2) 초월의식을 종교의 기원으로 보는 입장
  3) 구원의 길로서의 과학
2. 기독교의 대안: 중국은 어떤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1) 신문화운동과 기독교
  2) 중국 기독교인들은 신문화운동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
  3) 새로운 종교(新宗敎)의 건설
   <‘종교 문제’에 대한 당시 몇몇 교회 지도자들의 논점>
   <신종교 건립의 배경>
   <신종교와 과학 사조의 관계>
   <신종교와 민주 정신의 관계>

Ⅱ. 그리스도 중심의 메시지
 1. 근대 기독교 복음 메시지에서의 변화
 2.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론(호교신학)의 등장
  1) 예수의 인성(人性)과 그의 인격
  2) 예수의 신성(神性)과 그 행한 초자연적인 기적들
  3) 예수의 사역
  4) 예수의 가르침의 현실적 합성
 3. 신학적 평가

III. 기독교 신앙의 본색화 문제
 1. 본색화를 위한 노력을 촉진했던 힘들
 2. 오사운동 시기 지식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태도들
 3. 본색신학의 건설을 향해
  1) 중국 문화 속에 기독교 신앙이 선재하여 있다는 입장: 진리의 동일성
  2) 문화들의 조화와 융합을 모색하는 입장
  3) 기독교가 중국 문화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해 준다는 입장
  4) 어떤 방식으로 기독교는 중국 문화를 온전하게 할 것인가? 어째서 중국 문화는 온전하게 될 필요가 있는가?



5) 문화이원론(文化二元論): 네 번째 입장
북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였던 왕명도(王明道)1)는 본색 신학의 지적 주류에서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는 1930년대에 기독교 예배소를 설립했으며 주변에서 가장 많은 중국인 신자들을 모았다. 사회적 무질서와 정치적 불안정의 시기에 그의 보수적 메시지는 기독교회 신도들에게 적지 않은 영적 갱신과 정신적인 위로를 제공해 주었다. 왕 목사 자신이 편집한 계간지 《영식계간(靈食季刊)》은 신도들의 일상생활 문제에 대한 실천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많은 글들을 발표하였으며, 당대 중국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대항하여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왕명도의 본색 신학 노선은 그 자신의 역사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세상과 교회는 그 본성과 조직에서 구별되면서 확정된 종말을 향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는 두 가지 서로 경쟁하는 힘들이다. 세상은 사탄적인 권세의 조종 아래에 있으며 어느 곳이든 모두 부도덕과 불경건(不敬虔) 속에서 진리에 반하여 생활하며 하나님께 반기를 든 죄인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2) 그처럼 전적으로 타락한 사회는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도 가지지 못한다. 왕명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세상은 지속적인 타락 가운데 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세상 속에는 문명화한 나라도 있고 야만적인 나라도 있으며,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도 있고 가난하고 약한 나라도 있으며, 민덕(民德: 국민의 수준)이 고상한 나라도 있고 저급한 나라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들 중 강포(强暴)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을 개선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저들이 패역하여 하나님께 반기를 든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정의롭고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기로 예정해 놓으셨다.3)

인생의 덧없음과 세상의 부패한 상황은 왕명도가 기독교 신앙과 중국 문화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결코 전통 문화의 가치들을 보존하거나 개혁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하나님이 인류 문화 속에서 어떤 활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자기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시게 될 것인데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는 또한 우리들이 이 사악한 세대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 속에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던 것과 같다. 그렇다면 왕명도는 어떻게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였는가?

왕명도의 해결 방법은 장차 있을 교회의 영광스러운 승리에 대한 그의 소망 속에서 발견된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보혈로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교회는 장차 자신의 흠과 주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것이다.4) 왕명도가 보기에는 인류의 역사 중에 오직 구속(救贖)의 역사만이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비록 죄악의 세계 중에 처해 있지만 그것의 조직과 임무와 운명은 사회와는 완전히 달라서 결코 함께 나란히 논할 수 없다. 그의 교회관은 강력하게 종말론적이었으며 저 세상을 지향하였다. 왕명도의 신학적 이원론은 하나님 앞에 마주 선 개인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아들 됨은 교회 내의 믿는 이들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진다. 세상 속의 불신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적(敵)일뿐이다.5) 이러한 두 가지 대립하는 그룹 사이의 접촉은 오직 복음전도 사역에 제한된다. 만약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 사이의 교류의 유익함도 또한 많지 않다. 기독교인들은 세속에 물들어서는 안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

인류 역사의 배후에는 두 가지 서로 대항하는 세력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으니 하나님(上帝, 神)과 사탄, 빛과 어두움이 그것이다. 복음주의의 주제에 대한 왕명도의 저작은 하나님과 사탄, 빛과 어두움이 인간의 무대 뒤에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호전적 용어로 가득 차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 문화는 그 유장한 발전 과정에서 세상의 죄악에 찬 활동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그것과 융합(조화)하거나, 혹은 그것의 부족을 보충하여 온전하게 하여 주거나 할 방법은 없으며, 오직 그것을 향해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마치 신랑이 신부에게 그러하듯이 교회에 배타적으로 속해 있으며, 교회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도록 부르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임무를 짊어지고 있다.6) 왕명도는 만약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인간의 마음이 먼저 변화되어야 하며, 이러한 순서는 뒤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변화된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당시 일부의 신파(新派) 신학사상을 택한 이들이 애써 사회 건설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하였으며 아무런 실효도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의 모든 악한 풍습들이나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제도들을 개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의 기능은 한 사람이 믿음으로 새롭게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창조된 사람은 신의 길을 본받아 죄에 속한 것들을 미워할 것이며 거룩하고 선한 것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이 그 내면에서 이러한 철저한 변화를 체험하고 난 후에는 모든 외적인 죄들과 악한 것들이 완전히 소거될 것이다. 사회가 한 사람의 참되게 거듭난 기독교인을 더 가지게 될 때 그것은 실제로 덕 있는 구성원을 증가시킨 것이 된다. 복음은 사회 개혁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한 사람이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회는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7)

왕명도의 기독교 예배소는 자리(自理)·자양(自養)·자전(自傳)이라고 하는 본색화운동을 추진하였으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20, 30년대에 사회의 일반 평민 대중에게 그것이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신학사상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문화에 대한 그의 편견은 본색화한 신학사상을 형성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바꾸어 말하면 왕명도의 본색화는 곧 기독교를 전통 문화와 큰 관계가 없는 하나의 종교생활 방식으로서 중국인들에게 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8)

그의 신학 방법은 《성경》으로부터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들과 관련된 증거가 되는 텍스트(구절, 말씀)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영감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었기 때문에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에 우선권이 주어졌다. 《성경》의 권위는 무오류적인 영감에 의지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는 《성경》에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영원한 진리의 구현체로서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성경》은 사람들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본다. 성도(聖徒)들과 죄인들, 거룩한 이들과 속된 이들이 그것이다. 죄악에는 문화의 구별이 없다. 미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죄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동일한 복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의 보편성은 특수한 중국 문화에 연결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가지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원하면서 동시에 시의적절한 말씀이 신학상의 본색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앞에서 서술하였던 세 번째 패턴의 본색화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이 중국 문화의 흠결을 보충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면, 지금 여기 왕명도의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곤란(문제) 자체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9)

근대 중국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왕명도가 출세간(出世間)적 복음을 주장한 이외에, 더하여 일종의 종교 도덕주의를 제창하여 과도하게 행위와 인격의 수양을 중시함으로써 구원론에서 은혜의 지위를 무시하는 데 이르렀다고 생각한다.10)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치우친 것으로서 왕명도가 《중생진의(重生眞義)》라는 책에서 다룬 논점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이다. 왕명도는 칭의(稱義)와 성화(聖化, 成聖)의 교의를 나누어 한편으로 믿음에 의한 칭의(因信稱義)의 원칙이 구원의 근거임을 주장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신도들의 칭의 후의 삶의 태도를 강조하여 그의 행위와 품덕(品德)이 부르신 은혜에 합당하게 눈으로 볼 수 있는 필수적인 중생(重生)의 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결코 중생의 뿌리는 아니며 중생의 열매일 뿐이라는 것이다.11) 왕명도가 비록 신학상 신파(新派)의 인사들이 사회 개혁을 진행하여 세상에 천국을 건설하고자 한 계획에는 찬동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신도들의 일상생활의 문제를 가볍게 무시했던 것도 결코 아닌 것이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도덕주의를 주장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신파 인사들의 사회 혁신에 반대하였겠는가. 왕명도는 참된 기독교적 삶의 가시성을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거듭남(중생)의 상징으로서 강조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거듭남에 앞선 것이 아니며 그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그는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깊이 믿었다.12)

총괄해서 말하자면 왕명도의 신학사상에서 우리는 신앙과 이성, 교회와 세상,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대적자들, 개인 복음과 사회 복음 사이의 지속적인 이분법(대립)을 목격한다. 이러한 문화이원론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일종의 수도원적 은둔의 태도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관념을 형성하기 쉬우며, 사회에 대한 참여와 배려의 행동을 결핍하게 만든다. 그의 입장의 단점은 그가 문화에 대해 가진 개념이 매우 협소하여 하나의 비교적 온전한 기독교적 입장을 가질 수 없었으며 여전히 19세기 선교사의 정신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13)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구원론은 매우 명쾌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획에 앞선 창조의 교리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시하고 말았다.

6) 기독교가 문화를 심판한다: 다섯 번째 입장
본색화 방법에서 또 하나의 노선을 제창한 이가 중국 남방에서 이름 높은 문단 괴걸(怪傑) 장역경(張亦鏡)이다. 장역경은 신학적으로는 왕명도처럼 보수적이었지만 중국 문화에 대한 견해에서는 좀 더 적극적이었으며 변증적인 노력에서는 좀 더 포괄적이었다.14) 그는 중국의 고유문화 중에 취할 만한 점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적 중국 기독교인들과는 다르게 그는 중국 전통에 대한 자신의 세밀한 검토에서 동정적이라기보다는 좀 더 비판적이었다.15) 전통사상을 분석할 때 그는 특별히 기독교와 중국 문화 사이의 차이를 지적하였으며, 기독교 신앙을 표준으로 삼아 중국 문화의 가치를 형량(衡量)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강조는 또 하나의 본색화 패턴을 특징짓는다.

장역경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는 중국 문화의 심판관으로서 그것을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속으로 들어가도록 할 수 있다. 그의 보수적 신학은 왕명도가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문화 연구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았다. 왕명도의 변증론은 성경에 집중하여 그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강조하였지만, 장역경은 중국의 역사와 문헌에 대한 정통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고전학자들과 변론을 진행하였으며 상대방의 약점을 지적해 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혼자 힘으로 하나의 호교(변증) 노선을 창출해 냈으며, 《진광잡지(眞光雜誌)》에서 기독교가 중국의 전통 문화사상을 하루아침에 개조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자신의 뜻을 충분히 표현하였다.

장역경은 중국 문화 역사상에서 하나님의 활동의 현존을 볼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원 모두에 걸쳐 주인으로서 인류 역사 진전의 방향을 영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본색 신학의 건설상에서 이러한 양방면의 원칙은 어느 것도 폐지할 수 없다. 비록 죄악이 세상 사람들의 문화 창작을 파괴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 때문에 인류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여전히 계속해서 인간 세상에 햇빛과 비를 내리신다. 하나님의 지혜는 역대 성현의 교훈들 속에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송대(宋代) 이학(理學)의 연구 중에서 주희(朱熹)는 우주의 기원 문제에 대해서, 우주가 아직 생성되기 이전에 이미 이(理)의 존재가 있으며 다원적인 세계 현상의 이면에는 ‘태극(太極)’이라고 하는 그것의 최종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장역경은 이러한 철학 이론은 만물에 앞서 존재하는 ‘도(道·로고스·말씀)’에 관한 〈요한복음〉 1장 1-3절의 계시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6)

그렇지만 장역경은 또한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이미 인간의 사상 활동에 깊고 넓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중국 문화 전통 중 최고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진리를 수용하는 인간의 기관(감성과 이성)은 왜곡되었으며 그의 시력은 흐려졌다. 중국의 과거의 성인(聖人)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참 빛에로 모아져야 할 가물거리는 빛만을 가졌다. 이렇게 희미한 진리들은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결코 실현할 수 없으므로, 중국문화는 구원의 기초를 건립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계시를 필요로 한다.

장역경은 해와 달의 비유를 사용하여 예수와 공자를 비교하였다.17) 예수가 태양과 같아서 그 빛이 고유하며 강렬하다고 한다면, 공자는 달과 같아서 그의 빛은 태양 빛의 반사일 뿐 그 자체에는 광채를 전혀 가지지 못한다. 오뢰천(吳雷川)이 예수와 공자를 동일한 인간의 범주로 바라보았고, 조자신(趙紫宸)이 예수를 인간 무리 중 가장 걸출한 초인(超人)으로 보았다고 한다면, 장역경은 예수와 공자의 차이는 신(神)과 인간 사이의 차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본질상의 차이이며, 단지 정도상의 차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엄청난 주장들, 권위 있는 가르침들, 기적적인 행적들 그리고 그가 한 예언들이 실현되었다고 하는 사실 등은 인간의 형상 속에 현현된 그의 신성(神性)의 비교할 데 없는 증거이다. 공자는 중국 역대의 일반적인 성현들과 마찬가지로 ‘도(道)’라고 하는 참된 진리를 알고자 소원하였으며 또한 지모(智謀)를 다하여 그것을 찾았으나 신의 특별한 계시의 도움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공자는 종교 혹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시종일관 일종의 불가지론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그가 찾았던 도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이다.18) 만약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태도로 도를 갈망하였다고 한다면, 그의 제자들은 마땅히 천지(天地) 간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공자의 지혜는 높았지만 그의 한계 또한 명백하다. 그것은 가장 탁월한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단지 인본주의적 합리성에 기초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보름달의 환하게 빛나는 빛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가장 저열한 수준에서는 충분한 증거가 부족한 억측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비유하자면 이지러진 달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장역경의 사회관은 왕명도에 비하여 적극적이었다. 세상은 결코 도피해야 하거나 제거되어야 할 이교도(異敎徒)의 영역이 아니라 복음의 개혁적인 힘이 발휘되어야 할 사역지이다. 만약 불신(不信)의 세계가 없다면 전도하고 증인이 될 성도들도 필요가 없다. 장역경의 변증론(호교 공작)은 선교적 열정으로 유명하다. 그는 당시 유학자(儒學者)들에게 자신들의 유교에 대한 관심과 존경을 포기하지 않고도 기독교를 신앙할 수 있다고 격려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들을 억압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들 속에도 진리가 완전히 결여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에 의지하여 중국 문화를 변혁한다는 것은 “꽃을 사랑하는 자들을 태양 빛에로 인도하는 것”19) 혹은 달빛을 햇빛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공자(孔子), 노자(老子), 부처(佛陀)에 대한 존경은 그것이 종교적 숭배가 되지 않는다면 허용될 수 있다.20) 그렇지만 장역경은 오뢰천과는 달리 고대의 성현들의 가르침 속에 이미 기독교의 도리(道理)가 들어 있다고 하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유사하다고 해서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신들의 형이상학적 구조에서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결코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단지 그 둘이 모두 이타적(利他的)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예수를 중국의 묵자(墨子)와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치게 견강부회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21)

장역경의 신학적 입장은 그의 인식 방법(인식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교 사상의 인식 방법은 그 출발점을 인간과 자연에 두며 힘써 위에 있는 하늘의 도를 발견하는 데로 나아가는 반면에, 기독교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주동적인 계시로부터 출발하고 그런 후에 인류 역사와 관계를 발생시킨다고 생각하였다.22) 만약 단지 암흑 중에 행하는 인간의 눈 먼 탐색에만 의지한다면 참된 신의 실재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절대로 없으며 오히려 다신론(多神論)을 초래할 뿐이다. 중국인들의 종교적 체험 속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종교적 다신론은 그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예기(禮記)》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신령(神靈)들이 인간 세상에서 활동하는 정황을 묘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장역경은 이러한 다신(多神) 관념은 기독교의 일신론(一神論)에 의해 교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23)

인간이 자신의 역량을 다함으로써 천지(天地)와 화해를 이루어 자연계 속의 모든 존재가 번성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중용(中庸)》의 논점에 대해서도 장역경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24)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주 속의 질서와 자연 속의 번성은 자신의 창조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적 활동들이며 결코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우주의 법칙은 인간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유교 전통의 인본주의적 정신은 당시 진환장(陳煥章)이 공교(孔敎: 유교)를 국교(國敎)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한 편의 연설 속에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진환장은 “도가 인간을 흥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를 번성하게 한다.”고 주장했다.25) 장역경의 견해는 그것과 정반대의 것으로 인간의 성취는 전적으로 도(道)가 인간의 마음 내부에서 역사하고 인도하는 데 의지하며. 이 도는 곧 〈요한복음〉 제1장 1절에서 3절에서 말씀한 것으로서 역사상 일찍이 인간을 향해 계시하시는 신이다. 그 신은 인간의 행위를 심판하시니 일체의 보상과 처벌은 모두 그에게 달려 있다.26)

민족적 위기(국가 정치적 위기)에 대해 논하면서 장역경은 매우 적극적인 관점을 취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은총과 심판을 동시에 시행하실 수 있다고 믿으면서 중국의 전도(前途)에 대해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서방의 기독교 국가들이 기독교 때문에 강한 것이라거나, 중국이 마땅히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국력을 증강하고 정책을 개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찬동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국가 재건 사업은 먼저 개인과 공동체의 지평에서 개혁을 진행하여야 하며, 그러한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이 선결조건이라고 깊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를 믿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인격적이고 자연적인 수준에서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그 국가가 강하거나 약하거나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27)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기주의를 이타주의에로, 이기심을 헌신과 희생에로, 그리고 착취(침략)를 봉사(섬김)에로 전환시키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 도덕(선)을 제창하고, 죄악을 멸절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지만 동시에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은 인간의 일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이다.

4. 신학적인 공통 기반, 공통된 원칙
신학의 본색화 문제는 복합적인 동시에 애매모호하다. 이 장(제3장)에서는 중국 기독교 발전사의 한 시기에 교회가 이 ‘유구한 문제’28)에 대해 제시했던 답안들을 연구하고자 시도했다. 그 문제는 본성상 최종적인 해결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서 본색 신학의 건설은 하나의 기나긴 과정이다. 본색화 신학은 적어도 세 가지 측면의 지적인 노력을 포함한다. 즉 기독교에 대한 정의(定義), 문화의 정체성 확인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결합으로서 그 문화 속에서의 기독교의 표현이 그것이다. 이들 각각은 모두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에 따른 맥락을 전제한다.

19세기의 선교 사역들에서 문제는 서양의 그리스도에 의해 특징 지워진 기독교를 중국 문화에 대립하여(a Western Christ against Chinese culture) 설교함에 의해 크게 유발되었으며, 본토의 문화 전통은 무시되었다. 19세기 중엽 이후로는 선교 사역에서 겪게 된 비효율성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에 더하여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한 인식이 성장함에 따라 일부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복음 메시지를 다시 새롭게 검토하였다. 그들은 중국 문화 안에서 기독교 신앙과 실로 유사하여 취할 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a Western Christ of Chinese culture)을 강조하였다.29) 그 후 1920년대에 반(反)기독교의 도전은 본색교회운동을 자극하였으며, 신도들 중 지식인들은 호교(護敎) 사업을 진행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변증학(the Christo-centric apologetics)을 제시함으로써 전통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상에서 중국 문화와 일체화한 그리스도, 곧 ‘중국의 그리스도(Chinese Christ)’를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이 ‘중국의 그리스도’가 위기에 처한 민족(국가)을 능히 구원하여 주실 것을 소망하였다. 이 시기의 본색화 관련 저작들은 봄비가 내린 후에 온갖 새싹들이 다투어 자라나는 것처럼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것처럼 분분(紛紛)하였다. 위에서 서술된 본색 신학의 다섯 가지 패턴들은 본색화와 관련된 스펙트럼 거의 전부를 보여준다. 그것들은 본색 신학의 작업 모델들로 취급되어 질 수 있으며, 그것을 적절하게 다듬는다면 이후의 중국교회사에서 중국 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그 유구한 문제에 대해 투쟁하면서 제출한 의견들을 유형적으로 설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30)

그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오뢰천을 대표로 하여 기독교가 일찍이 이미 중국 문화 속에 숨겨져 있었고, 다만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기독교의 진리와 옛날 중국의 성현(聖賢)들의 유훈(遺訓)은 서로 잘 들어맞으며 기독교는 중국 정치와 사회의 중건(重建) 사업에서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조금 덜 과격하지만 왕치심(王治心)과 범자미(范子美) 또한 두 체계에서 교리적으로 조화할 수 있는 영역을 찾음으로써 기독교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유산을 보존하려고 시도했다. 문화적 노선의 다른 한 쪽 끝에서는 왕명도가 기독교 신앙을 높이 들어 올리고 전통 중국 문화의 유산을 무시하고 배제하였다. 그의 문화 이원론은 그 스스로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화해할 수 없는 긴장(충돌)을 수반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기독교 지식인들의 주류 사상은 오뢰천과 왕명도라는 두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 주류 지식인들의 입장들은 중국 문화 역사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였다. 조자신은 기독교가 중국 문화의 결핍을 보충하여 완성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면, 장역경은 중국 문화는 반드시 복음주의에 의지해 철저하게 개조(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본색 신학사상의 이러한 여러 유형(모식)들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신학 본색화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공통된 신학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어떠한 문화도 하나님의 구원사적 활동의 바깥에 놓여 있지 않다. 이는 다섯 유형들 모두의 기독교적 소망의 공통의 기초이다. 1920년대 중국의 정국은 중국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신의 은총에 의지하여 민족(국가)의 위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도록 하였다. 비록 왕명도는 세상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에 대한 그의 열성은 또한 그가 문화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왕치심이 주장한 문화 융화(融和), 범자미가 말한 중국 문화의 주기적 갱신과 오뢰천이 말한 국운중수(國運重修, 민족의 재건) 등은 이러한 확신을 더 명료하게 표명한 것이었다.

둘째로, 우리는 기독교에 대해 어떤 하나의 절대적 정의를 제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는 상대적이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장 완전하게 표현(해석)하였다고 하는 어떠한 주장도 단지 눈먼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 문화 내에서도 그러한 주장이 가능하지 않다면 문화를 가로지르는 선교적(宣敎的) 상황에서 그러한 가능성은 더욱 낮다. 어떠한 유형(모식)도 교회에 본색 신학 사상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본색화는 그를 통해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령(Missio Dei)을 수행하는 지속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일련의 전통 문화의 관념들을 기독교의 교리들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속의 계시의 독자적인 가치(독자성)를 말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장역경이 지적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 사이의 구분은 실제로 오뢰천과 같이 중국 문화와 기독교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문화적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오뢰천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변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중국의 성현들이 일찍이 이미 진리를 명료하게 알고 있었다면 중국인들은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필요로 하는 가? 사실 어느 정도까지는 왕치심과 범자미도 또한 이 질문에 대해 직면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었다. 즉 자신들이 주장한 문화 조화(융합)의 과정 속에서 기독교는 다만 그를 통해 중국 문화의 가치를 보존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도구)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셋째로, 비록 어떤 나라의 문화이든 모두 그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의 자취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문화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장역경은 세계 각 나라가 모두 문화적 회개를 진행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조자신은 유교의 여러 성현들이 비록 진리의 수행자였다고 할 수 있지만 또한 그들에게 부족한 부분도 적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어떠한 문화 체계도 그것이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존재를 승인한다면 이미 절대적 표준의 존재를 그 전제로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절대적 표준은 삶의 모호성 가운데서는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실존적 맥락들 가운데 만들어진 문화적 가치들을 심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고 있었을 때 중국 기독교인들이 그에 대하여 어떻게 그리스도를 근대 중국에 제시하려고 시도했던 가를 살펴보았다. 1920년대의 중국의 국가주의(민족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빛 속에서 전통적인 유산을 검토하고자 했던 중국 사상가들에게 주요한 자극제였다. 중국교회가 국가주의(민족주의) 자체에 대해 말할 것이 많았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미주  
1) 王明道는 1900년 北京의 전통적인 중국 가정에서 遺腹子로 태어났다. 原名은 王永盛. 그는 어려서부터 미션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14년 기독교 개종자가 되었다. 1927년 계간지인 《영식계간(靈食季刊)》을 창간하였으며 1937년에는 기독교 예배소를 건립하였다. 그는 보수적인 중국 기독교를 대표한다. 잡지를 통해 실천적인 기독교적 삶에 관한 많은 글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저작으로는 《五十年來》, 《重生眞義》, 《耶穌是誰》 등이 있다. 그는 1950년대 공산화가 된 중국 하에서 받은 순교적 고난으로 유명하다. 1991년 별세하였다.
2) 王明道, 《重生眞義》 (초판 1933; 香港: 宣道, 1967), pp.64-65.
3) 王明道, 《耶穌是誰》, p.3.
4) 王明道, 《基督的新婦》 (1926; reprinted ed., Hong Kong: Bellman House, 1970), pp.1-6.
5) 王明道, 《普世人類都是神的兒子麽?》 (1934; reprinted ed., Hong Kong:  Alliance Press, 1962), p.12.
6) 王明道, 《五十年來》 (1950; reprinted ed., Hong Kong: Bellman House, 1967), pp.71-73.
7) 王明道, 《眞僞福音辯》 (1936: reprinted ed., Hong Kong: Sung-en Press, 1963), p.5.
8) 그것이 王明道가 사회적 문제들을 대면하지 않았다는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접근으로부터 기독교적 삶에 관한 많은 글들을 썼다. 그의 《基督徒與婚姻》, 《信徒處世常識》, 《寫及靑年的基督徒》 등을 보라.
9) Cf. "Christianity and Social Change: The Case in China: 1920-1950", (Th.D. dissertation,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1971)에서의 Ng Lee Ming의 언급.
10) 예를 들어 Ng의 학위논문, pp.70-75.를 보라.
11) 王明道, 《중생진義》, pp.7-10; 그리고 그의 《五十年來》, pp.15, 20.
12) 王明道, 《人能建設天國麽?》 (1933; reprinted ed., Hong Kong: Alliance Press, 1962)
13) Hendrik Kraemer, The Christian Message in a Non-Christian World (3rd ed., Grand Rapids: Kregel Publications, 1956), p.316.
14) 張亦鏡의 많은 저작들 중에서 변증적 문헌에는 세 가지 노선이 있었다. 첫째, 그는 앞의 제1장에서 보여준 대로 과학과 민주의 관점으로부터 기독교를 반대한 젊은 지식인들에 대응하였다. 둘째, 그는 또한 그들의 견해가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불교와 도교 지지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셋째, 그는 기독교의 원리들로부터 유학자들과 토론하였다. 應元道, 〈中國基督敎著作解〉, pp.19-20.은 張亦鏡의 모든 저작들을 이러한 세 개의 영역으로 분류하여 열거하였다.
15) 張亦鏡은 중국의 전통적인 관습들과 실천들에 대해 異意를 제기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조상숭배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행하였으며 근대 중국 사회에서의 그것의 무익함을 선언하였다. 張亦鏡, 〈祭先源流考〉, 《眞光叢刊》(上海: 美華浸會書局, 1928) 제4부, pp.9-29. 유사하게 그는 淸明節에 관한 포괄적인 분석을 행하였으며 전통적인 墓祭를 대체할 기독교 추모예배를 제안하였다. 張亦鏡 〈淸明掃墓考〉, 《眞光叢刊》 제4부, pp.1-9.
16) 張亦鏡, 〈代友人答覆一老學究〉, 《眞光叢刊》 제2부, p.192.
17) 張亦鏡, 〈耶儒辨〉, 《眞光叢刊》 제2부, pp.32-33. 또 다른 글에서 張亦鏡은 ‘태양-등불’ 비유를 사용했다. 〈代友人答覆一老學究〉 p.180. 참고. 같은 글에서 그는 또한 ‘태양-언덕(famous hill)' 은유를 사용했다. p.218. 참고.
18) 張亦鏡, 〈耶儒辯〉, 《眞光叢刊》 제2부, pp.32-33.
19) 張亦鏡, 〈批評繆鳳林之非耶敎〉, 《評非基督敎言論》(《批評非基督敎言論彙刊全編》), p.221.
20) Ibid.
21) 張亦鏡, 〈耶墨辨〉, 《眞光叢刊》 제2부, p.37.
22) 張亦鏡, 〈讀陳煥章博士孔敎講義辯謬〉, 《眞光叢刊》 제2부, p.118.
23) Ibid., pp.128-129.
24) Ibid., pp.113-114.
25) Ibid., p.149.
26) 張亦鏡, 〈대우인答覆一老學究〉, pp.198-199.
27) Ibid., pp.218-219.
28) H. Richard Niebuhr, Christ and Culture (New York: Harper and Row Publishers, 1951), pp.1-3.
29) ‘문화에 대립한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와 ‘문화의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라는 용어들은 Niebuhr의 위의 책에서 사용되었다.
30) 예를 들어 우리는 공산 중국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관한 최근의 토론에서 이러한 패턴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기독교를 중국의 공산주의 문화와 연관 지으면서 어떤 중국학 학자들은 중국에서의 공산주의 재건을 기독교 하나님의 역사로 인식한다. 다른 학자들은 중국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적이라는 상반된 견해를 취한다. 이러한 두 가지 입장들과는 별도로, 新中國에서의 성취들을 신의 은총과 심판의 결합으로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심포지움 Christianity and New China (South Pasadena: Ecclesia Publication, 1976)을 참조. 그리고 Charles C. West, “Some Theological Reflections on China--I”와 “Responses” in China Notes 14.4 (Fall, 1976); West, “Some Theological Reflections on China--II” in China Notes 15.2 (Spring, 1977)을 보라. 더 나아가 "China: The Religious Dimension"을 주제로 하여 1977년 6월 29일에서 7월 2일까지 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참조하라.

 

 




사진 | 바이두 

문석윤 |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