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 대리 사역(1584년까지) 조경(肇慶)에서 루지에리의 조수 역할을 감당하면서 사역하는 동안 마테오 리치는 우선 중국사역을 위해 필요한 저작과 지도 제작 등 중국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한 일에 열성을 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선교를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중국어 학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루지에리가 조경을 떠난 있는 동안에는 현장사역 책임자로서 실제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나름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루지에리와 마테오 리치가 조경에서 교당을 건축하다가 부족한 재정 마련을 위해 루지에리가 마카오로 떠난 1584년 초겨울부터 그가 조경으로 복귀한 1585년 4월까지 마테오 리치가 조경사역의 책임을 대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심상치 않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마테오 리치는 무리없이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선교사들이 조경에서 관료들과 친분을 쌓고 교당 건물을 짓기 시작하자 불안을 느낀 주민들이 생겨났다. 하루는 교당으로 돌을 던지는 여러 어린아이들을 하인들이 잡아 왔는데, 이를 알게 된 마테오 리치는 불필요하게 사건이 확대될 수 있음을 주지시키면서 아이들을 즉시 풀어 주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선교사들이 아이를 몰래 마카오로 데리고 가서 노예로 팔려고 했다는 등 유언비어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그동안 적극 지원하던 지부 왕반조차도 이를 진실로 믿고 마테오 리치를 관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다행히 증인으로 소환된 3명의 노인은 사건의 전말을 있는 그대로 진술함으로써 선교사들에게 가해지던 혐의를 벗게 되었다.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지부 왕반은 향후 또 다시 외국인을 기만하는 일에 대해서는 엄한 처벌을 할 것이라고 고시하여 선교단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테오 리치는 성실히 소명하고, 인내하며 평화적으로 겸손하게 사죄하는 자세를 줄곧 유지하였는데, 이것이 이러한 좋은 결과를 가져온 요인으로 평가된다.
조경 책임 사역(1588년부터 1589년까지) 조경에서 마테오 리치가 두 번째로 선교단 업무를 맡게 된 것은 1588년 초여름 루지에리가 마카오로 떠난 이후 이듬해 8월 초 선교단이 조경에서 철수하던 때까지였다. 이 기간에도 선교단을 곤경에 빠뜨린 3건의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났으나 특유의 온건한 대응으로 위기를 잘 넘겨 나갔다.
첫 번째 사건은 앞서 서술한 교민 마틴(馬丁)의 연단술 사기 사건의 후유증이었다. 마틴은 관아에서 고문을 받다가 숨졌지만 그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연단술에 빠졌던 부자 두 사람은 분을 풀기 위해 선교단에 보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선교단 감독 상데(孟三德)가 마카오에서 조경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 생원들을 모아 반대하면서 그가 마카오로 떠나도록 압박하였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서는 그는 정면 대응보다는 정면 대응을 피하면서 반감이 누그러지기를 인내하며 기다렸다.
두 번째는 군중들의 교당 공격 사건이었다. 교당이 위치한 서강(西江)이 그동안 잦은 홍수로 범람하여 일부 제방이 무너지고는 하자 관아에서 주민들에게 나무를 베어 제방을 보수하도록 하였다. 제방 보수 공사에 동원된 일부 주민들은 강가에 위치한 교당으로 돌을 던지기도 하고, 심지어 교당 건물의 문, 창문, 가구, 지붕을 부수거나 자재를 뜯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는 사람들에게 비방받을 구실을 조금이라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직원들을 단속하여 인내심을 갖고 참아 내도록 하였다. 던지는 돌이 쏟아지는 데도 불구하고 갖고 있던 대나무를 사람들에게 내어 주면서 그것으로 무너진 제방을 복구하라고 간청하였다. 그 결과 불신자들도 그의 태도에 감동되어 투석을 멈추고 떠났다. 관아에서 교당 공격 사건 처리에 나섰을 때에도 마테오 리치는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처벌하지 말기를 거듭 요청하였고, 교당 공격을 금지하는 고시 정도만 내려 달라고 했다.
세 번째, 광주(廣州)에서 상당히 존망 받는 기숙(耆宿) 노인들이 연명으로 순안어사(巡按御史)에 선교사를 고발하는 탄원서를 올렸다. 선교사가 조경에 탑을 건립하는 사건이 마카오 주재 포르투갈인의 지지를 받은 것이며 그들이 조경에 거주하는 것이 국가에 큰 재앙이 될 것이므로 조경 관리에게 명을 내려 신속히 침입자들을 내좇아 마카오로 돌려보내라고 청원하였다. 광주 출신 기숙 노인들은 서양인들이 중국 연안에서 저지른 온갖 만행을 목도한 증인이었고, 그들은 평화적인 종교 전도자와 무장한 식민지 침략자 간의 차이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방선교사에 대한 적대감을 통해 고도의 경계심과 책임감을 표출한 것이었다.
광동 순안어사 채몽(蔡夢)은 즉시 이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였고, 책임을 진 조경부 장관의 조사에 직면한 마테오 리치는 냉정과 대외 교섭에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이 분쟁을 신속하게 풀어 나갔다. 그는 우선 종교에 헌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고 국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있다는 요지의 탄원서를 올려 의혹에 대하여 적극 해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조경부 동지 방응시(方應時), 영서도 장관 황시우(黃時雨) 등에게 삼릉경(프리즘)을 선물하는 등 사전에 교분을 충분히 쌓아 둔 것도 난국을 풀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방응시와 황시우 등은 고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조사 결과를 순안어사에게 직접 보고하여 사건을 수습하였다. 이와 같이 거듭되는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마테오 리치는 선교단 책임자로서의 지도력과 능력을 잘 보여 주었다.
조경으로부터 소주(韶州)로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경의 사역지는 너무 풍경이 좋은 곳에 있어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조경의 서양식 건축물이 너무 눈에 튀어서인지 선교단에 대한 원한을 품었던 탓인지 담군유(譚君諭) 등과 같은 현지 지식층이 신임 양광(兩廣)총독 유계문(劉繼文)이 조경으로 시찰왔을 때 유계문도 왕반과 마찬가지로 사적비를 세울 자격이 있다고 건의하면서 후보지로 교당이 있던 곳을 추천하였다. 교당이 있던 자리가 마음에 든 유계문은 선교사들이 내지 사정을 염탐하여 마카오 포르투갈인들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전파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카오로 복귀하든지 광동 북부 소주(韶州)의 남화사(南華寺)로 이동하여 외부와 왕래하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원래 마테오 리치에게 우호적이었던 조경 관원들도 총독의 압박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마테오 리치가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자 발리냐노는 조경에서 부득이 계속 머무르지 못할 경우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했다. 1589년 8월 초 유계문은 조경 선교사들에게 은 60량(전체 건축비의 1/10에 불과하는 금액)을 보상하면서, 남웅(南雄)으로 옮겨가도록 했다. 8월 15일 마테오 리치는 부득이 6년 동안의 조경 생활을 마감하고 광동 북부의 소주라는 새로운 선교사역지로 옮겨갔다.
사진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