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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삼자교회의 형성
1) 기독교 개조활동
(1) 종교혁신운동의 적극적 추진 1949년 직전 교회는 신앙을 사회·역사적으로 해석하여 ‘중국교회’로서의 토대를 쌓고 있었다. 국공내전 당시 그리스도인이었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권이 부패하고 붕괴해 가는 정권임을 발견한 인민들과 함께 그리스도인은 공산당의 높은 도덕성과 현실적 대안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공산당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불러왔다.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영역뿐만 아니라 언론, 출판, 집회, 결사, 국제관계 등 사회 모든 영역의 권리가 전면적으로 제한된다는 느낌은 일단 부차적인 것이었다.
1949년 9월의 ‘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한 기독교 대표는 우야오쭝(吳耀宗) 등 토착교회(本色敎會) 출신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이들이 삼자운동을 추진했다. 같은 해 12월에 중국기독교협진회(中國基督敎協進會, CNCC)는 삼자원칙을 재확인하고, 서구 선교단체와의 단절, 사회주의 사회에의 적응, 새로운 중국의 건설과 내적으로 일치된 예배의식, 조직, 생활윤리 등을 강구해 갔다. 그러나 저우언라이(主恩來) 총리는 1950년에 이미 그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고1), 이것은 당에서 주도하는 서명운동(약 42만 명이 서명)으로 발전하였다. 1950년 9월 중공 중앙은 이른바 “기독교와 천주교 가운데 〈기독교선언〉운동을 전개하고 호응하는 것에 관한 지시(關於在基督敎天主敎中開展嚮應〈基督敎宣言〉運動的指示)”를 내려 천주교와 기독교가 자립, 혁신운동을 펴도록 하였다. 그와 같은 서명운동의 일정한 성공은 1954년 삼자위원회가 정식으로 조직될 수 있는 지도력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2) 국제관계의 단절과 종교사무처의 설치 때마침 터진 한국전쟁 중에 미·중(美中) 양국은 상호 재산동결 조처를 취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7월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앙위원회는 연합국의 참전을 지지하였다. 그러자 당시 WCC 공동의장 중 한 명이었던 자오즈천이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미국은 미국 내의 모든 중국인 자산을 동결시킨 후 중국 역시 12월 28일에 중국 내의 미국 자산을 제한하는 조치를 실시하였다.2) 이 과정을 통해 중국 정부는 범국민적 차원의 항미원조운동(抗美援朝運動)을 전개했다. 1951년 1월 5일, 26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조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조직으로서의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이 출발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항미원조운동은 중국기독교의 보다 철저한 자기고백을 요구하였고 이것은 고발(控訴)운동, 항미원조삼자혁신(抗美援朝三自革新)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의 결성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 1954년 7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1차 기독교 전국회의를 통해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로 개칭된 것이다.
종교업무에 대한 당의 실질적 장악과 통제는 1951년 1월 중공 중앙의 “종교 문제 위원회와 종교사무처 설립에 관한 결정(關於設立宗敎問題委員會及宗敎事務處的決定)”을 발표함으로써 공식화·제도화되었다. 즉 중앙과 각 중앙국, 분국(分局) 아래 종교 문제 위원회를 두어 종교에 관해 지도와 연구를 책임지게 하였다. 먼저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문제의 정책 방침을 세워나갔으며 또 정무원(政務院), 문교위원회(文敎委員會)와 각 대 행정구 인민 정부의 문교위원회 아래 종교사무처를 설치하여 기독교, 천주교와 불교에 관한 업무를 통일적으로 집행하며 연구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2) 중국삼자교회의 시작
(1) 삼자애국운동위원회의 결성과 시련 당과 정부의 적극 간여로 기독교의 경우 1954년 7월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中國基督敎三自愛國運動委員會), 천주교는 1957년 8월 중국천주교우애국회(中國天主敎友愛國會)가 조직되었다. 그밖에도 불교는 1952년 11월 중국불교협회, 도교는 1957년 4월 중국도교협회, 이슬람교는 1953년 5월 중국이슬람교협회가 결성되어 각각의 종교를 대표하는 공식적이고 전국적인 종교조직이 되었다.
그러나 생산력 수준의 정체가 발견되던 1957년의 정풍운동(整風運動, 反右派투쟁), 1958년의 대약진(大躍進)운동이 시작되면서, 기독교는 한 번 더 개조를 요구받았다. 교회는 연합예배, 합병3) 등으로 서구의 잔재를 청산하고, 교역자는 노동과 학습을 통해 변화되어야 했다. 삼자의 지도자들도 제한된 활동만 허용되었다. 곧 이어서 교회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악몽의 시기가 엄습하였으니 곧 문화혁명이다. 1966년부터는 종교단체뿐 아니라 종교사무처, 통전부(統戰部)까지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제국주의 국가의 교회 없이 중국교회가 스스로 견뎌내야 했던 ‘불의 단련’ 시기였다고 고백된다.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체험은, 소위 지하교회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중국 그리스도인의 공통경험이 되었고, 신앙경험은 중국 현실에 녹아진 것이 되었다. 숫자적으로도 대폭 성장하는 기간이 되었는데 훗날의 천안문사태 시기, 개혁개방 시기의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기독교 급성장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자교회의 통계는 신중국 이후 50년 동안 84만에서 1,500만 명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니, 그 이전 142년의 84만 명과는 비교가 안 되는 자력성장을 자랑할 만하다 할 것이다.
(2) 중국기독교 양회(兩會) 시기의 시작 1978년 당 11차 3중전회가 개최되면서 문화혁명의 극좌파적 과오가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77년에 종교사무국의 업무가 재개되었고, 종교정책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79년 3월에 당(黨)은 통전(統戰)사업과 종교사업에 대한 ‘투항주의(投降主義)’와 ‘수정주의(修正主義)’라는 죄명을 정식으로 씻어주었다. 삼자회(三自會)의 회의가 열리면서 삼자운동의 역사적 성과를 인정하고 성경인쇄, 교역자 양성, 교회건설, 국제교류 등을 결의하였다.
이어 1980년 10월 6-13일의 제3차 기독교전국회의(난징, 南京)에서는 신중국 이후 삼자회가 성립되면서 중단되었던 중국기독교협회의 사무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정치운동체가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목양과 성장을 위한 연합조직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치리와 목양의 필요를 위한 목회행정과 교회지원 사역이 중국기독교협회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991년의 WCC 캔버라 총회에서는 국제관계도 회복되었다.
1981년과 1982년에는 각 성, 시, 현의 삼자회 지부(支部)가 속속 재개되었고, 기독교협회 지부도 확대되었다. 이로써 중국기독교는 “중국공산당과 인민 정부의 영도 아래 전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단결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국가의 법령을 준수하고 자치, 자양, 자전과 독립, 자주, 자체 운영의 방침을 굳건히 지켜나간다(三自會 규정 제2조)”는 삼자회(三自會)와, “전국 모든 교회와 신도의 사역을 위한 봉사를 제공하고, 신앙적으로 상호존중을 주장하고, 지체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사랑으로 서로 관용하고 평화롭게 서로 연락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 되는 마음을 지키기를 노력한다(基協 규정 제3조)”는 기협회(基協會)의 이른바 ‘양회(兩會)체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2. 중국삼자교회의 발전
1) 80년대, 교회의 회복 합법적인 교회 공간이 주어진 80년대 초반에 기독교는 급속하게 회복하여 발전하였다.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활동을 보장 받기 위해 가정교회들이 등록하였다. 그러나 삼자교회와 갈등을 경험하고 있던 가정교회들은 오히려 개혁개방의 시기에 넓어진 생존공간을 활용하여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다양한 교회 성장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정부의 교회 관리에 대한 요구도 함께 성장하게 되었다. 1982년의 제19호 문서나 지정된 장소와 사람, 지정된 구역으로 제한하는 ‘삼정(三定)정책’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1) 지역교회의 회복과 신도 수의 증가 중국기독교협회(基協)의 재출범은 목양조직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중국교회의 건설을 넘어 올바른 운영 이른바 ‘삼호(三好)’에 대한 관심은 중요하였다. 딩광쉰(丁光訓)은 1980년 말의 제3차 기독교전국회의 개막사에서 이 ‘삼호(三好)운동’을 제창하였는데 그는 삼자 조직의 바깥에 기독교협회를 결성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들은 그냥 자치가 아니라 ‘훌륭한 자치(治好)’를 이루어야 하고, 그냥 자양이 아니라 ‘훌륭한 자양(養好)’이어야 하고, 그냥 자전이 아니라 ‘훌륭한 자전(傳好)’을 이루어야 한다.”4) 이후 양회는 1986년의 제4차 전국회의를 공동 개최하였고 성경인쇄, 찬양집, 설교집 등 문서출판, 신학교육, 교회건립, 해외교류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모두 지역교회의 목양사업을 회복하자는 것이 첫 번째 관심사였기에 나온 것이다.
1982년의 중국 정부 통계에서 신도 수가 3백만 명이었는데 1986년 8월의 제4차 전국회의에서 발표한 통계로 보면 신학교가 열 곳, 개방된 예배당이 4천 곳, 안수받은 목사는 3백여 명이었다. 그리고 91년 말부터 92년 초까지 이어진 제5차 전국회의에서는 예배당 7천여 곳, 신도 5백만, 성경인쇄 650만 권, 찬송가 3백만 권, 신학교 13곳, 졸업생 1,200명으로 발표되었다. 실로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정교회의 등록 증가는 그만큼 갈등상황도 확대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2) 교회 건물의 회복 종교신앙자유의 정책이 재개된 이후 그 열매를 얻는 데 장애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신중국 이후 대량의 교회재산이 정부나 여러 기관에 의해 점거되어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0년 7월, 국무원은 종교사무국, 국가건설위원회 등으로 하여금 종교단체 부동산정책 등의 문제를 보고하게 하고, 이 문제가 간단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임을 밝혔으며, 몇 가지 해법을 제시하였다.5)
예컨대 1983년 국무원은 창사 시의 종교단체 부동산과 토지사용권 문제를 처리하는 공문을 통해, 각급 정부의 비준을 거쳐 개방된 종교건물은 어떤 단체라도 점용할 수 없도록 했다. 그리하여 각 지의 삼자회는 1958년 이전 수준으로 부동산 환급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방 정부나 점용 단체의 저항이 있었고 문화혁명 이전의 소유권을 문서로 제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법률 다툼 등을 통해 교회재산은 서서히 복구되었다.
80년대 말부터는 예배처(堂點)의 등록사업도 적극 진행되었다. 1995년 12월까지 전국의 기독교 재산 가운데 등기는 2,236곳, 임시등기 660곳, 등기유예 298곳, 합병등기 584곳, 미등기 278곳이었다. 1994년 1월에 ‘종교활동장소 관리조례’가 발표된 후 국무원은 ‘종교활동장소 등기법’을 제정하여 3년 안에 전국 예배처의 등록이 완료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삼자교회 가입을 전제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어려움도 있었다.
(3) 신학교의 회복 1979년부터 중국교회가 공개적인 집회를 회복하였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교회의 건설과 인재양성을 위하여 신학교육체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국무원 종교사무국 역시 각 종교조직이 신학교를 개설하는 것을 도와야 함을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1981년 2월에 난징의 금릉협화신학원은 제일 먼저 수업을 재개하여 문화혁명 이후 첫 신학생들을 모집하였고, 중국기독교협회는 1987년에 ‘신학교육위원회’를 구성하여 신학교육에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 각지에서 신학원(교)들이 신설되고 수업을 재개하였으며, 1991년에는 13개의 신학원과 700여 명의 재학생을 갖게 되었다.
성급(省級) 이하의 각급에도 여러 등급별의 사역자훈련반이 있는데 주로 각급의 양회에서 운영하며, 수업 기간은 10일 과정에서 1년 과정으로 여러 종류가 있으며, 각 현과 시의 상황에 따라 수준과 규모에 차이가 났다. 그중 자금이 비교적 풍부한 현이나 시에서 개설한 사역자훈련센터들은 여러 면에서 성급의 성경학교나 신학교의 수준과 별 차이가 없었으며 사정이 더 나은 곳도 있었다.
1980년대에 계속적으로 신학교들이 재개되면서 많은 신학교들은 재정이 넉넉지 못하여 제대로 된 학교 건물을 갖지 못하였고, 심지어 독립된 건물이 없어 삼자조직이나 교회 내에서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 후 차츰 설비 개선에 힘을 쏟았으며 특히 학교 건물의 회복에 노력을 기울였다. 화동(華東), 저장(浙江), 산동(山東), 옌징(燕京), 광동협화(廣東協和), 안후이(安徽)신학원과 후난(湖南)성경학원 등이 먼저 건물을 넓히는 등 신학교 운영의 조건들이 대대적으로 개선되었다. 여기에는 시설 보수와 서적 공급, 장학금 등을 지원한 해외교회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2) 90년대, 교회의 신속 발전 1989년에서 1992년 2월까지의 6·4톈안먼(天安門) 사태 발생과 그 이후 수습에 주력했던 중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안정 위주의 강경하고 보수적인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도 1994년의 제144호 문서(〈외국인 종교활동 관리규정〉)와 제145호 문서(〈종교활동장소 관리조례〉) 등을 따라 법제화 움직임을 가속화시켰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최된 1992년의 제5차 전국회의는 교회행정제도의 건립에 초점을 두고, 보다 직접적인 교회 관리와 치리를 농촌의 교회까지 미치게 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중국기독교 각지교회 시행규장제도”가 통과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도, 성례, 성직, 교회의 조직과 관리에 관한 제도를 포함하였다. 이후 1997년의 제6차 전국회의를 전후해서는 법제화 논의가 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삼자교회는 신속하고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성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 목양사업의 조직화 1997년의 6차 전국회의에서 기독교협회의 한원자오 회장은 삼자교회의 신도가 1천만 명이며, 예배당은 1만 2천 개, 예배처소는 2만 5천 곳이라고 발표하였다. 또 신학교는 17개, 신학교 재학생은 1천명이며, 1980년 이후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수가 2천 7백 명이라고 보고했다. 전국적으로 양회조직이 확대되었고, 성경인쇄도 대폭 발전하여 중영대조, 점자성경과 조선족을 포함한 소수민족 언어의 성경도 발행되었다.
당시 무엇보다 강조된 것은 교회를 잘 세우는 일 즉 목양사역이었다. 교회를 더욱 더 잘 세워(辦得更好) 백성들의 칭송을 받게 하자는 구호가 제창된 것이다. 그리하여 신학교의 꾸준한 확대, 대대적인 성경인쇄, 신앙서적 발간, 농촌 평신도 지도자훈련 확대를 제창하였으며, ‘교회규정’의 제정이 이루어졌다. 교회의 공인과 체계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제6차 전국회의에서 정식으로 공포된 ‘교회규정’으로 각 지역의 삼자교회는 신도와 성례에 대한 규정, 성직의 종류, 자격, 안수절차, 안수의식과 성직자에 대한 권징, 교회의 조직과 관리 등에 대해 이제 보다 질서 있게, 규칙적으로 교회의 제도를 운영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삼자교회가 내부적으로 무질서와 인위적인 교회관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와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한편 6차 전국회의에서 부각된 삼자교회의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것은 삼자교회의 단결 문제였다. 전국양회와 지방양회 간의 갈등, 가정교회와의 갈등, 교역자들 사이의 반목과 분쟁 양상을 놓고, 퇴임하는 딩광쉰 등 지도자들은 거듭 우려하며 교회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그밖에 교회의 윤리도덕 문제, 개인주의와 배금주의 문제 등이 교회의 과제로 대두하였다. 특히 해외교회의 지원을 놓고 고민하였다. (2) 젊은 지도자의 부상과 지역교회 정착 90년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삼자교회의 지도자들이 젊은 층으로 세대 교체가 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전국회의 대표의 평균연령이 1992년에 59세였는데 1997년의 제6차 때는 52.6세였다. 그중 50세 이하가 144명으로 전체 대표의 48.2%를 차지했다. 전국 23개의 양회 가운데 다수의 젊은 층이 정(正), 부(副) 부서장이나, 총무에 임직되었으며, 1993-1994년에 증원된 전국양회의 26명 위원 가운데 20명이 중년, 청년층이었다.
신학교 교수요원의 연령층도 낮아져서 1995년의 통계에 의하면 젊은 층 교수가 81명으로 전체 교수의 61.1%나 되었다. 또한 새로 안수받은 목사와 전도사의 연령층도 낮아졌다. 1992-1995년 사이 각 성, 자치구, 직할시에서 총 45세 이하의 목사로 347명, 교사(전도사)로 272명을 안수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시기 전국에서 안수받은 총 목사 숫자의 41.6%와 교사 숫자의 63.4%에 해당되었다.
급속한 사회 변화의 시기에 기독교 신앙에서 갈 길을 발견한 적지 않은 청년들이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들이 배출되면서 각 지역교회도 젊은 지도자들을 보유하기 시작했다. 이들 젊은 지도자들에 의해 일선 교회는 평신도 학습반을 조직하고 보다 체계적인 신앙교육을 해나갈 수 있었다. 물론 신학교에서 이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킨 것도 아니고, 교회현장에서 노년층 지도자와 긴장관계를 이루었으며, 무보수 봉사도 적지 않았지만 이들이야말로 급속한 교회성장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 기층 지도자들이었다.
(3) 농촌교회의 발전과 도시화 중국에서 기독교가 성장한 것은 70년대 말부터요 어떤 지역에서는 80년대 이후의 일인데, 가장 빠르게 성장한 지역은 농촌이었다. 량쟈린(梁家麟)은 1980년대의 십 년 동안 전국 기독교인의 수가 대체로 1천만 전후로 성장하였고 주로 농촌지역이었음을 말한다.6) 이들은 ‘종교관리조례’에 따라 등록을 진행하였지만 적지 않은 농촌지역의 가정교회는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비등기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가르치고 오락, 의료활동 등을 통해 그 수요가 늘어나면서 여성과 노인들을 중심으로 여전히 크게 성장하고 있다.
한편 기독교 신앙은 청년들에게도 흡인력을 가졌는데 중국 사회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들은 도시교회의 중심으로 바뀌었다. 도시로 유입된 노동자나 유학생, 귀국 화교 등을 중심으로 도시에서는 가정교회와 삼자교회를 불문하고 성장하였으며, 여러 경로로 고급 신학을 공부한 이들의 지도력이 작용하였다.
1990년대에 크게 발전한 도시교회는 대체로 고급인력이 모여 합법적인 권익을 추구하며 토착적인 기독교의식을 개발하고 사회봉사 사업에도 적극 참여를 도모해왔다. 정치적, 신학적, 역사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여전히 등기에 소극적인 가정교회들이 있지만, 또한 합법적이고 건강한 대화와 사회참여를 통해 국가와 사회·문화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강구하는 것은 대부분의 중국교회에서 다같이 일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2000년 이후의 안정적 발전 2012년에 쓴 왕원펑(王文锋)의 글7)을 보면, 당시 삼자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통계자료에 의거, 삼자교회 소속의 기독교 신자가 전국적으로 이미 2천 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 가운데 70%는 농촌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또한 전국에 5만 5천 개의 예배당이 있고, 그 가운데 70%는 최근 30년 동안 새롭게 건립된 것이다. 목회자의 경우, 2005년에 거행된 한 조사에 따르면, 전국양회에 소속되어 있는 목사와 부목사가 3,700명, 장로 5,000명, 전도사 27,000명, 직원이 15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전국에 서로 다른 규모의 신학교가 총 19군데 있으며, 신학생 2천여 명 정도가 학교를 다니고 있고, 매년 1,000명 남짓한 학생들이 졸업하고 있다. 그리고 30년 동안 배출된 목회자가 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1988년부터 2011년 5월까지 양회에서 공동으로 인쇄한 성경이 5천만 권이 넘으며, 현재도 300만에서 400만 권 사이의 성경을 매년 계속 찍어내고 있다고 한다.
2014년 6월의 한중기독교교류세미나에서 산시성(陕西省) 양회 주석 겸 회장인 왕쥔(王俊)은, 중국 기독교인의 숫자가 2,500여만 명이며, 예배당 수 6만여 개, 목사 4,500여 명, 장로 6,000여 명, 평신도 설교자 19만여 명, 신학교 22곳, 신학교 졸업생 1만 4,000여 명, 재학생 3,700여 명, 조직된 양회가 19개 성, 자치구, 직할시에 설치되어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
(1) 교회 자체적인 능력 발현 2000년 이후 도시출신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문화, 교육, 자선 등의 사회활동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하였다.8) 문화계를 예로 들자면 저명한 기독교 작가 베이춘, 경제학자 쟈오샤오(赵晓), 영화배우 뤼리핑(吕丽萍) 등은 자신의 직업 활동 안에 기독교 신앙을 투영시켰다. 기독교 신앙이 문화·사상적 영역에서 중국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유치원, 초등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직접 설립하면서 교육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와 같은 사회활동은 교회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특히 교회는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는데, 예를 들면 1998년의 대홍수, 2003년의 사스 유행 사태, 2008년의 쓰촨 대지진 때에 교회는 민간단체의 구조사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애덕기금회는 1985년 설립된 이후 25년 동안 총 10억 위안화의 헌금이 모아졌는데, 이를 31개 지역, 총 1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후원금으로 나누어주었다. 문맹퇴치나 우물 건설, 마을보건사업 등을 실시하여 온 애덕기금회의 자선활동이 이제 모든 교회 자체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2) 신학사상의 전개–토착화, 상황화 삼자교회는 1988년부터 중국적 신학사상 건설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중국교회의 ‘자아’를 신학적으로 탐색하자는 것인데, 이를 통해 복음을 더욱더 발전시키는 중국교회를 이루어 세계교회에도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딩광쉰, 션이판(沈以藩), 뤄관쫑(罗冠宗), 천저민(陈泽民), 왕웨이판(汪維藩) 등으로 대표되는 삼자신학의 지도자들은 〈金陵神學誌〉, 〈天風〉 등을 통해서 신학적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들의 신학적 주제는 사랑의 하나님, 우주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낙관적인 역사관 등이다.
이들은 그와 같은 신학논쟁을 통해 중국 특색의 신학을 만드는 것이 새 시대의 사명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대부터 믿음과 행위, 영성과 윤리, 역사의 종말과 현실의 역사 등을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9)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뤄관종의 “신학사상과 사회주의 사회와의 상호 적응”, 한원자오(韩文藻) 의 “신학사상의 활성화와 창조”, 그리고 《딩광쉰 문집-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로 이어져 왔다. 특히 딩광쉰은 그의 문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사회주의 노선의 신념을 결합시켰다.
2005년 2월 개최된 제7차 중국기독교 전국대표대회의 제2차 회의 주제는 ‘신학사상 건설공작을 진일보 개진하기 위한 구상’이었다. 그와 같은 삼자신학 건설의 노력은 복음주의 가정교회나 해외교회의 비판거리가 되었지만, 중국교회의 신학 토착화와 상황화를 위한 노력이었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중국교회의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그 신학적 장단점을 공론화하여 다룰 필요는 있을 것이다.
(3) 중국 사회 주류로의 진입 도시화가 가속화하고 있는 중국 상황에서 중국교회의 중심도 농촌에서 도시로 빠르게 이동해 왔다.10) 이에 따라 도시의 지식수준에 부응하는 목회자의 소양, 집단지도체제 같은 교회의 조직제도, 문화나 복지 사역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주류사회로 진입하는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다. 도시교회에는 교사, 교수, 기업가, 변호사, 의사, 화가, 문인, 회사원 등 주류층의 유입이 활발해졌고, 자선활동과 결혼지도, 직장생활훈련, 문서나 영상 사역 등 문화 사역도 성장하였다.
특히 21세기 들어 도시에서 발전한 독립교회는 가정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삼자교회와의 경계도 넘어서고 있는 모습이다.11) 기독교인 법조인을 통해 정부의 압력에 맞서기도 하고 심지어 정부 내의 종교 담당 부서를 법원에 고소하기까지 한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에 따라 중국 사회와 기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향해서는 교회의 독립적 지위를 요구하고 있고, 교회를 향해서는 건전한 사회 참여적 교회를 제창한다.12) 이들이 삼자교회에 상당한 자극이 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국양회는 2008년 5월 12일의 쓰촨 대지진 때 즉각 지진구호팀을 조직하여 전국 교회로 하여금 기도회를 열고, 모금에 동참하도록 호소하였으며 그 금액은 이틀 만에 100만 위안, 2주일 만에 3,200만 위안을 넘어섰다. 중국사회과학원의 판야펑(范亚峰) 박사에 따르면 당시 민간 자원봉사자 100만 명 중 기독교인이 63만 명이나 포함됐고, 전체 재난 후원금 1,000억 위안 중 기독교인의 기부액은 115억 위안에 달했다는 것이다.13) 사회봉사뿐만 아니라 예배와 성경학습 활동에 이르기까지 중국교회는 전체적으로 사회 주류세력으로 발돋움해 가고 있다.
남은 말 시진핑의 등장 이후에 종교사무조례가 개정되고 선교사들이 추방되며 교회가 탄압받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중국교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교회의 발전 현실과 가능성에 이견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세속화나 분파와 분열, 이단 등의 과제가 여전하지만 언젠가 중국이 세계의 가장 큰 기독교 국가가 되고, 중국 내에서도 기독교 인구의 비율이 크게 증가하는 날을 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날을 위해 아픈 과거의 상처를 씻고 미래지향적인 교회를 모색해야 한다.
세계무대에서 급성장하는 중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국제교류의 증가추세를 따라 장차 중국은 종교분야에서도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에도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대립적으로 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지식인사회를 향한 미디어선교가 발전하고, 교회의 건강한 사회 공헌이 증가하게 되면 더더구나 정치적 구속의 필요성이 줄어들 것이다. 그날이 오게 되면 중국 정부의 종교정책은 어찌 될 것인가? 아마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관용적인 정책들이 나오지 않겠는가? 미주 1) “中國基督敎在新中國建設中努力的途徑”<人民日報>, 1950/7/28) 2) “중공 중앙의 ‘미국의 경제 지원을 받는 문화교육 구제기관과 종교단체에 대한 처리 방법의 지시(對接受美國津貼的文化敎育救濟機關及宗敎團體處理辦法的指示)’” 3) 상하이는 200개중 188개, 베이징은 65개중 60개, 난징은 30개중 26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 4) 정광훈 저, 김종구 역, 《정관훈 문집》, 민중사, 1999, p.p.516-517 5) 梁家麟, 《改革開放以來的中國農村敎會》, 建道神學院, 1999, p.321 6) 梁家麟, 위의 책, p.112 7) 왕원펑, “현대 중국교회의 현실과 전망”, 〈기독교사상〉 (2012년 2월호) 8) 왕원펑, 위의 글 9) 함태경, 《알았던 선교 몰랐던 중국》, 두란노, 2015, p. 215 10) 왕원펑, 위의 글 11) 함태경, 위의 책, p.p. 230-231 12) 왕평 역, 《변화하는 중국 변화하는 중국교회》, 시님교회연구소, 2012 참조 13) 함태경, 위의 책, p.232
정암 | 감리교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