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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통치와 종교정책 1) 중국의 공산화와 사회주의 통치 (1)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 지난하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마오쩌동(毛泽东)은 30만 명의 인파가 몰린 톈안먼(天安门) 광장 위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정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그 골격은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베이징(北京) 중난하이(中南海,)에서 개최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중국공산당, 각 민주당파, 인민단체, 인민해방군, 각 지구, 각 민족, 국외화교 그리고 우야오쭝(吴耀宗) 등의 기독교 대표를 포함한 종교계 대표 662명이 모였는데 인민민주통일전선의 조직형태로 조직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발표된 <공동강령>에서는 신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가 국가건설의 정치적 기초가 된다고 승인되었을 뿐 사회주의의 앞길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그것은 당시의 중국 상황에 봉건적 토지소유제가 여전하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모순이 여전하였으며, 전국의 군사행동들 역시 종결된 것이 아니었으며, 대다수 간부와 군중들 역시 다양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신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 국가로서 공인(工人)계급이 영도하고 공농(工农)연맹을 기초로 하여 각 민주계급과 국내 각 민족과 단결하는 인민민주전정(专政)을 실시하고,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에 반대하며, 중국의 독립, 민주, 평화, 통일, 부강을 위해 분투한다.”1)고만 규정되었다. 그것은 생산력이 별로 발달하지 못한 반봉건사회인 중국의 독특한 혁명을 말했으며 사회주의적 개조의 과제가 앞에 놓여 있음을 의미했다.
(2)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의 과제 신중국은 구미식의 자산계급전정의 국가도 아니고 소련식의 무산계급전정의 국가도 아니었기에 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과 기타 애국민주인사의 연합을 여전한 과제로 안고 있었다. 신중국의 기본 임무는 무산계급이 영도하고 인민대중에 의한 반제, 반봉건, 반관료 자본주의의 신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토지개혁과 독점관료부르주아 재산 몰수에 따른 봉건주의와 반동사상(문화)의 척결시기(1949-52), 농업, 수공업, 민족부르주아 공상업의 사유제를 사회주의 공유제로 개조해 가는 시기(1953-56)를 거쳐야 했다. 이 기간은 사유제가 인정되고 구 중국이 사회주의 중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압과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티베트 등의 제국주의 세력 축출 문제, 대만 통일과 미국의 위협이 상존하는 문제, 서남, 화북, 연해안에 남아 있는 국민당 잔여세력 소탕 문제, 관료자본과 기업체를 몰수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재산을 접수하여 사회주의 국영기업으로 개편하는 문제, 생산 장려와 경제 안정 문제, 사회질서의 회복과 쇄신 문제 등의 과제가 산적하였다. 그런 가운데 1950년 6월부터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항미원조운동(抗美援朝运动)은 국공내전(国共内战)의 여파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였지만 중국 내의 반미운동을 더욱 고조시켰으며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이 기간 중에 일어난 ‘3반·5반(3反5反)운동’은 당정군(党政军)의 부정부패 퇴치운동이지만 사회주의적 개조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지식인의 사상개조운동을 통하여 지속적인 정풍운동을 전개하였다. (3) 강압적인 개조운동 그와 같은 개조운동을 통해서 신중국은 1954년 9월 15-28일의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드디어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을 제정하였다. 여기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 총노선’이란 주요 정책을 정식 채택하고, 약 15년(1953-67년)의 기간 동안 사유제(私有制)를 공유(共有制)로 바꾼다는 계획을 세웠다. 개조운동의 방법은 민주집중제(民主集中制)를 표방하였지만 다분히 폭력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한국전쟁에 개입한 제국주의 미국의 위협도 한몫했다. 어쨌든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거치지 않고 인위적으로 급속하게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형성해 내기 위해서, 중국은 이후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 내야만 했다. 농업의 집단화는 조급하게 진행되었으며 그로 인한 박탈감과 부작용이 대약진, 문화혁명 시기를 지나면서 분출하였다. 후유증은 수공업의 개조, 자본주의 공상업의 개조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와 같은 조급증은 사회주의 건립을 선언한 1956년 9월의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 이후에도 여전하여서 결국 폭력적 군중운동에 기대려는 계속혁명론을 부추겼다. 2)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 (1) 무신론과 역사유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이데올로기》를 쓰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2)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두뇌 속에서 만들어지는 환상들 역시 항상 생활 과정 특히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하고 물질적 조건들에 연결되어 있는 인간 생활 과정의 필연적인 승화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 종교, 형이상학과 그 밖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것들에 대응하는 여러 가지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오직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만이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자신들의 사고와 그 생산물을 변화시킨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로써 형이상학적인 정신이나 이념 등의 관념론적인 상부구조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경제적 생산력과 사회계층의 변화를 비롯한 하부구조가 역사를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회는 변증법에 따라 변할 것이다. 단 앞으로 미래에는 공산주의 공동체가 반드시 도래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역사 변화의 과정에 적용한 사적 유물론이다. (2) 마르크스, 엥겔스가 말하는 종교의 운명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서 무신론과 역사유물론을 신봉한다. 유물사관은 물질적 조건의 지배를 받는 인류의 사회적 존재가 인류의 의식을 결정하고 초개인적 사회적 사정에 의해 인류역사가 발달된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물질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신은 그 물질적 현실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종교란 인류 사회 발전단계의 일시적 역사 현상이고, 그 발생, 발전과 소멸의 과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 바탕에서 마르크스는 종교란 전도(颠倒)된 세계관이며, 피압박 생령(生灵)의 탄식이며, 인민의 아편이라고 생각하였다. 엥겔스도 《반듀링론》에서 “모든 종교란 단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외부적 힘이 사람들의 두뇌 안에서 나타난 환상의 반영”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를 일정한 역사 시기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를 강제적인 처분 대상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장기적으로 발전하고 모든 객관적인 조건이 구비될 때 그것은 자연히 소멸될 것이라고 보았다.
(3) 중국공산당의 실용적 관심 그와 같은 바탕에서 마오쩌동을 포함한 신중국의 지도자들은 종교가 소멸될 운명을 확신하였지만, 동시에 중국혁명의 특성으로 인하여 종교가 갖는 역할과 사회 역사적 영향에 대해서 실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마오쩌동은 “공산당원도, 어느 유심론자(唯心论者) 심지어 종교 신도와도 정치 행동상 반제반봉건의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의 유심론 또는 종교 교리를 찬동해서는 안 된다.”3)라고 말했다. 저우언라이(周恩来)도 “우리는 유물론자와 유심론자가 정치적으로 협력을 할 수 있고 공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땅히 서로 존중해야 하며 우리 사이에는 협력의 길이 있다.”라고 하였다. 즉 종교를 통일전선 사업의 일부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중국 성립 이후 중국공산당은 종교에 대해 협력과 개조의 정책을 병행하였다. 그 결과 각 종교조직과의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되 반동계급과 통치계급 또는 제국주의 세력의 도구로 이용되어 온 각 종교단체와 종교 인사를 장악하여 개조해야 하는 임무를 안고 있었다. 언제든 답답하여 조급한 마음이 앞설 수 있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결국 초기의 협력적 관계는 50년대 말이 되면서 점차 조급하고 강압적인 태도로 바뀌었으며, 문화혁명의 암흑기를 가져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2. 개혁개방과 종교정책의 변화
1) 개혁개방 노선의 등장
(1) 실사구시 노선의 등장 2차 5개년 계획(1958-62) 시기에 생산력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당 지도부는 급진적 군중노선에 의지하여 자본주의 노선과의 계속적인 투쟁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인민민주주의를 희생시키면서 등장한 대약진운동은 여지없이 실패하였다. 자원낭비, 생산 감소, 생산의지의 상실로 이어졌고, 3천만 명의 인민이 기아로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객관적 수준에 대한 정직한 평가와 경제적 효율성을 주장한 류사오치(刘少奇), 덩샤오핑(邓少平) 등의 수정노선이 등장하였다. 그 후 10년의 동란 기간을 거쳐 실사구시(实事求是) 노선은 덩샤오핑의 복권과 함께 재개되었다. 1978년의 당 제11기 3중전회는 개혁개방과 경제 활성화를 강조했고,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문호개방을 선택하였다.
(2)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문호개방 생산력 수준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규정되었고,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는 생산관계와 상부구조의 개혁으로 관리방식, 활동방식, 사상방식을 개혁하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교류하여 선진기술과 자금, 합리적 경영을 도입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개방정책을 실시하였다. 과거 청조시기에 전통 중화사상 때문에 근대화가 늦어졌던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기 위해서 단호하게 서방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경제, 과학, 기술교류를 진행하고, 이로써 생산력 수준이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단계의 획득을 당면목표로 삼게 된 것이다. 1979년 국무원은 ‘경제특구’의 건설을 결정하고, 중외합작기업법을 발표하였으며, 외국 투자자를 받아들였다. 1984년에는 장강유역과 발해만지역의 연해안을 개방했다. 특히 톈안먼사태를 극복한 1992년 초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讲话)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채택되면서 개혁개방은 가속화하여 한국과도 수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3) ‘사회주의 문화’의 구호 등장 1992년의 당 14차 대회, 2002년의 당 16차 대회를 통해서 등장한 쟝쩌민(江泽民), 후진타오(胡锦涛)는 여전히 생산력의 발전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나 동시에 사회주의 문화건설, 화목한 사회건설 등의 구호를 통해 전 인민의 이익을 함께 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것은 개혁개방의 진전과 더불어 빈부 격차, 지역 격차, 실업, 부정부패와 범죄 그리고 민주화의 요구 또한 증대하고 있어 일어난 보완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만능주의와 평균주의의 공동화(空洞化)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보이는 파룬궁(法轮功)의 성장은 건전한 종교의 육성이 당대 중국의 또 다른 과제가 되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2012년 11월 12일의 제18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자대회 그리고 2015년의 중앙통전공작회의에서 시진핑(习近平)은 “적극적으로 종교를 이끌어 사회주의 사회에 적응하며, 우리나라 종교의 중국화 방향을 필히 고수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2016년의 전국종교공작회의에서도 “적극적으로 종교를 이끌어 사회주의 사회에 적응하며, 그 중에 하나의 중요한 임무는 종교의 중국화 방향을 지지하는 것이다.”고 말하여, 종교가 사회주의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위해 담당해야 할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2) 종교정책의 변화
(1) 통전(统战)정책의 재등장 1978년 12월 18-22일의 당 11차 3중전회가 개최되면서 문화대혁명의 극좌파적 과오가 수정되었다. 화궈펑(华国锋) 시대를 지나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실사구시’의 통치가 본격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3중전회는 “무산계급 전정하(专政下)의 계속혁명(无产阶级专政下继续革命)”이라는 말을 부정하고, 안정단결의 정치국면을 발전시켜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결의하였다. 그것은 종교정책에 있어서도 신중국 초기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이미 1977년에 종교사무국의 업무가 재개되었고, 종교정책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77년 12월 27일의 전국 정협 상무위 확대회의에서 예젠잉(叶剑英), “우리 당의 종교정책은 모든 적극적 요소를 동원하여 사회주의를 위해 복무케 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화궈펑 역시 1978년 2월 26일에 실시된 중공 중앙 주석의 사업보고에서 “헌법 규정에 따라 종교 신앙의 자유, 종교 불신앙의 자유, 무신론 선전의 자유 등 종교자유정책을 관철, 집행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리하여 1979년 2월에 당은 통전사업(统战事业)과 종교사업에 대한 ‘투항주의(投降主义)’와 ‘수정주의(修正主义)’라는 죄명을 정식으로 씻어주었다.4) 80년에는 중공 중앙 통전부가 국무원 종교사무국의 ‘각 종교 회복 건의’를 인허해 주었고, 같은 해 10월 6일-13일에 개최된 중국기독교 제3기 전국회의에서 딩광쉰이 주석과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계속하여 종교신앙자유정책을 하달했으며, 각급 통전(统战) 부분과 종교사무 부문의 회복과 재건을 도모하였다. 획일적인 평균주의를 벗어나 상대적인 다양성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2) 헌법과 법률의 종교자유정책 1978년에 제정한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 제88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들은 종교를 믿을 자유와 종교를 믿지 않고 무신론을 전파할 자유를 가진다.”5)라고 언급하고 있다. 80년 1월의 형법 제147조는 “공무원이 종교신앙 자유를 침해하면 2년 이하의 징역”을 받게 된다고 규정해 놓았다. 1982년의 헌법 제36조에서도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종교신앙의 자유가 있다. 어떠한 국가기관· 사회단체·개인도 공민이 종교를 믿거나 믿지 않을 것을 강제할 수 없고, 종교를 가진 공민과 종교를 갖지 않은 공민을 차별할 수 없다.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보호한다. 어떠한 사람도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공민의 신체건강을 상해하고, 국가교육제도를 방해하는 활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헌법개정위원으로 참여한 딩광쉰은 각 종교 대표들과 함께 1978년 헌법의 종교 관련 ‘좌경적 표현’들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6) 즉 ‘무신론을 선전할 자유’와 함께 ‘유신론을 선전할 자유’도 함께 언급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것은 54년의 헌법 제88조, 즉 “공민은 종교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는 표현이 가장 훌륭하다는 것이다. 실제 82년의 헌법 조문은 54년의 것으로 회귀하였으며, 딩광쉰은 그것이 큰 발전이라고 말한다.7) 종교사무국이 헌법개정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그것을 지지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3) 종교정책 확립 중국공산당 중앙 1982년 제19호 문건(“사회주의 시기 종교 문제의 기본 관점과 기본 정책”)은 그와 같은 중국의 현실 상황에서 출발하여 작성되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시기의 중국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였던 마르크스시대의 종교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즉 사회주의 시기의 중국종교를, 억압받는 인민의 탄식이며 아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19호 문건에는 ‘아편’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종교를 제한하고 나아가 소멸시켜야 한다.’는 등의 표현도 나오지 않는다. 딩광쉰은 사회주의 시기의 신앙 동기를 ‘인민의 안정과 단결을 강화하고 생산을 증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주의와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장기성, 군중성, 민족성, 국제성, 복잡성’의 ‘오성(五性)이론’을 통해, 사회주의시기에 존재하며 심지어는 성장하고 있는 종교 현실을 긍정할 수밖에 없기에 나온 논리일 수 있지만, 사실 딩광쉰은 사회주의 정권이 억압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다. 개혁개방시기에 종교가 성장하고 있는 원인은 인민의 탄식이 깊어지는 사회적 배경 또는 종교 자체의 근본적 호소력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의 종교정책은 82년의 헌법 36조에서 규정하는 신앙과 불신앙의 자유에 기초하여, 19호 문건이 발표되면서 확립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종교정책 방향인 것이다. 이후 발표된 1994년의 <중화인민공화국 경내 외국인 종교활동 관리규정>과 <종교활동장소 관리조례>, 1996년의 <중국기독교협회장정>과 <중국기독교교회규정>, 2005년에 <종교사무조례> 그리고 2018년의 <종교사무조례 수정안> 등은 모두 그와 같은 기초 위에서 작성된 것이며,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해야 한다는 헌법의 제약 안에 놓여 있다.
(4) ‘수정 종교법’ 시행 이후의 상황 2017년 9월 7일, 발표된 <종교사무조례 수정초안>은 2018년 2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법률은 2005년의 종교법에 비하여 종교관리를 위한 좀 더 구체적인 사항들이 담겨 있다. 우선 제1조에 “종교 업무의 법치화 수준을 제고시키고, 헌법과 관련 법률에 근거한다.”라는 문구를 삽입하고, 제3조에서 “종교사무관리는 합법을 보호하고, 불법을 제지하며, 극단을 억제하고, 침투를 방어하며, 범죄를 타격하는 원칙을 견지한다.”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그 목적은 제4조에 나와 있는 대로 “종교와 사회주의 사회의 상호 적응을 적극적으로 인도한다.”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을 이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정종교법은 정교분리의 구호와는 달리,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종교 역할을 강화하고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종교단체와 조직을 관리하여 적극 통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실제로 선교사들이 대거 추방되고 가정교회는 물론 삼자교회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이다. 그것은 딩광쉰 주교의 이상적인 기대와 달리 종교단체에 대한 탄압과 갈등이 자극적인 모습으로 확대되는 양상이기에 국내외의 우려를 낳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어려움은 돌연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고, 일시적인 것도 아니다. 신중국 성립 초기부터 이어져 온 종교관이 종교정책을 낳았고 태도의 강약과 법제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적인 입장은 변한 것이 없다. 그것은 종교에 대한 소극적 태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적인 관점과 안목에서 바라보고 대책을 세워야 하며, 갱신과 반성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무엇보다 해외교회나 선교사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철수하는 선교사들에게는 서운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는 큰 틀의 중국사 안에서 종교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종신통치자의 등장과 무관한 역사 발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주 1) 김소중, 《중국을 정복하자》, 백산서당, 2007, 222쪽. 2)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I》, 청년사, 1998, 48쪽. 3) 김학관, 《중국교회사》, 이레서원, 2005, 195쪽. 4) 罗竹风, 《中国社会主义时期的宗教问题》, 上海社会科学院出版社, 1987, 163쪽. 5) 김학관, 위의 책, 196쪽에서 재인용. 6) 정광훈 저, 김종구 역, 《정광훈문집-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민중사, 1999, 549쪽. 7) 위와 같음.
사진 | 바이두 정암 | 감리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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