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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흥(紹興) 방문의 건 루지에리, 마테오 리치 등이 1583년 중국 조경(肇慶)에 근거를 확보하자 유럽에서는 큰 반향이 일어났다.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 西斯托斯)는 예수회에 특별 경축행사의 개최를 허락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본과 중국 선교단을 위해 기도하도록 훈령을 내렸고, 예수회 회장 클라우디오 아쿠아비바(Claudio Acquaviva, 阿瓜維瓦, 阿桂委瓦) 신부는 선교 사업에 매진하라고 선교사들에게 권면하면서 힘닿는 대로 지원해 주겠다고 응답했다.1) 이에 따라 서방의 저명한 예술가의 그림, 정교하게 제작된 각종 시계와 기타 예물들이 유럽, 일본, 필리핀 등지를 경유하여 중국 선교단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중국 현지에서 루지에리 등 선교사들은 점차 겸손하고 신중했던 태도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만력 14년(1586)은 병술년(丙戌年)이어서 지방관 조근의 해였다. 루지에리는 영서도윤(嶺西道尹) 왕반(王泮)과 조경지부(肇慶知府) 정일린(鄭一麟)이 북경으로 갈 때 자신을 데리고 가서 북경을 둘러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왕반은 북경이나 남경으로 가는 것은 곤란하지만 절강(浙江)과 호광(湖廣, 호남과 호북) 두 성(省)까지의 동행은 허락했다. 루지에리의 이러한 요구는 순찰원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 의해 파견된 중국선교 감독 산데(Edouard de Sande, 孟三德)의 더 중요한 지역으로 선교 거점을 확장하라는2) 지시에 근거한 시도였다. 루지에리 일행이 절강성 여행을 준비하면서 중국 신사들과의 친숙한 교제를 위해 중국식 호(號)를 준비했다. 만력 13년(1585) 루지에리는 ‘복초(復初)’, 산데는 ‘영환(寧寰)’, 마테오 리치는 ‘서태(西泰)’라는 호를 취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신부가 반(半) 이단화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발리냐노는 서양 이름을 사용하라고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발리냐노 조차 ‘입산(立山)’이라는 호를 채택하였고, 이후 선교사들은 중국에 들어가면서 호를 채택하여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3) 선교단 감독 산데는 루지에리에게 이번 여행에 알메이다(Antoine d' Almeyda, 麥安東, 호 입수[立修])를 동반하게 했고, 11월 20일 루지에리, 알메이다 등은 조경지부 정일린을 따라 조경을 출발하여 왕반과 정일린의 고향인 절강성 소흥부(紹興府)에 당도하여 두 관리의 부친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들은 절에 머물기도 했는데, 거처에 제단을 세우고 예수 수난 그림을 걸고 방문하는 승려와 현지 귀족들에게 교리를 전하였다. 이 지역에 머물던 길지 않는 기간 동안 왕반의 칠순 부친과 중병에 걸린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요란한 그들의 선교 방식은 소흥 일부 신사들의 반감과 의혹, 불안감을 야기했다. 선교사들이 사정을 이해했다면 가능한 빨리 떠나야 했으나 루지에리는 그 지역에 머물러 있으려고 고집했다. 영서도의 친속들은 이런 상황을 멀리 조경에 있는 왕반에게 보고하였고, 루지에리는 왕반의 편지를 받고서야 소흥을 떠나 1586년 7월 광주에 도착한 후 알메이다는 마카오로 돌아갔고 루지에리는 조경에 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열렬한 보호자였던 영서도윤 왕반의 호의가 크게 저감하였고 심지어 다음 달 절기에 관행대로 예정되었던 방문도 취소하고 말았다. 또 그의 이름이 새겨진 선교사의 주택 대문과 접견실 안에 걸도록 증정한 영광스러운 편액 2장을 떼어 내도록 명하였으며 마테오 리치가 그린 지도 위에 서명한 이름도 지우게 했다.”4) 조경으로 돌아온 루지에리와 선교사들은 이번 사태가 가져다 줄 후유증을 생각하였지만, 이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 중국 법률과 풍습을 존중하는 이전 방식으로 돌아가 이미 이룩한 성과와 거점을 강화하는 점진적인 침투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제2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모험적인 방식을 한결같이 고집함으로써 중국 관원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이로 인해 선교 사업은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계림(桂林) 방문 조경의 성탑(城塔) 건립 감독관이자 왕반의 절친이었던 담군유(譚君諭)가 도교 참배객이 많은 호북성 무당산(武當山) 방문을 제안해 오자, 루지에리는 1587년 1월 20일 중국인 통역 1명을 대동하고 조경을 출발했다. 그는 광서(廣西)성 성도인 계림(桂林)을 지날 때 현지 관원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성으로 들어가 명조의 번왕(藩王)을 찾아갔다. 그는 진기한 서방 예물로 번왕의 환심을 사서 그의 영향력을 근거하여 계림에 거점과 새 교구 개설을 허락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의 번왕들은 분봉은 받았지만 조정의 통제 하에 있었고, 민간인의 사적인 왕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를 몰랐던 루지에리는 이 황족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현지 행정 관원들을 당혹하게 했다. 결국 광서순무 오선(吳善)은 루지에리에게 즉시 성을 떠나도록 명령했고 동시에 수비대에 경비를 철저히 하라고 명령했다. 성 도처에 선교사를 반대하는 공문이 나붙은 위협 속에 루지에리는 20일 동안 험난한 산길을 걸어서 광서성과 인접한 호남 남부의 백수진(白水鎭)이라는 곳으로 도피했다. 이곳에서 할 일 없이 4개월 동안 머문 뒤 그는 1587년 7월 27일 산데에 의해 조경으로 소환되었다. 왕반은 루지에리가 앞서 소흥에서의 소동에 이어 계림에서도 돌출 행동으로 추방되었음을 확인한 직후 선교사들로 인해 화가 미칠 수도 있음을 느꼈다. 숭희탑 건축에 외국인이 도움을 주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다, 서양식 건축물의 등장에 대한 반감도 인지되고 있었고, 특히 계림에서 루지에리를 내쫓은 광서순무 오선이 곧 양광총독(兩廣總督)이 되어 조경으로 오게 된다는 소식은 그를 더욱 압박했다. 그는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있다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신부들이 바로 마카오로 돌아가도록 지시하였다. 뜻밖의 명령으로 신부들은 중국 내지 선교활동이 와해될 수 있다는 현실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신부들은 우선 임시 거류 허가를 받고 온 산데 감독을 1588년 11월에 먼저 마카오로 돌아가게 하여 최소한의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한편 탑 건립 감독관인 담군유에게 많은 예물을 보내어 중재를 요청하고, 왕반을 만나서는 선처를 호소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간절한 요청에 대해 왕반은 양보하여 한두 명의 선교사들만 총독이 정한 집에 거주할 수 있게 허락하고 다른 사람들의 조경 진입은 불허하였다. 삼릉경(三棱鏡) 도난사건 이런 긴장 국면 속에서 불행한 사건이 또 하나 발생했다. 마카오에서 입교한 뒤 루지에리를 돕고 있던 교명이 마틴(馬丁)으로 불리던 사람이 사기 행각에 이어 절도사건을 일으켰다. 마틴은 과거 연단술(煉丹術)에 빠져 가사를 탕진한 조경의 신입 신자 부자를 꾀어 수은을 백은으로 만드는 연금술(煉金術) 비법을 전수해 주겠다고 하며 경비를 편취하였다. 몇 달을 버티면서 이들 부자의 비법 전수 독촉을 피할 수 없게 된 마틴은 교회당 안에 보관되고 있던 삼릉경(三棱鏡)을 훔쳐 광주로 도망쳤다. 삼릉경 회수를 위해 애쓰던 중 왕반이 몇몇 관원들을 대동하고 교회당의 삼릉경을 빌려 풍경과 항구에 정박 중인 선박을 보려고 하였다. 도난 사실을 알게 된 왕반은 대노하여 관원들을 동원하여 마틴을 잡아들였는데, 마틴은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루지에리가 한 여인과 비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마틴의 여러 죄상이 드러나 심한 고문으로 맞아 죽고 루지에리는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이와 같은 불량 교민 사건으로 인해 조경 기독교회의 신뢰는 한없이 추락하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연로한 양광총독 오선은 성대한 행사에 참석해 정중하게 선교사를 접대했다. 얼마 후 왕반의 후임으로 부임해 온 사람은 선교사들이 잘 알고 있던 혜주지부(惠州知府) 황시우(黃時雨)였는데, 그는 이전에 조경에서 근무할 때 여러 차례 교회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루지에리는 평온의 회복을 확신하고서 새로운 선교 계획을 세우고, 산데 감독을 다시 조경으로 모셔 오기 위해 마카오로 갔다. 그러나 루지에리가 마카오에 도착한 후 예수회 회원들의 우호적이지 못한 견해도 있었고, 결국 순찰원 발리냐노의 결정에 따라 다시는 조경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미주 1) 何高濟 譯, 《利瑪竇中國札記》 上冊, pp.193-194. 2) 羅漁 譯, 《利瑪竇書信集》 上冊, p.74; 何高濟 譯, 《利瑪竇中國札記》 上冊, p.191. 3) 何濟高 譯, 《利瑪竇中國札記》 上冊, pp.192-193. 4) 같은 책,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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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